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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日에 소송 못해” 위안부 판결 석달만에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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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국제법상 배상청구 불허” 이용수 할머니 “국제재판소 갈것”

국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책임을 일본 정부에 물을 수 없다는 법원 판결이 21일 나왔다. 지난 1월 다른 위안부 피해자가 제기한 소송에서 ‘일본 국가’의 배상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해 논란이 된 지 3개월 만에 같은 법원의 다른 재판부에서 상반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재판장 민성철)는 21일 고(故) 곽예남·김복동 할머니와 이용수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 20명이 일본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1심에서 “국제법상의 ‘국가 면제’에 따라 일본국의 주권적 행위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건 허용될 수 없다”며 각하(却下) 결정을 내렸다. 각하는 소송이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을 때 내린다. ‘국가 면제'는 한 국가의 ‘주권적 행위’는 다른 국가의 재판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국제법상 원칙을 말한다.

재판부는 “당시 일본의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성관계 강요는 공권력 행사로서 일본의 (위법한) 주권적 행위”라며 “(이 사건에서도) 국가 면제를 인정한다”고 했다. 또 “일본에 대해 국가 면제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대법원 판례는 물론, 국제 사회의 일반적 흐름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지난 1월 고(故) 배춘희 할머니 등 다른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제기한 유사 소송에서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가 “반인륜적 범죄는 국가 면제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며 일본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던 것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당시 판결은 일본이 대응하지 않아 1심에서 확정됐고, 이날 판결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항소할 가능성이 큰 만큼 대법원이 최종 판단을 내리게 될 전망이다. 이날 이용수 할머니는 선고 도중 법정을 빠져나와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가겠다”고 하는 등 판결에 불만을 표시했다.

“한국 법정서 일본 정부 책임 물을 수 없다”

각각 다른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2건에 대해 재판부에 따라 3개월 사이에 정반대 판결을 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5부(재판장 민성철)는 21일 이용수 할머니 등이 제기한 관련 소송에 대해 소송이 성립할 수 없다는 의미의 ‘각하’ 결정을 내렸다. 반면 지난 1월 서울중앙지법 민사 34부(재판장 김정곤)는 고(故) 배춘희 할머니 등이 원고인 소송에서 ‘일본국’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법조인들은 “3개월 사이에 판결이 이렇게 춤을 추는 경우는 처음 본다”고 했다.

조선일보

2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법정을 나온 뒤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날 법원은 이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 20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했다. 이 할머니는“너무나 황당하다”며“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가겠다”고 밝혔다. /오종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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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면제로 일본은 소송 대상 아냐”

두 판결은 ‘국가 면제(주권 면제)’에 대한 판단을 놓고 상충된다. 국가 면제란 국가 간 평등 원칙상 한 국가의 법원이 다른 국가의 주권 행위를 재판할 수 없다는 국제법상의 원칙이다. 이를 적용하면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은 성립하기 어렵다.

그러나 앞선 재판부는 “반(反)인도적 행위에는 국가 면제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논리로 일본의 배상 책임을 전격 인정했다. 위안부 같은 보편적인 인권침해에 대해선 국가 면제의 예외로 봐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국’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국내 판결이었다. 일본의 무대응으로 판결이 1심에서 확정되는 바람에 위안부 할머니 측이 국내의 일본 정부 재산을 확보하는 후속 절차를 밟던 중이었다.

반면 이번 재판부는 ‘국가 면제’는 이번 소송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며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페리니’ 판결을 언급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군수 공장에서 강제 노역을 했던 이탈리아인 루이키 페리니가 독일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2008년 이탈리아 대법원은 독일 정부 책임을 인정했다. 독일이 반발해 ICJ에 제소했고 ICJ는 2012년 12대3으로 “독일에 대해 국가 면제가 인정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번 재판부는 “당시 ICJ 다수 의견의 취지도 손해배상 문제는 개별적인 소송이 아니라 관련 국가 간의 일괄 협정에 따라 해결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현재 국제 관습법은 영토 내에서 이뤄진 주권적 행위에 대해서는 국가 면제를 인정하고 있다”고 했다.

이번 재판부는 또 ‘반인도적 행위는 국가 면제의 예외’라는 주장도 배척했다. 재판부는 “기존의 국제 관습법에서 인정하지 않은 예외를 만드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며 “국제 관습법이 국내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 만큼 법원이 당연히 그 일부의 효력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했다. 주진열 부산대 로스쿨 교수는 “우리 법원이 국가 면제에 예외를 만든다면, 가령 국군이 과거 베트남전에서 현지 주민들에게 피해를 준 데 대해 베트남 법원이 손해배상 판결을 내리면 수용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대법원이 최종 판단하게 될 듯

두 판결이 충돌하는 상황은 결국 대법원에서 정리될 전망이다. 이날 판결에 대해 이용수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들은 항소할 것으로 보인다. 법조인들은 “과거 대법원이 강제 징용에 대해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지만, 일본국이 상대인 이번 소송은 성격이 다르다” “대법원도 ‘위안부 피해에 대해 일본을 국가 면제의 예외로 둬야 한다’고 판단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이날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ICJ에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한 국제법 전문가는 “ICJ는 개인이 아닌 국가가 제소할 수 있는데 우리 정부가 이 할머니 등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렇게 할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이창위 서울시립대 로스쿨 교수는 “설령 정부가 ICJ에 제소하더라도 패소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외교부는 이날 “정부는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일본은 그동안 표명했던 책임 통감과 사죄에 부합하는 행보를 보이라”는 입장을 냈다.

일본 정부는 “국가 면제에 대한 일본 정부 입장을 포함한 것이라면 적절한 판결”이라고 했다. 외무성의 한 간부는 “지극히 보통의, 타당한 판결”이라면서도 양국 개선 관계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NHK는 보도했다.

☞국가 면제(國家免除)

한 국가의 법원이 다른 국가의 공권력 행사 등 주권적 행위에 대해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국제법 원칙. 주권 면제라고도 한다. 국가 간 평등 원칙상 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재판을 받는 것은 부당하므로 외교 등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라는 취지다.

[조백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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