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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위안부 판결 석달만에 뒤집혔다…이용수 할머니 손배소 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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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 배춘희 할머니 등 1차 소송과 정반대 판결

당시 "반인도적 범죄행위는 국가면제의 예외"


법원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2차 손해배상 소송을 각하로 원고 패소 판결을 했다. 지난 1월 8월 1차 배상 소송 당시 원고 승소 판결을 한 지 석 달 만에 법원의 정반대 판단이 나온 것이다.

재판부는 “국제 관습법과 대법원 판례 등에 따르면 이 사건에서 대한민국 법원이 일본국에 대한 재판권을 갖는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국제법상 국가면제' 원칙을 인정한 게 결론이 달라진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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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국내 법원에 제기한 두 번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선고 공판이 끝난 뒤 이용수 할머니가 법원을 떠나며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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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법 민사15부(부장 민성철)는 21일 고(故) 곽예남·김복동 할머니와 이용수 할머니 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가족 20명이 일본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구들의 청구를 모두 각하했다고 밝혔다. 각하는 소송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 본안에 대해 심리를 하지 않고 소송을 끝내는 판결이다.



“日 국가면제 인정…우리 법원은 재판권 없다”



소송의 쟁점은 ‘국가면제’의 인정 여부였다. 국가면제(State immunity)란 주권국가 간 평등의 원칙에 따라 국가의 행위와 재산 등은 다른 나라의 법에 따른 재판관할권으로부터 면제를 받는다는 국제법 원칙을 말한다.

다만 우리나라는 외국을 상대로 우리 법원의 민사소송권 행사 범위를 법률로 정한 바가 없다. 또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 국가면제와 관련한 조약 등을 체결한 적도 없다. 이에 재판부는 “국가면제 인정 여부의 기준은 오로지 국제 관습법”이라고 전제했다.

위안부 할머니 측은 이 사건에서 3가지를 이유로 국가면제가 인정돼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먼저 ① 위안부와 관련한 일본국의 행위는 주권적 행위로 볼 수 없는 강행규범(국제 공동체 유지를 위해 꼭 지켜야 하는 규범) 위반으로 국가면제 대상으로 인정될 수 없고 ② 만약 국가면제가 인정돼 사건이 각하되면 할머니들의 취후 권리구제수단인 재판청구권이 사라져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되며 ③ 일본은 외국에 대한 민사재판권을 법률로 만들어 국가면제 예외를 인정하고 있는 점에 비춰 상호주의 원칙에 위반된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할머니 측 주장에 대해 국제 관습법과 관련한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사례와 우리 대법원 판례를 들며 각하 논리를 설명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끌려간 피해자들의 손해배상권을 두고 다퉜는데, 2012년 ICJ는 독일에 대한 국가면제를 인정한 바 있다. 당시 ICJ는 재판관 15명 중 12대 3의 다수의견으로 이탈리아의 주장을 배척했다.

우리 대법원은 “외국의 주권적 행위에 대해서는 국가면제가 인정되고, (민법·상법 등) 사법적(私法的) 행위에 대해서는 부정된다”는 제한적 면제론을 취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재판부는 “주권적 행위에 관한 국가면제가 인정돼야 한다”며 "외국(外國)인 피고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재판부는 “일본에 대해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대법원 판례는 물론 입법부·행정부가 취해온 태도에도 부합하지 않고, 국제 사회의 일반적인 흐름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며 "국가면제의 예외를 확대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외교정책과 국익’에 잠재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으로 행정부와 입법부의 정책 결정이 선행돼야 할 사항"이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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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 일본상대 1·2차 손해배상 청구소송 주요 일지.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法,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현재도 유효" 인정



재판부는 2015년 박근혜 정부 당시 마련된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평가도 판결에 명시했다. 피해자들은 당시 체결된 합의는 피해자들의 의사를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며 권리구제수단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법원은 우리나라가 가해국인 일본을 상대로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한 것이라고 인정했다. 또 합의에는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 차원의 사죄와 반성이 담겨 있고, 일본 정부가 자금을 출연해 재단을 설립하고 재단을 통해 피해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사업을 하는 내용이 담겼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위안부 합의에 대해 “일본 정부 차원의 권리구제 조치”라며 “생존 피해자분 중 상당수가 화해·치유재단으로부터 현금을 수령했다”고 근거를 설명했다.

물론 당시 위안부 합의가 피해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는 등의 절차상 문제가 있었지만, 이를 재량권의 일탈·남용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이어 “당시로써는 생존 위안부 피해자의 수와 연령을 고려해 기존 입장을 조금 수정하더라도, 이른 시일 내 피해 회복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마련하려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재판부는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 합의가 현재도 유효하고, 재단을 통해 피해구제가 이뤄진 상황에서 국제법이 국내법과 맞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것을 타당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재판부 "외교 포함 대·내외적 노력으로 해결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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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이 21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국내 법원에 제기한 두 번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선고 공판이 끝난 뒤 입장을 밝히고 있다.[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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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는 판결이 끝나기 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법원은 “피해자들은 어린 시절 일본국에 의해 많은 고통을 겪었고, 그동안 대한민국이 대내외적으로 기울인 성과가 피해 회복에 미흡했을 것”이라고 피해자들을 위로했다. 그러면서 “법원은 한·일 합의로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 문제가 모두 해결됐다고 보지 않지만, 현 시점에서 국제 관습법과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일본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게 허용될 수 없다”고 분명히 했다. 이어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은 외교적 교섭을 포함해 대내외적인 노력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피해자들을 대리한 이상희 변호사(법무법인 지향)는 재판 직후 “법원에서 책임을 입법부와 행정부에 돌리며 어떻게 개인의 인권을 보호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오늘 판결로 지난 1월 8일의 판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지난 1월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는 배춘희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12명의 1차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하며 일본의 법적 배상 책임을 폭넓게 인정했다. 이 판결은 일본 항소 등 전혀 대응을 하지 않으며 1심에서 확정됐다. 다만 재판부 교체 후 후임 재판부가 국가면제 원칙을 들어 "소송 비용을 일본 정부에 강제집행할 수 없다"고 결정한 상태다.

같은 법원에서 3개월 만에 본안 소송에서 정반대 판결을 하면서 앞으로 최종 판단은 고등법원 항소심을 거쳐 대법원에서 내려질 가능성이 있다. 이 변호사 측은 항소 여부는 피해자들과 논의 후 밝히겠다고 했다.

지난 2016년 말 시작된 위안부 2차 손해배상 소송은 일본 정부의 송달 거부로 공전을 거듭하다 2019년 3월 법원의 공시송달 명령으로 절차가 진행됐다. 이후 일곱 차례 변론기일을 거쳐 지난 1월 13일 판결 선고 기일을 잡았다가 한 차례 미뤄졌다. 재판부는 이날 변론을 재개한 이유가 “국가면제에 관해 추가 심리가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소송은 지난 3월 변론이 끝났고 이날 원고 각하 판결이 나왔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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