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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수베로 감독님, 여기는 ‘빠던’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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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창원NC파크에서 열린 NC-한화전. 8회말 NC가 14-4로 크게 앞선 2사 상황에서 카를로스 수베로 한화 감독은 외야수인 정진호를 마운드에 올렸다. 올 시즌 두 번째 등판이었다. 수베로 감독은 10일 두산전에서 1-14로 크게 뒤지자 야수 강경학과 정진호를 투수로 투입한 바 있다. 타석엔 이날 3타수 무안타에 그친 나성범이 들어섰다.

그런데 미묘한 장면이 나왔다. 정진호는 아무래도 전문 투수가 아니다 보니 제구가 잘 잡히지 않으며 연속해서 볼 3개를 던졌다. 경기를 중계하던 장정석 KBS N 해설위원은 “스리볼 상황이지만 나성범 선수라면 히팅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3-0에서 나성범이 배트를 돌렸고, 파울이 나왔다.

그러자 수베로 감독이 더그아웃에서 격분했다. 수베로 감독은 손가락 세 개를 펴며 좀처럼 화를 삭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더그아웃을 빙빙 돌면서 화를 냈다. 이에 NC 이동욱 감독도 한화 더그아웃 쪽을 보며 항의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수베로 감독이 손가락 세 개를 편 것으로 보아 크게 점수가 앞선 스리볼 상황에서 나성범이 스윙을 한 것에 대해 화가 난 것을 보인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선 이 장면이 일종의 불문율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17일 NC전에서 나성범이 3-0 상황에서 배트를 휘두르자 세 손가락을 펼쳐보이며 화를 내는 수베로 감독. / KBS N 스포츠 중계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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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수퍼스타 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가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타티스 주니어는 샌디에이고가 10-3으로 크게 앞서고 있던 8회 1사 만루에 볼카운트 3-0 상황에서 스윙을 해서 만루 홈런을 기록했다.

그러자 상대팀인 텍사스 레인저스의 크리스 우드워드 감독은 “오늘날 많은 불문율이 위협받고 있다”며 “7점 차로 앞선 상황에서 스리볼 노스트라이크에 스윙한 것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밝혔다. 실제 만루홈런을 맞은 뒤 바뀐 투수 이안 기보트는 후속 타자인 매니 마차도에게 빈볼성 위협구를 던졌다. 이 경기 이후 우드워드 감독은 1경기, 기보트는 3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메이저리그엔 많은 불문율이 있다. 큰 점수 차에 도루를 시도하면 안 되거나 상대 투수가 노히트노런을 기록 중인데 번트를 대면 안된다는 등의 암묵적인 룰이다. 한국보다 더 보수적인 메이저리그는 타자가 타석에서 팔꿈치 보호대를 사용하는 것을 탐탁치 않아하는 문화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불문율은 이른바 ‘빠던’으로 불리는 배트플립이다. 타구를 치고 배트를 던지는 행위는 미국에선 곧바로 보복 빈볼을 부르는 행위로 통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메이저리그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로날드 아쿠냐 주니어나 타티스 주니어와 같은 젊은 스타들은 과감히 배트를 던진다.

미국에서 메이저리그가 시청 연령층이 가장 높은 올드한 종목으로 통하는 가운데 리그 내부에서도 고지식한 불문율을 벗어나야 젊은 팬들을 더 끌어모을 수 있다는 의견이 많다. NBA에선 화려한 덩크 슛이 폭죽처럼 터지는데 메이저리그에선 배트 하나 제대로 못 던지니 젊은 팬들의 눈길을 어떻게 사로 잡겠느냐는 주장이다.

앞에서 소개한 우드워드 감독의 ‘큰 점수 차로 이긴다면 스리볼 상황에서 스윙하지 말라’는 주장은 미국 팬들에게도 외면을 받았다. 트위터에서 3000여명이 참여한 설문조사에서 90% 가량이 ‘웬 불문율이냐’란 반응을 보였다. 왕년의 명 투수 오렐 허샤이저는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더구나 수베로 감독이 화를 낸 장면은 KBO리그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국 프로야구는 ‘빠던’을 경기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리그다. 배트를 던지면 안 된다거나 홈런을 치고 타구를 오래 쳐다보면 안된다거나 하는 불문율 따윈 없다. 타자들은 경쾌한 리듬으로 배트를 던지고, 팬들은 이 모습을 보며 즐거워 한다.

한국과 미국의 야구 문화는 분명히 다르다. 몸에 맞은 공을 던지고 사과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미국과 달리 KBO리그에선 투수가 공을 맞은 타자에게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종종 취한다. 크게 점수가 앞섰다고 스리볼에서 배트를 내지 말라는 주장은 한국 팬들 입장에선 그저 어리둥절한 얘기다.

오랜 시간 야구를 했던 미국을 떠나 KBO리그로 온 수베로 감독은 적응을 위해 애를 쓰고 있을 것이다. 다음 번에는 화를 내기 전에 KBO리그 문화에 대한 의견을 먼저 구해보면 어떨까 싶다.

[장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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