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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북한의 코로나 식량위기 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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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미래

한겨레

북한 식량위기에 따른 심각한 인명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인도적 지원을 위한 돌파구가 필요하다. 사진은 1996년 북한 수재민을 돕기 위해 대한적십자사가 국제적십자연맹을 통해 전달한 밀가루를 북한적십자회가 북한 주민들에게 나눠주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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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
한겨레



그날따라 압록강을 가로질러 중국과 북한을 잇는 ‘우호의 다리’에는 아무 차량도 다니지 않았다. 1999년 7월27일 아침 9시였다. 평소 같으면 중국에서 구호물자를 싣고 북한으로 들어가는 트럭들이 줄지어 들어갈 시간이다. 북한의 공휴일, ‘조국해방전쟁 승리의 날’ 행사 때문에 바쁘다고 했다. 답답해서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대기근으로 이미 100만명 이상이 희생되고 수백만명의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허덕이던 때였다. 남북 간에는 구호식량조차 직접 전달하기 어려워서 남한 민간단체가 모금한 돈으로 우선 긴급한 곳에 밀가루 몇 트럭이라도 보내려고 온 길이었다.

접경지역에서 만난 탈북민들은 외국 구호식량이 북한에 도착하면(혹은,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만으로도) 장마당 곡물 가격이 내려가더라고 증언했다. 불확실한 앞날 때문에 남몰래 비축해두었던 식량이 풀려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공식 비공식 가릴 때가 아니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구호식량을 전달하면 당장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거대한 재난현장에 남한 민간단체가 보낸 몇 트럭의 식량은 너무도 미미했다. 기근 구호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캠페인을 진행해왔던 두 손이 초라했다.

2021년 6월14일,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올해 북한 식량 부족분을 약 86만톤으로 전망하고 곧 다가올 식량위기에 대한 조기경보를 울렸다. 부족한 식량은 2500만 북한 전인구의 약 2개월(또는 약 320만명)분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다. 북한 당국 보고에 더하여 인공위성으로도 내려다보고 추정한 생산량이니 왜곡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히려 필요열량 기준을 최소화하고, 감자 등 대체식량 생산은 최대로 잡은 것이라 실제 식량 상황은 더욱 각박할 것이다. 당장 8월부터 심각한 인명피해가 우려된다.

부족한 식량은 긴급하게 수입하거나 지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코로나 방역을 위한 국경 봉쇄로 그것조차 어렵게 되었다는 것. 압록강 두만강을 넘나드는 공식적인 교역 루트가 차단된 지 1년 반, 다급한 물자를 조달하면서 장마당 경제를 뒷받침했던 밀거래 길까지 막힌 지도 10개월이 지났다. 장비와 자원이 제한된 상황에서 코로나 위기에 대처하려면 봉쇄와 차단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사회주의 규율국가는 효율적으로 온 국민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넓고, 깊고, 조용한’ 사회주의 기근이 진행되기 쉽다.

25년 전에도 그랬다. 국경 봉쇄와 정보 차단 속에서 식량위기가 장기화되었고, 외부세계가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고 병들어가는 상황이었다. 참상이 알려져도 당시 남한 정부는 체제붕괴를 기다리며 민간단체의 식량지원조차 금지했다. 그런 기대는 명백한 몽상이었다. 배고픈 사람은 혁명을 못 한다. 오히려 권력이 주는 작은 보상에 매달렸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들은 죽어가고 식량을 구하러 국경을 넘은 어머니들은 팔려갔다. 또다시 그런 민족적 재앙을 겪을 때까지 손 놓고 있을 것인가?

즉각 부족한 식량을 지원해야 한다. 재난 발생 후의 구호보다 파국이 닥치기 전에 미리 공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도적 지원은 무조건적인 것이다. 주고받는 것을 계산하는 정치협상이나 사업상담이 아니다. 전투 중에도 적군 부상병을 돌봐주는 적십자 운동의 초심을 살려서 적십자사가 앞장서주면 좋겠다.

식량구호는 시기와 물량이 중요하다. 과거처럼 뒤늦게 조금 주면 상대방은 생색만 낸다고 자존심 상하고, 내부에서는 쓸데없이 ‘퍼주기’ 한다고 비난받기 쉽다. 그래서 북한 스스로 부족한 식량을 수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경제제재를 일부 완화해서 북한의 지하자원과 식량, 비료, 의약품을 맞바꾸는 교역 정도는 가능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북한의 코로나 대응을 지원해서 봉쇄를 풀고 통제를 완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식량부족이 대기근으로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지구적 생태위기 시대에 한반도 안에서 나란히 이웃하며 살아야 하는 두 나라가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일은 코로나 문제 이외에도 무수하게 많다. 이미 휴전선을 넘고 있는 아프리카돼지열병, 말라리아 등 다양한 전염병에 대한 공동 대응도 시급하고, 앞으로 무수하게 닥칠 변종 바이러스에 합리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인도적 지원은 상대방의 인도적 대응을 불러오는 선순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남북 간에는 이산가족 문제를 비롯한 수많은 인도적 해결 과제가 산적해 있다. 코로나 재난과 식량위기를 핵문제에 갇힌 남북문제를 푸는 반전의 기회로 삼기 바란다.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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