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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수조 속 '메리야스'처럼 겹겹이 쌓인 재난 이후의 시간들...연극 '양갈래머리와 아이엠에프'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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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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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윤미현이 신작 <양갈래머리와 아이엠에프>로 돌아 왔다. 연극은 무대 위 수족관 속에 놓인 메리야스 만큼이나 겹겹이 쌓인 실패의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이자, IMF 외환위기 이후 고단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평범한 한 가족의 이야기다. 사진제공 무브온 ⓒ최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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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 횟집에나 있을 법한 수조 하나가 덩그러니 놓였다. 눈에 띄는 것은 장식용 돌, 플라스틱 수초와 함께 수조 안에 차곡차곡 쌓인 하얀 ‘메리야스’들이다. 지난 10일 막을 올린 연극 <양갈래머리와 아이엠에프>는 IMF 외환위기라는 예기치 못한 사회적 재난 이후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수족관 속 메리야스만큼이나 겹겹이 쌓인 실패의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연극은 아파트 주민들의 ‘갑질’로 궁지에 몰린 경비원 김씨 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김씨는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실직했는데 그 후 20년 넘게 흐르는 동안 되는 일이 없다. 횟집부터 정육점, 슈퍼, 찜닭집, 치킨집까지 온갖 종류의 가게를 열었지만 줄줄이 망했고, 그 장사의 흔적들이 재고 더미가 돼 집 안 곳곳에 쌓였다. 가족들의 서랍장이자 의자로 사용되는 수족관 역시 그 가운데 하나다. 남편의 실직 이후 20년 가까이 콜라텍 주방 일을 해온 엄마는 어느날 머리를 양갈래로 땋기 시작하며 자리에 드러눕는다. 그날부터 엄마는 캘리포니아 제과점에서 꽈배기를 먹던 양갈래머리의 학창 시절과 모든 고난이 시작된 IMF 외환위기 시절, 두 기억만을 오가며 살아간다.

<양갈래머리와 아이엠에프>는 극작가 윤미현(41)이 희곡을 쓰고 연출한 신작이다. 16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만난 윤 작가는 “IMF 체제 이후를 살아가는 평범한 한 가정을 통해 왜 우리 삶은 성실히 살아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지 묻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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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양갈래머리와 아이엠에프>의 극본과 연출을 맡은 극작가 윤미현.


재난은 늘 그렇듯 취약한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찾아온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오래 남는다. 연극은 20여년 전 IMF 외환위기 시절을 다루지만,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지금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윤 작가는 “샌들 수선을 위해 고속터미널에 있는 구둣방을 찾았다가 우연히 듣게 된 이야기에서 출발한 작품”이라고 했다. “구둣방 할아버지가 강남에서 경비원 일도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신발 밑창이나 인생이나 한번 떨어진 것은 다시 붙일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붙여봐야 잠깐일 뿐이지 얼마 못 가서 다시 떨어진다고, 할아버지와 아내분도 6·25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만 해왔는데 좀처럼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고요.”

극중에서 양갈래로 머리를 땋은 엄마는 그런 삶의 고단함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동시에 가장 역할을 해오던 남성이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는 동안 묵묵히 일하며 가계를 실질적으로 책임져온 사람이기도 하다. 윤 작가는 “어떤 위기 때마다 희생해온 사람들이 엄마들이었던 것 같다”며 “특히 IMF 체제 이후로 집에서 입던 바지를 그대로 입고 식당이나 찜질방 등 생활전선에 뛰어든 분들 중 주부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대물림된 것은 가난뿐만이 아니다. 이야기는 아파트 입주민들의 ‘갑질’에 시달리는 김씨에게 기자가 찾아와 주민들을 고발하라고 채근하며 시작된다. 김씨는 행여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걱정에 세차, 쓰레기 심부름 등 주민들의 온갖 무리한 요구를 참고 응하는데, 고발을 꺼리는 김씨를 비난하는 기자의 태도 역시 주민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때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했던 그의 장남은 의사들의 온갖 ‘갑질’이 트라우마처럼 남아 집 안에만 틀어박힌다. 시골 출신이라 냄새가 난다며 군대 선임에게 폭행을 당했던 한 청년은 복수를 위해 선임이 사는 아파트를 배회하다 김씨를 만난다. 윤 작가는 “타인의 노동을 하찮게 여기는 게 점차 심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누군가의 노동을 필요로 할 때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일 뿐이지 그 사람의 인격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거나 그 사람의 시간까지 사는 것은 아니잖아요. 극중에 아버지가 청년에게 ‘돼지감자 농사를 지어서는 대기업 임원을 이길 수 없다’고 하는 대사가 있어요. 그런 부조리가 점차 고착화된다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픈 현실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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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양갈래머리와 아이엠에프>의 한 장면. /사진제공 무브온 ⓒ최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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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어둡게만 흘러갈 수 있는 소재지만, 연극엔 윤 작가 특유의 유머가 넘친다. 공연 중간중간 나오는 6곡의 노래와 라이브 기타 연주도 몰입감을 높인다. 국립오페라단 <빨간바지> 등 창작오페라에서 윤 작가와 호흡을 맞춰온 나실인 작곡가가 곡을 썼다.

2004년 소설가로 먼저 데뷔한 윤 작가는 한국사회의 부조리를 날선 유머와 풍자로 비튼 희곡으로 주목받았다. 2012년 구둣방 가족과 청년실업자의 이야기를 담은 <텃밭 킬러>로 연극계에 데뷔한 뒤 ‘노인 3부작’ <장판> <궤짝> <광주리를 이고 나가시네요, 또>를 잇따라 선보였다. 2018년 연극 <텍사스 고모>로 동아연극상 희곡상을 수상했고, 2019년엔 <목선>으로 벽산희곡상을 받았다.

<양갈래머리와 아이엠에프>는 그의 첫 연출작으로, 이미 집필을 마친 ‘IMF 3부작’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이다. 당초 지난해 3월 막을 올릴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로 1년 미뤄졌다. 윤 작가는 “데뷔 때부터 함께해온 이영석·홍윤희 배우 등 오래 손발을 맞춰온 배우들 덕분에 작업하기 수월했다”며 “6월엔 연극 <목선>을 무대에 올릴 예정”이라고 말했다. 공연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25일까지.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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