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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성범죄 재판, 이렇게 진행된다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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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피해자 증인신문기일 시나리오

성범죄 피해자 발언권 보장하고

부적절 변론 미리 제한하면…

“피해자 권리를 놓치지 않으면서

실체적 진실 찾는 데 도움될 것”


한겨레

서울 지역의 한 법원.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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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 저도 살펴보고 있겠지만 제가 미처 파악하지 못하는 사항이 있을 수 있으니 증인은 신문 중 편안히 말씀하시면 됩니다.”

법원 젠더법연구회 ‘재판다시돌아보기팀’이 지난해 9월 주최한 ‘성범죄 재판 함께 돌아보기’ 포럼 후속으로 지난 1월 펴낸 자료집에 담긴 ‘성범죄 피해자 증인 신문기일 시나리오’ 가운데 일부다. 재판장이 증인으로 나온 성범죄 피해자에게 증언 거부권 등을 알리면서 적극적 진술도 가능하다는 점을 알리는 대목이다. 이 시나리오엔 “피해자들이 증언에 대해 답하는 (것) 외에 어떠한 의사를 표시해도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으므로, 증인이 이 사실을 잘 인지할 수 있도록 진정성 있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는 주석이 달렸다. 재판장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묻는 것만으로도 피해자가 법정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게 돕는다는 것이다.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판사들이 비법률적인 표현인 ‘진정성’이라는 단어까지 쓰며 주석을 단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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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의 출발점은 서울서부지법에서 2019년 12월 ‘법정 밖에서 성폭력 피해생존자와 판사들이 만난 최초의 기록’이라는 이름으로, 판사 20여명과 활동가 ‘마녀’가 만난 자리다. 마녀는 2014년부터 성범죄 재판 방청 등을 통해 피해자를 지원해온 활동가다. 이들은 사법정책연구원이 2016년 5월 발표한 ‘성폭력 재판절차에서의 피해자 증인신문 재판참고사항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 담긴 ‘진행 시나리오’를 보완해보자는 의견을 나눴다. 이후 젠더법연구회 인터뷰단의 ‘성폭력 피해자들이 재판절차에 대해 말하다, 모진 만남’ 보고서 등을 반영해 만든 시나리오를 지난 1월 포럼 후속 자료집 부록 형태로 처음 내놨다. 시나리오를 대표 집필한 ㄱ판사는 “보호 법익, 재판 실무, 시민사회의 시선으로 함께 나눴던 고민을 절차적으로 구현한 시나리오가 있다면 피고인과 피해자 권리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실체적 진실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성범죄 재판 경험이 있는 판사들은 초고를 쓴 뒤 퇴고를 거듭하며 신문 전 소송 지휘, 증인신문 등 성범죄 피해자 증인신문 기일 전반에 걸친 시나리오를 만들어갔다. 시나리오는 심리 비공개가 일반인과의 관계에서, 피고인과의 접촉 차단은 피고인과의 관계에서, 각각 피해자의 접촉을 소극적으로 차단한다고 짚었다. 신뢰관계인이 법정에 동석하는 것에 대해선 피해자 진술을 돕는 적극적 조처라는 내용도 담았다. 또한 피고인이 기침, 웃음 등의 소리를 통해 피해자 심리상태에 영향을 끼치는 행위를 하지 말라고 재판장이 미리 주의를 시키고, 피해자에게도 피고인 행동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고 알려줄 필요가 있다는 점도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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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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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에는 피고인 쪽 변호인의 반대신문에 앞서 재판장이 미리 부적절한 변론 등을 제한하면, 신문을 방관하지 않겠다는 의사로 보일 수 있다는 설명도 담았다. 또한 ‘증인은 당시 상황에서 왜 무엇을 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 대신, ‘증인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바꿔 묻는 요령도 제안했다. 여전히 많은 성범죄 재판에서 재판장이 피해자에게 ‘왜 저항하지 않았나’ ‘왜 주변에 즉시 알리지 않았는가’라고 묻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특히 ‘피해자가 범행 당시 저항하지 않거나 사건 당일 그 뒤에도 피고인과 함께 행동했다며 성범죄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 사례도 있다. 법정에 앉아 있던 피해자가 진술하길 원할 경우 직권으로 의견 진술 기회를 주거나 증인신청을 권유할 수 있다는 점도 담았다. 시나리오에 대한 의견을 함께 나눴던 마녀는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입는 ‘2차 가해’는 절차적 측면에서도 많이 발생한다. 시나리오가 있다면 피해자가 보호받아야 할 ‘최저선’을 스스로 알고 대처할 수 있게 도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판사들은 오류나 수정 가능성 등을 고려해 시나리오를 ‘버전 1’로 정의했다. 물적 증거가 부족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최소화하면서도 증언의 신빙성을 검증할 수 있는 증인신문 등에 대한 논의도 아직 과제로 남아 있다. 아동·청소년이나 장애인 피해자에 대한 증인신문 등도 추가 논의가 필요한 영역이다. 법원 내부 게시판에 시나리오가 공유되자, 성범죄 재판 경험이 있는 한 판사는 “도움을 받아야 하는 피해자도 있지만 허위 진술을 하는 피해자도 있지 않으냐”고 물었다. ㄱ판사는 그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시나리오는 오히려 이처럼 다양한 피해자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작성됐다. 시나리오가 운용의 묘를 제한하지 않으면서도 적정한 소송지휘권 행사를 위한 기준을 제시해 판사들의 시야를 넓히는 역할을 했으면 한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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