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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中 개도국 지원에 美는 코백스 40억弗 투입… 불 뿜는 ‘백신 대전’ [세상을 보는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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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G7 vs 중·러 패권 경쟁

中 시노백·시노팜, 러는 스푸트니크V

동남아·중동·아프리카 등에 집중 공급

포스트 코로나시대 영향력 확대 포석

미·유럽 초반엔 자국 문제에 발목 잡혀

뒤늦게 재정 늘려 중·러 반격에 나서

“백신이 냉전시대의 핵과 같은 영향”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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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국제질서는 우리나라가 주도한다.” 미국과 중국이 백신 외교로 중동과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 국가 등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게임체인저인 백신이 G2(주요 2개국)의 패권 판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미·중의 백신 냉전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인 미국·G7(주요 7개국)과 권위주의 체제인 중국·러시아 간 체제경쟁으로 확산되는 형국이다. 전문가들은 “백신은 개발도상국들을 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과거 동서 냉전 시절의 핵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중국· 러시아의 선제 공격

중국과 러시아는 백신 외교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적극적이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의 자국 우선주의에 밀려 백신을 확보하지 못한 개발도상국들을 향해 지원 공세를 펴고 있다. 중·러가 손을 맞잡고 우군 만들기에 나선 것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글로벌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포석이다. 미국이 동맹 강화를 통해 자신들을 압박할 경우 힘을 합쳐 대응하기 위한 의도도 읽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발원지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중국은 시노백·시노팜 백신을 무기로 외교 영토 확장에 나섰다. 국가 이미지를 쇄신하고 글로벌 리더십을 강화해 중국 중심으로 국제질서의 판을 새로 짜려는 계산이 깔려있다. 시노백은 브라질·우크라이나·필리핀 등 12개국에 3억5000만회분 이상 수출 계약이 이뤄졌고, 시노팜도 11개국에 1억9400만회분의 선공급 계약이 체결됐다. 캄보디아에 100만회분을 기증하는 등 53개국에 인도적 지원까지 나서면서 시노백과 시노팜은 개발도상국 백신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산 백신은 저렴한 가격과 보관·운송의 편의성을 무기로 시장을 넓히고 있다. 다만 예방 효과가 50%대여서 신뢰도가 낮은 게 문제다.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동남아 국가와 일대일로(해상·육상 실크로드) 정책의 주요 관련 국가들이 중국 백신외교의 주요 공략 대상이다.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제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어온 필리핀에 지난 7월 백신을 우선 공급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 8월 세계 최초로 스푸트니크V 백신을 개발한 러시아의 행보도 거침이 없다. 백신 명칭 스푸트니크V에는 1957년 소련이 인류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V를 쏘아 올렸을 때와 같은 패권국이 되고픈 러시아의 강한 열망이 녹아있다. 스푸트니크V는 23개국에서 사용 승인을 받았고 멕시코와 몽골, 이란, 헝가리 등에서 접종이 예정 또는 진행 중에 있다. 미국의 모더나·화이자 백신과 달리 일반 냉장온도로 유통·보관이 가능하고 2회분 1세트 20달러로 비용이 저렴한 것이 장점이다. 예방 효과 91.6%의 임상 3상 결과가 국제의학지 ‘랜싯’에 실리면서 스푸트니크V의 인기는 급상승 중이다. 알자지라 방송은 “중국과 러시아는 백신외교를 통한 소프트파워 강화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새롭게 편성될 국제질서에 대비하고 있다”며 “인도주의적인 지도국 이미지로 영향력과 위상을 확대하고 있는데, 이는 손에 피를 묻히고 독재자들만 지원하는 국가로 보여지길 원치 않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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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격 나선 미국·G7 회원국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지난해 10월 중국과 러시아 백신보다 예방 효과가 높은 화이자(95%)와 모더나(94.5%) 등의 백신을 개발했다. 이처럼 백신 전쟁에서 승리할 여건을 갖췄음에도 백신외교에서 중국과 러시아에 밀린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코로나19 문제가 심각해 다른 나라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또한 서구 백신은 정부 주도로 개발된 중국·러시아 백신과 달리 민간 주도로 개발돼 저개발국 지원에 용이하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자국 우선주의 외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외교협회(CFR)의 스티븐 쿤 선임연구원은 “중동 사람들은 그동안 지구촌의 앞서가는 기술 강국이자 문제 해결사로 미국을 봤다. 하지만 백신외교에 관한 한 미국은 그곳에 없었다”며 “이제 중국이 분명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최근 백신외교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들로 이뤄진 G7 정상들은 지난달 19일 정상회의를 갖고 세계보건기구(WHO)가 추진하는 코백스(COVAX·국제 백신 공동구매 프로젝트)에 75억달러를 지원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코백스가 올해 말까지 20억회분 이상의 백신을 확보해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들에 공급한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G7이 코백스에 대한 재정 지원을 늘려 백신을 더 많이 보급하기로 한 것이다. 서방 주요국들이 백신을 매개로 글로별 영향력을 키우려는 중국, 러시아에 대한 반격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아프리카 의료진을 위한 백신을 지원하지 않으면 서방의 영향력은 개념상으로만 존재할 것”이라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말에서 서방 국가들의 위기감이 감지된다. G7은 자신들이 확보한 백신을 직접 보내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세계적 감염병이기 때문에 세계인이 모두 백신을 맞도록 해야 한다”며 남는 물량을 빈곤국에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이 코백스 지원금의 절반이 넘는 40억달러를 내놓기로 한 것은 시사점이 크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 기조가 트럼프 행정부의 고립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뮌헨안보회의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특히 “중국과의 장기적인 전략적 경쟁에 함께 대비해야 한다”면서 유럽동맹국들의 동참을 촉구했다. 중국을 주저앉히기 위한 미국의 압박이 한층 거세질 것임을 예고하는 발언이다. 미·중 패권경쟁의 최종 승자가 어느 나라가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천연두 퇴치’ 미·소 손잡자 완전 박멸 성공 거둬

백신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시대에도 패권과 이념 경쟁의 도구로 작용했다. ‘두 얼굴의 백신’ 저자 스튜어트 블룸은 “동서 양 진영의 정치인들은 감염성 질환을 통제해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없도록 방지하는 일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둠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체제가 우월하다는 사실을 웅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분석했다.

미국과 소련은 1948년 세계보건기구(WHO) 출범 직후부터 팽팽한 기싸움을 벌였다. 미국 주도의 WHO가 말라리아 퇴치 등을 우선사업으로 정하자 소련이 반발하며 탈퇴한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천연두가 크게 유행해 박멸에 필사적이었던 소련은 WHO의 지원을 기대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탈퇴라는 초강수를 뒀다. 소련은 “WHO가 미국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다”고 비판했다.

말라리아 퇴치 사업에는 미국의 노림수가 숨어 있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은 말라리아 퇴치 캠페인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넓혀가는 공산주의를 견제할 유용한 수단이라고 판단하고 예방용 백신 개발과 습지 배수, DDP 살포 등 모기 번식을 막는 데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WHO에 지원했다.

소련이 반격에 나섰다. 1957년 WHO에 복귀한 소련은 우선사업 목록을 재고하라고 요구했다. 가까스로 천연두 통제에 성공한 소련은 전 세계 인구의 80%가 백신을 접종하면 천연두 퇴치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WHO는 소련의 제안을 수용해 천연두 퇴치를 우선사업 목록에는 올려놓았지만, 미국을 의식해 사업 추진에는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무늬만 우선사업이었던 것이다.

미국은 말라리아 퇴치 사업을 1965년까지 야심 차게 밀어붙였다. 하지만 백신 개발에 실패하면서 후원금의 효용성 논란에 직면했다. 정치권 지원까지 시들해지자 인도주의에 헌신하고 있음을 보여줄 대안을 찾아야 했고, 울며 겨자 먹기로 소련과 손을 잡고 천연두 퇴치에 힘을 쏟는 적과의 동침을 선택하게 된다.

WHO의 우선사업이면서도 사실상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하던 천연두 퇴치 사업에 속도가 붙었음은 물론이다. 전염병으론 가장 많은 10억명의 목숨을 앗아간 천연두는 미국의 후원금과 소련의 백신 기술이 접목되면서 1980년 결국 인간이 완전 박멸한 첫 질병이 됐다. 천연두 퇴치는 세계 강대국들이 패권주의를 내려놓고 힘을 합치면 질병과의 전쟁에서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김환기 논설위원 kgk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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