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9 (금)

이슈 지역정치와 지방자치

'여의도 정치' 염증 커지자…대선판, 도지사 '태풍의 눈' 됐다 [스페셜 리포트]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 SPECIAL REPORT : 도백(道伯) 전성시대 ◆

매일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뛰어든 사람들이야 경쟁에 피가 마르지만, 관전하는 사람에겐 흥미 만점인 게 대선판이다. 치열한 경선(예선)을 거쳐 뽑힌 후보가 대선(본선)에 나서 일전을 치르는 모양새가 마치 토너먼트 경기를 보는 듯하기 때문이다. 막판 후보 단일화를 통한 '선수 교체'까지 있다면 박진감은 더 커진다. 나라의 최고 정치지도자를 뽑는다는 명분까지 더해지니 눈과 귀가 쏠리는 이벤트일 수밖에 없다. 지금 펼쳐지기 시작한 이 대선판을 규정하는 표현들이 정치권에선 무수히 쏟아진다. 경선은 물론이고 대선 본선 결과를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는 사람들은 '안갯속'이라고 하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보는 이들은 '변화무쌍'이라고 한다. 뜻밖의 인물이 대선주자로 각광받는 것에 주목한 이들은 '전대미문'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전대미문'으로 볼만한 현상이 잇따르고 있긴 하다. 평생 검사이고 비정치인인 전직 검찰총장이 대선주자 지지율 1위를 기록한 점, 국회의원도 아닌 30대 청년이 제1야당 대표에 올라 야권 대선판을 이끄는 상황, 당내 1위를 달리는 인물에 대해 그 정당 주류들이 탐탁지 않게 여기는 현실 등 과거엔 볼 수 없었던 일들이 속속 벌어지고 있다. 여기에 또 다른 전대미문을 하나 더하면 바로 '도백(道伯) 전성시대'다. 도백이 무엇인가. 옛 관찰사의 다른 이름이고 지금으로 치면 광역자치단체장, 즉 시도지사다. 요즘 내년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손을 드는 도백들이 줄을 잇고 있다.

◆ 전·현직 도지사 출신 대선 잠룡만 9명


먼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다. 대선주자 지지율 1, 2위를 다투는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있다. 현직 '도백'이다. 게다가 최문순 강원도지사, 양승조 충남도지사 역시 현직으로 대선에 도전하고 있다. 전직 지사로는 경남도지사를 거친 김두관 의원, 강원도지사였던 이광재 의원이 있다. 그러고 보니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도 전남도지사를 지냈다.

제1야당인 국민의힘에서도 보인다. 일찌감치 출마 의사를 밝힌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있다. 본인은 누누이 시장 재선 의지를 밝혔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대선에 등판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가시지 않는 오세훈 서울시장도 있다. 이 두 명은 현직이다. 경남도지사를 지낸 홍준표 무소속 의원도 대선 잠룡이다. 이렇게 이름을 나열하고 보니 도백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이는 대선주자가 여야에서 최소 9명이나 된다.

물론 과거 대선 때도 지방자치단체장이 현직에 있으면서 혹은 현직을 떠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대선에 나선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인제 전 경기지사, 김문수 전 경기지사, 김두관 전 경남지사 등이 대선에 도전한 바 있다. 2017년 대선 당시에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 등이 출마했다. 특히 당시 기초단체장이던 이재명 지사(당시 성남시장), 최성 전 고양시장이 대선 경선에 나서 인상적인 활약을 했다.

그러나 이번 대선처럼 전·현직 단체장들이 여야에서 대거 출마하는 건 전례가 없다. 또 우연일 수 있지만 여야 지도부에도 '도백' 출신들이 보인다. 인천시장을 지낸 송영길 민주당 대표, 울산시장을 지낸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다. 이쯤 되면 '도백 전성시대'라는 표현이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 코로나·SNS가 바꿔놓은 도백 위상


"아무리 일을 많이 해도 도통 관심이 없다. 1단 기사도 안 나온다."

기자가 과거 시도지사들을 만났을 때 흔히 들었던 푸념이었다. 서울시장을 제외한 다른 시도지사의 활동은 중앙 언론에서 거의 다루지 않는다는 불만이기도 하다. 중앙정치 무대에서 활동하다가 시도지사가 된 경우에도 주목도가 떨어지면서 잊힌 존재가 된다.

그러나 작년 한 해를 거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바로 코로나19 방역 및 대응 과정에서 자치단체장들의 역할이 돋보였고 주목을 받았다. 보편적 재난지원금 지급 이슈를 이끈 이재명 지사, 제주도에 대한 단호한 방역에 나섰던 원희룡 지사 등이다. 코로나19가 불러온 불황을 극복하고자 감자 판매 홍보에 나서 눈길을 잡았던 최문순 지사 등도 존재감을 뽐냈다. 방역과 지역경제 살리기 등에서 시도민이 체감할 수 있는 현장 모습을 보여준 것.

중앙정치에서 벗어나 있다는 약점도 페이스북과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인터뷰 방송의 발달로 많이 극복됐다. 과거 같으면 각 정당 지도부 회의에 참석하거나 국회 회견 정도에 나서야 중앙정치 무대를 향해 목소리를 낼 수 있었지만, 이제는 개인 SNS를 통해 이슈를 제기하고 주장할 수 있다. 인터뷰 방송을 통해서는 국민에게 자신의 생각을 직접 호소하기도 한다. 여의도 정치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란 위치가 더 이상 한계가 되지 않는 시대가 된 거다. 시도지사들은 오히려 중앙정치에서 잔뼈가 굵은 중진 국회의원들의 위상을 훌쩍 넘어서는 모습이다.

◆ 국정 축소판 '지방정부' 수장 경험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시도지사의 존재감이 커졌지만 그 배경에는 주민의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지방정부 수장'이라는 위상이 자리 잡고 있다.

서울시 홈페이지에는 시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소개하고 있다. 주택·경제·교통·환경·복지·안전·문화·행정 등이다. 경기도 역시 홈페이지를 통해 도의 역할을 소개하는데 '철도·공항 등 함께 추진하는 일' '교통을 편리하게 하는 일'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일' '하천을 보수하는 일' '문화재 관리하기' '일자리 제공과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일' 등이다. 국방·외교를 뺀 거의 모든 국정 분야가 다 있다. 다른 시도의 경우도 비슷하게 소개하고 있다.

각 시도는 많은 공기업과 공단을 거느리고 있고,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연구기관도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시도지사들은 국회의원이나 중앙부처 장관에 비해 훨씬 다채로운 행정을 경험할 수 있다. 이른바 종합행정이다.

또 민생과 관련된 정책과 예산을 직접 집행한다는 점에서 작은 규모의 국정을 운영하는 셈인데, 대선과 관련해 이런 경험을 강조하기도 한다. 최근 최문순 지사는 강원도에서 실시하고 있는 '취직 사회책임제'(기업이 직원 한 명을 고용하면 도에서 월급 일부를 지급)를 전국으로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경기도립병원 수술실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한 이재명 지사는 최근 전국 국공립병원 수실실에도 CCTV를 설치하는 내용의 의료법 개정안을 정부에 건의했다. 지역에서 추진한 정책을 전국 단위로 확대하려는 것으로, 중앙에서 활동하는 국회의원과 장관 등이 가질 수 없는 장점이다.

이 '지방정부'가 규모 면에서도 커졌다. 거대 자치단체인 서울시의 올해 예산은 40조원이 넘고, 경기도는 28조원을 넘어섰다. 쓸 수 있는 돈이 늘었다는 건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의미다. 경기도가 지난해 재난지원금 지급을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 여의도 정치서 한 걸음 떨어진 게 되레 장점


'도백 전성시대'의 또 다른 배경은 여의도로 상징되는 정당정치·중앙정치에 대한 불신이다. 정치를 바라보는 유권자의 눈이 갈수록 매서워지고 있다. 비정치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야권 대선주자 지지율에서 단연 앞서고 있고, 여당 내에서도 비주류 소장파인 박용진 의원이 대선주자로 주목받는 배경엔 기성 주류 정치에 대한 짙은 불신이 자리하고 있다.

국회의원을 지낸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는 "정당이 국민의 생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면서 역할이 약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툭하면 정쟁을 벌이며 '소음'을 만드는 국회의원들과 달리 시도지사들은 민생과 직결된 결과를 만들어내는 행정가로 인식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우리의 도지사 격인 주지사 출신 대통령이 다수 배출됐다. 1대 조지 워싱턴부터 46대 조 바이든까지 총 45명(그로버 클리블랜드는 22·24대 대통령)의 대통령이 탄생했는데, 그 가운데 주지사 경력을 가진 경우는 20명이다. 특히 1977년 취임한 지미 카터(조지아) 이후 주지사 출신은 두드러진다. 로널드 레이건(캘리포니아), 빌 클린턴(아칸소)을 거쳐 2009년 초 퇴임한 조지 W 부시(텍사스)까지 주지사 출신이다. 최근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는 기업인 출신이고, 현직인 조 바이든은 상원의원 출신이지만 대선 때마다 당내 경선에는 주지사 출신의 도전이 많다.

이 교수는 "미국에선 우리의 여의도 정치 격인 워싱턴 정치에 대한 염증이 커지면서 이곳에서 한 걸음 떨어진 주지사들이 오히려 장점을 가진 것으로 평가됐다"면서 "상원의원, 부통령과 함께 주지사가 대통령을 배출하는 주요 코스로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정쟁이 연상되는 정치인보다는 민생에 직접 연결되는 일을 하는 행정가를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다.

김두관 전 지사(현 민주당 의원) 말을 빌리면 도지사의 역할은 정치 50, 행정 50이다. 중앙정치와 거리를 둔 행정가의 모습이 더욱 돋보이는 시대가 됐다. 그리고 정치가의 모습도 갖고 있기에 대선에 도전할 수 있다.

◆ 청와대행 성공하려면 '이것' 필요


그런데 시도시자들의 대선 도전에서 두 가지 모습이 눈길을 잡는다. 첫째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시도지사 출신 대통령은 딱 한 명뿐이었다는 점이다. 서울시장을 지낸 이명박 전 대통령인데, 유일한 성공 사례다.

성공 사례가 적은 건 무엇보다 아직 지방자치의 역사가 짧기 때문이다. 지방자치의 역사가 수백 년에 이르는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1995년부터 지방자치단체장을 직선제로 뽑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26년이 흘렀을 뿐이다. 아직 한 세대인 30년의 시간도 흐르지 않았다. 도백의 대선 도전이 하나의 흐름이 됐지만 잇단 성공으로 연결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게다가 아직은 수도권 시도지사를 빼고는 인지도 자체가 낮다. 최근 기자와 만난 원희룡 제주지사는 과거 큰 주목을 받은 3선 국회의원 시절과 도지사 재임 기간을 비교하면서 "존재감이 희석되는 기간"이라고 말했다.

유일한 성공 사례인 이명박 전 대통령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자기 브랜드다. 그는 청계천 복원과 버스 전용차로·환승 시스템이란 뚜렷한 족적을 남겼고 브랜드가 됐다. 그리고 이것이 추진력 있는 리더, 최고경영자(CEO) 출신 경제대통령이란 이미지와 연결돼 2007년 대선에서 성공했다. 마침 부에 대한 열망이 컸던 당시의 시대 상황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결국 시대적 요구에 맞아떨어지는 뚜렷한 브랜드를 가진 '도백'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게 이명박 사례가 주는 시사점이다.

눈길을 잡는 또 다른 모습은 경기도지사 출신들이 한때 유력 대선주자 반열에 올랐지만 모두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인제, 손학규, 김문수, 남경필 전 경기지사 등이다. 잇단 대선 불발에 급기야 경기지사 '징크스'라는 말까지 생겼다.

서울시장에 비해 주목도가 낮기 때문이라는 게 그동안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대선주자 지지율 1~2위를 다투는 이재명 경기지사의 등장으로 이런 설명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는 어떤 단체장, 현역 국회의원보다 주목도가 높다. 이 지사의 대선 성공 여부에 따라 이 징크스가 깨질지 계속 유효할지 판가름 날 것이다.

한편 현역 도지사들의 대선 출마를 놓고 도정 공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대선 행보에 주력하다 보니 지방정부의 일을 등한시한다는 거다.

또 대권 행보를 위해 지방정부 조직을 활용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현직 '도백' 대선주자들이 해명을 내놔야 할 대목이다.

매일경제

[이상훈 정치전문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