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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이슈 故최숙현 선수 사망사건

[단독] "극단선택 故최숙현, 업무상 질병" 스포츠계 첫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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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트라이애슬론 국가대표 출신의 최숙현 선수가 지난해 6월 26일 부산의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진은 납골당에 안치된 고 최숙현 선수의 유해.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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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감독과 운동처방사, 선배 선수들의 폭행과 가혹행위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경북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팀 소속 고(故) 최숙현 선수의 죽음이 단순 자살이 아닌 ‘업무상질병’에 따른 사망이라는 판정이 나왔다. 병원이나 일반 사업장이 아닌 스포츠 업계에서 이 같은 판정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21일 중앙일보가 입수한 업무상질병판정서에 따르면 근로복지공단 대구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지난 8일 심의 결과 최 선수의 사망에 대해 “업무상 질병에 따른 사망으로 인정된다”고 판정했다. 해당 질병은 ‘적응장애’다. 적응장애는 감당하지 못할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불안이나 우울증 같은 감정적 증상이나 문제 행동이 나타나고 시간이 지난 후에도 원래 상태로 돌아오지 못하는 질병을 말한다.

앞서 최 선수는 지난해 6월 26일 오전 1시쯤 부산시 동래구 부산시청 트라이애슬론 직장운동부 숙소에서 ‘엄마 사랑해, 그 사람들의 죄를 밝혀줘’라는 문자메시지를 가족에게 남기고 숨진 채 발견됐다. 경북 경산시 경북체육고등학교를 졸업한 최 선수는 2017년과 2019년 경주시청 직장운동부에서 활동하다 지난해 초 부산시청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이뤄진 수사를 통해 최 선수가 전 소속팀인 경주시청에서 감독과 팀닥터, 일부 선배들로부터 지속적인 가혹행위와 괴롭힘 등을 당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최 선수가 숨지기 전 수년간 모은 녹취록에는 자신이 당한 가혹행위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녹취록에는 체중 조절을 실패한 최 선수에게 감독이 폭언을 퍼붓고 팀닥터가 수차례 폭행을 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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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숙현 선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 어머니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남겼다. 사진 최숙현 선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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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복지공단 판정서에 따르면 최 선수는 경주시청팀에서 활동하던 기간 중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진료를 받았다. 2019년 4월 24일부터 5월 19일까지 진료받은 기록에는 “최 선수가 정서적 불안정성, 우울, 불안, 공황발작 등을 경험하며 이로 인한 자아 강도의 저하, 충동성, 자살사고, 자해 등을 동반하고 있다”며 ‘적응장애’ 진단을 내렸다.

판정서에는 최 선수가 당한 가혹행위에 대한 내용도 담겨 있다. ‘경주시체육회 소속 트라이애슬론 선수로 활동하며 감독, 직원, 동일 종목 선배들에게 가혹행위를 당함’, ‘경주시체육회가 주관하는 뉴질랜드 전지훈련에 동료 선수가 고인을 왕따시키고 욕설을 하는 등의 가혹행위를 가함’ 등이다.

또 지난해 2월 최 선수 측이 가해자들을 상대로 고소를 한 이후에도 ‘가해자들이 본인들에게 유리한 진술을 하는 등 수사를 방해했고 경주시청, 국가인권위원회, 스포츠 인권센터 등에 관련 사건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했으나 실질적인 대면조사도 실시하지 않고 오히려 가해자들끼리 말 맞춘 진술을 믿는 듯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자 심리적 압박을 받았다’는 내용도 기재됐다.

근로복지공단은 이런 정황을 종합해 “이러한 일련의 사건과 경험으로 인한 정신적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가중돼 정상적인 인식기능이 뚜렷하게 저하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한 것으로 판단되므로 고인의 사망은 업무와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는 것이 참석 위원의 일치된 의견”이라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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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13일 고 최숙현 선수 사건과 관련해 가혹행위를 한 혐의를 받는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철인3종)팀 운동처방사 안주현씨가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기 위해 대구지방법원에 도착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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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21일 故 최숙현 선수를 포함해 팀 소속 선수를 폭행한 혐의를 받는 김규봉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철인3종)팀 감독이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를 마친 후 나서고 있는 모습.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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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복지공단의 판정은 현재 이뤄지고 있는 가해자들에 대한 재판과 경찰 수사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재판에 넘겨진 김규봉(42) 전 감독과 운동처방사 안주현(46)씨, 장윤정(32)·김도환(25) 전 선수들은 1심에서 적게는 징역 4년형, 많게는 징역 8년형을 선고 받고 항소심을 진행 중이다.

검찰은 이들이 최 선수의 죽음에 직접적 연관이 없다고 판단해 이들에게 ‘업무상과실치상’ 혐의를 적용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의 판정이 나오면서 ‘업무상과실치사’로 혐의를 변경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와 함께 1차적 가해자뿐 아니라 인사노무에 책임이 있는 경주시청이나 대한철인3종협회, 대한체육회 등에 대한 근로 관련법 위반 여부를 따지고 있는 경찰 수사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최 선수 측 변호인인 이영대 변호사(법무법인 수호)는 “근로복지공단의 이번 결정은 ‘피해자 구제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는 법 정신에 부합하는 판단으로, 우리 사회 전반에 주의를 환기시킬 만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 “학교폭력이나 직장 내 괴롭힘 등 사회 문제가 주목을 받고 있는 요즘 스트레스와 그에 따른 극단적 선택을 ‘피해자 개인의 문제’로 생각하는 편협한 인식이 개선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대구=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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