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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지어 교수 뒤통수 치는 건 결국 일본? 결정적 증거들 [박철현의 도쿄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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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현의 도쿄스캔들] 아베가 쏘아올린 역사수정주의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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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제1천480차 정기수요시위'에서 한 시민이 위안부는 매춘부였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쓴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를 규탄하는 팻말을 목에 걸고 있다. 2021.2.24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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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대학 미쓰비시 로스쿨에 재직중인 존 마크 램지어 법학교수의 위안부 관련 논문 '태평양전쟁에서의 성 계약'을 둘러싼 논란은 램지어 교수의 완패로 끝나는 분위기다. 램지어 교수가 논문의 핵심 근거 중 하나인 '매춘 계약서'의 존재를 "찾을 수 없었다"라고 실토한 내용이 동료 교수에 의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램지어는 두렵고 괴롭다라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잘못된 추론, 아니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료나 증거를 자신의 상상 속에서 창조한 엉터리 논문을 공공연하게 발표한 것 자체가 학자적 양심을 저버린 행위다. 또한 그것이 일본 및 한국의 역사수정주의자들에게 어떻게 악용될지 뻔한 상황에서 이러한 논문을 발표하는 게 일견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램지어 교수가 쏘아올린 작은 공 덕분에 2011년 자민당의 재집권 이후 일본 내에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역사수정주의를 한번 되돌아 볼 수 있게 됐으니 조금은 고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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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주장으로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존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 ⓒ 유튜브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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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지어 주장과 상반된 일본의 과거 사료

원래 역사수정주의는 기존의 역사적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재해석, 재인식 등 비슷한 단어로 치환되기도 한다. 하지만 재해석이 가지는 위험함이 공존한다. 기존의 학설, 즉 수많은 증거(증언, 관련 서류) 등을 통해 확고하게 정립된 학문적 성과가 존재한다.

이를 재해석(수정)하려면 적어도 그에 비등한 증거를 들어야 한다. 사료가 적어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고대사는 이런 작업이 대중에 먹히기도 한다. '환단고기' 같은, 위서를 통한 유사역사학이 고대사에 집중돼 있는 것도 이런 논리이다.

하지만 근현대사는 불가능하다. 생존자의 공통된 증언과 서류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램지어 교수의 경우도 가공의 매춘계약서가 논문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물론 그의 경우 의도된 것이라고 봐야겠지만, 그 지점을 정확하게 지적한 연구자들이 금세 등장한 것도 이 점에 기인한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이후 30년간 이 문제에 천착한 학자, 운동가, 전문가, 나아가 정부기관이 존재한다. 즉 위안부 문제에 관한 프로페셔널은 이미 차고 넘친다. 무엇보다 김학순 할머니의 실명 증언과 우에무라 다카시의 <아사히신문> 보도 이후 일본 정부가 직접 약 2년간 각 분야의 서류 및 증언들을 중심으로 조사를 실시했고, 그렇게 해서 1993년 8월 3일 나온 것이 바로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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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노 담화가 발표된 날 내각관방부에서 같이 배포된 <위안부 문제 조사 과정과 경위에 대한 조사서> ⓒ 내각관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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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담화를 보면 구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 및 모집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부분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감언이설, 혹은 강요로 당사자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위안부로 강제로 차출했으며 이후 위안부 본인의 의지에 반해 모집, 이송, 관리 등 모든 것을 해당 군의 지휘에 맡겼다는 부분도 나온다.

역사수정주의자들은 고노 담화 발표 당시 미야자와 개조내각 및 고노 요헤이가 정치적으로 친한이고 '리버럴'이라서 이런 게 나왔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들이 이런 담화를 발표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고노 담화 1년 전인 1992년 7월 6일에 나온 '가토 담화'이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부터 1년여가 지난 시점에서 당시 가토 고이치 내각관방장관은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조선반도 출신의, 예컨대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작년 12월부터 관계자료가 보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큰 각 정부기관에 대해 정부가 이 문제에 관여했는지 아닌지에 관해 조사를 실시했고 이번에 이 조사결과가 나왔기에 발표합니다. (중략) 제가 요점만 설명 드리자면 위안소의 설치, 위안부의 모집에 해당하는 업자들의 관리, 위안시설의 축조, 증축, 위안소 경영 및 감독, 위안소 및 위안부의 위생관리, 위안소 관계자들의 신분증명서 발급 등에 정부의 관여가 있었다고 인정됩니다.

그리고 가토 장관으로부터 고노 장관으로 이어지는 1년여의 기간 동안 일본정부는 보다 더 넓고 깊게 위안소 및 위안부 실태에 관해 조사했고, 고노 담화가 나온 날 동시에 내각관방내각외정심의실 이름으로 보다 구체적인 조사서 '소위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도 배포됐다. 이 자료를 보면 지금 가장 쟁점이 되고 있는 '위안부의 모집' 부분은 이렇게 돼 있다.
위안부의 모집에 대해서는 군 당국의 요청을 받은 경영자의 의뢰에 의해 알선업자가 모집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 경우에도 전쟁의 확대와 함께 그 인원(기자주-위안부)의 확보 필요성이 높아져 그러한 상황 하에서 업자들이 감언이설, 혹은 협박 등의 형태로 모집하는 경우가 많았고, 나아가 관헌(官憲)이 직접적으로 이것에 가담하는 케이스도 있었다.

이 때 일본 정부가 조사한 정부기관 및 민간기관은 경찰청, 방위성, 법무성, 외무성, 문부성, 후생성, 노동성, 국공립공문서관, 국립국회도서관, 미국국공립도서관이며, 인터뷰 대상자는 종군위안부, 구 일본군, 조선총독부 관계자, 민간위안소 경영자, 위안소부근의 거주자, 역사연구가 등이었다. 또한 담화 발표 직전인 1993년 7월 26일부터 30일까지 닷새간 한국을 방문해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와 협력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인터뷰도 진행했다고 조사서에 밝혀두었다.

한 나라의 정부가 막대한 물량과 인원을 투입해, 그것도 자신들의 감추고 싶은 사안을 밝힐 수밖에 없을 정도로 위안부에 관한 여러 문제는 실제로 존재했으며 고노 담화 이후 28년간 수많은 연구자들의 논문과 자료 등이 추가로 나왔다. 나만 하더라도 2010년 4월 <제이피뉴스> 기자로 재직하던 때 구 일본군 군속 마쓰바라 마사루 씨를 인터뷰 했었다. 그때 그는 '남국료'라는 이름의 위안소 출입증을 보여줬고, 인터뷰를 통해 군 위안소 모집과 관리에 구 일본군이 개입해 있었다는 것을 생생하게, 그림까지 그려가며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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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태평양 트럭제도 나쓰시마 섬에 있었던 남국료출입증 원본. 2010년 4월 구 일본군 군속 마쓰바라 마사루 씨는 '남국료'라는 이름의 위안소 출입증을 보여줬고, 인터뷰를 통해 군 위안소 모집과 관리에 구 일본군이 개입해 있었다는 것을 생생하게, 그림까지 그려가며 증언했다. ⓒ 제이피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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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안소 출입증 뒷면에 기재된 주의사항. 출입증 앞면 상단에는 발급번호를 나타내는 '갑제511호(甲第511號)'가 표시돼 있고 그 왼쪽 밑에는 해당 군속의 직급이 씌여져 있다. 뒷면에는 이 출입증을 사용할 때의 주의사항(타인에게 융통하지 말 것, 분실하거나 습득했을 때는 즉시 본부 서무주임에 제출할 것, 분실했을 경우 재발행하지 않음, 퇴직 및 그 외 다른 이유로 필요없어질 경우 즉시 반납할 것)이 나열돼 있다. ⓒ 제이피뉴스 제공



아베의 역사수정주의

그런데 자민당의 재집권 이후 일본 내 역사수정주의(극우주의) 흐름이 거세지더니 결국 부끄러운 과거를 잊거나 재해석 하자는 움직임이 발호했다. 위안부 모집은 민간의 계약에 의한 것, 조선업자들이 사기를 친 것, 위안부들은 다 알고 돈 벌러 온 매춘부 등의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오기 시작한 것도 아베의 재집권 이후 약 7년 8개월 동안 정착된 것이다. 아니,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베 신조는 이미 제1차 집권 당시인 2007년 3월, 말로는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언급으로 역사수정주의자의 특징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위안부) 조사결과의 발표까지 정부가 발견한 자료 중에는 군이나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제연행을 직접 나타내는 기술은 없었다. (2007년 3월 16일 '위안부질문주의서' 중에서)

하지만 같은 시기인 2007년 재단법인 '평화를 위한 아시아 여성기금'이 발행한 '구술 히스토리 - 아시아여성기금'을 보면 1993년 당시를 기억하는 이시하라 노부오(미야자와 내각 당시 관방부장관)는 아베 총리의 단정적인 발언과는 다른 언급을 한다.
"(1993년 당시) 통지나 지령 등 여러 자료를 모았지만 문서로 강제성을 입증할만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물적 증거가 없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위안부들의 증언, 16명을 만나 인터뷰를 한 결과 뭘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이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본인의 의사에 반해 위안부가 됐다고 판단했다."

"서류가 아닌 인터뷰로 강제성을 입증하는 게 틀렸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몇 번이고 비판을 당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부분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내각으로서 정부로서 어떻게 할 것인가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6분 중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위안부가 되었고, 끌려 온 처지에서 저항할 수 없어 위안부가 되거나 사기를 당했다는 위안부가 틀림없이, 그것도 아주 많이 존재했다. 이건 인터뷰를 통해 사실일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인도적 입장에서 인터뷰를 했고 사실이라는 판단을 담당관으로부터 받았으므로 그들의 심증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강제성을 인정한 것이다."

수정주의의 폐해는 바로 이 부분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처음에는 고노 담화를 인정한다고 해놓고, 세부내용을 비튼다. 서류가 없기 때문에 강제성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한다. 증언은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라며 깡그리 무시한다. 일본정부는 수십, 수백 명의 사람을 인터뷰 했다. 나도 위에서 언급했던 실제 남태평양 트럭제도에서 위안소를 운용했고, 사용했던 구 일본군 군속의 증언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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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2주년 3ㆍ1절인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겨레하나' 주최로 열린 '온라인 3·1 만세시위'에서 참가자들이 위안부 관련 왜곡 발언을 한 램지어 하버드대 교수 등의 사진을 격파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 단체는 전국 각지에 있는 소녀상과 강제징용노동자상 앞 현장을 화상회의 프로그램 '줌'(ZOOM)으로 연결하고 '일본은 사죄하라' 구호와 만세 삼창을 외쳤다. 2021.3.1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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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정주의자들은 이러한 증언은 증거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말하며, 이런 '부분의 비틈'은 점점 전체를 잠식한다. 예컨대 태평양전쟁(수정주의자들은 대동아전쟁이라 부르지만)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쩔 수 없는 전쟁이었다면서 전쟁의 정당성을 옹호해버리는 것이다.

이번 램지어 교수 스캔들은 일본식 역사수정주의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세계적으로 반박당해 이미 폐기처분 되어버린 그의 논문이 지금도 일본 내의 극우들에게 인용되는 모습을 보면서 역사수정주의자 아베 전 총리 및 그 일파들의 그림자가 여전히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느낀다.

박철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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