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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아무튼, 줌마] 스테이키? 밥과 김치가 보약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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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조선일보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스웨덴에서 1년 연수하던 시절입니다. 웬만한 칼바람엔 끄떡없는 강철 체력인데, 북구의 추위가 혹독했는지 감기에 걸리다 못해 이석증까지 찾아와 옴짝달싹 못 한 채 방에만 누워 있게 됐습니다. 천장이 뱅글뱅글 돌아 아무것도 못 먹고 그저 끙끙 앓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는데, 밖에서 초인종이 울립니다. 문을 여니 한국에 계셔야 할 어머니가 서 있습니다. 양손에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요. 여길 어떻게 찾아오셨느냐 묻자, “김치 맛있게 담가 우리 손주들 먹이려고 왔지, 스테이키 스테이키 해도 한국 밥이랑 김치가 최고 보약이지” 하시며 빙그레 웃습니다.

물론 꿈이었지만 꿈속에서 본 김치가 얼마나 맛있어 보이던지, 병석에서 일어나 가장 먼저 한 일이 김치를 담근 것입니다. 절인 배추에 양념이라곤 멸치 액젓에 채 썬 무, 양파가 전부였지만, 나이 마흔에 이역만리 타국에서 처음 담가본 김치는 꿀맛이었습니다. 빵과 시리얼로 대충 때우던 밥상에 김치가 올라온 뒤로 저와 아이들 모두 감기에 걸리지 않았으니 “밥과 김치가 보약”이라는 한국 어머니들 말씀은 진리인가 봅니다.

올해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영화 ‘미나리’에서도 미국 사는 딸과 손주를 위해 멸치와 고춧가루, 한약재를 잔뜩 싸서 날아가는 할머니가 등장해 인기랍니다. “옘병” “젠장”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할머니가 “어릴 때부터 돈 따먹는 경쟁력을 길러야 한다”며 손자에게 화투를 가르치는 모습에 해외 평단이 배꼽을 쥐며 찬사를 보낸다지요. 한국에선 “못 배워 무식하고, 우악스럽고, 극성스러운 여인네들”로 평생 설움 받고 무시당하며 살아온 할머니들인데 왜 해외에서는 ‘halmoni’라고까지 표기하며 열광하는 걸까요. 격랑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며 터득한 한국 여인들의 지혜와 넉살, 그 푸짐한 사랑과 인내에 감동한 걸까요. 우리는 그녀들 노고에 제대로 경의를 표한 적이 있나요.

코로나 팬데믹으로 지구촌이 그 어느 때보다 가족의 사랑과 교감을 소중히 여기게 된 것도 ‘K할머니’ 인기의 원인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지난달 28일까지 서울 현대화랑에서 열린 ‘집, 가족, 자연 그리고 장욱진’전은 일찌감치 관람 예약이 마감됐습니다. 장욱진 30주기를 기념한 전시인데, 가난하지만 자연 속에서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가족들이 오종종 모여 사는 풍경이 코로나로 울울해진 마음을 달래주더군요. 그 여운 오래 남기고 싶어 초록색 둥근 나무가 그려진 장욱진 판화를 한 점 구입하는 작은 사치를 부려봤습니다. 집 안에 봄이 가득해졌습니다.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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