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9 (금)

세입자 ‘갱신 거절’ 손배소, 승소해도 실익 크지 않다 [‘새 임대차법’ 1년 명암]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하) 미흡한 권리 보호

[경향신문]

경향신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집주인 ‘실거주 사유’ 내보낸 뒤
다른 세입자 들이면 소송 가능
시간·비용 대비 배상액은 적어

#1. 경기도 아파트에 전세를 사는 A씨는 지난해 7월 중순 집주인으로부터 “집을 팔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계약갱신청구권’이 도입된 새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시행(7월31일)되기 직전이었다. A씨는 전세 계약만료 3개월을 앞둔 같은 해 11월 계약갱신청구권을 행사했는데, 집을 팔겠다던 집주인이 갑자기 “실거주하겠다”며 갱신을 거절했다. A씨가 항의하자 집주인은 계약만료와 동시에 집을 비워달라는 내용의 소송을 제기했다.

석 달에 걸친 소송 끝에 A씨는 올해 3월 승소했고 임대차 계약은 갱신됐다. 법원은 “해당 집주인의 경우 계약갱신 거절이 가능한 실거주 사유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세입자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집주인이 몇 달 동안 집을 팔려고 한 점, A씨가 계약갱신청구권을 행사한 이후에야 실거주 의사를 밝힌 점 등을 이유로 들었다.

#2. 서울 금천구 전셋집에 사는 B씨는 2014년부터 2년 단위로 2억원, 2억2500만원, 2억6000만원 등 매번 10% 넘게 오른 보증금에 계약을 연장해왔다. 지난해 11월이 계약만기였던 그는 두 달 앞선 9월 집주인에게 계약갱신을 요구했다. 집주인은 답변을 미루다 계약만료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10월 말이 돼서야 실거주 사유로 갱신을 거절했다. B씨가 계약만료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자 집주인은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집주인이 갱신을 거절할 수 있는 법정 기한을 넘겼다”며 B씨 손을 들어줬다.

지난해 7월 새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시행된 이후 ‘실거주’를 사유로 계약갱신 청구를 거절한 사례와 관련된 소송이 늘고 있다. 집주인이 자신이 살겠다며 갱신을 거절한 뒤 새 세입자를 들이는 경우 임대차법에서는 쫓겨난 세입자가 집주인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판례별로 다소 편차는 있지만 새 임대차법에서 규정한 계약갱신 가능 사례에 해당하면 세입자들이 승소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세입자 입장에서 시간과 비용을 들여 민사소송에 나서는 게 쉽지 않을뿐더러, 승소한다 해도 얻을 수 있는 실익이 크지 않아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집주인·세입자 갱신 거절 분쟁 줄이려면 손해배상액 높여야”

■세입자 권리 ‘강화’했다지만

유사한 상황에서 정반대의 판결이 나오기도 한다. 임대차 계약의 체결 시점, 주택의 매매 시점 등이 새 임대차법 시행 전·후인지 등에 따라 판결이 다르게 나오는 경우다. 서울중앙지법은 올 5월 “새 임대차법이 시행되기 전 실거주 목적으로 아파트를 구매했다면, 소유권 이전등기 전이라 해도 새 집주인이 기존 세입자의 계약갱신을 거절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반면 춘천지법 원주지원은 올 4월 비슷한 상황에서 “집주인은 세입자의 계약갱신을 거절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새 임대차법이 시행되면서 그나마 세입자가 법정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승소를 통해 주거안정을 일부 이룰 수 있게 됐다는 것이 법조계의 중론이다.

예로 서울 성동구에서 보증금 8억원짜리 아파트에 살던 C씨의 경우 새 임대차법 시행 직전 계약이 만료돼 개정된 법의 혜택을 보지 못한 사례다. C씨는 계약만료가 보름 남은 지난해 6월 초 집주인으로부터 “보증금을 12억원으로 올릴 텐데 계약할 의사가 있냐”는 연락을 받았다. 기존 보증금에서 무려 4억원(50%)을 올린 요구였지만 C씨는 속수무책이었다. 다툼 끝에 양측은 소송전에 돌입했지만, C씨는 결국 패해 8개월치 임대료를 지급하고 소송비용까지 부담했다.

이강훈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실행위원(변호사)은 “기존 세입자의 계약갱신청구권과 새 집주인의 실거주권 중 우선순위를 개별적으로 따져야 하는 경우 일부 판결이 다르기도 하지만 사례가 많진 않다”며 “실거주 사유 관련 규정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야 다툼을 줄일 수 있다”고 밝혔다.

■손해배상 쉽지 않고 실익도 적어

해당 주택 임대차 확인 등
소송 준비·과정 자체가 비용
적은 배상액 받으려고
법원 찾는 세입자 많지 않아

임대차 열람제도 빈틈 이용
집주인이 소송 제기 더 많아

최근 법률상담 게시판이나 부동산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A씨 사례처럼 ‘실거주’ 조항을 두고 집주인과 세입자 사이 벌어지는 분쟁이 자주 등장한다. 이 중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집주인이 세입자를 내쫓기 위해 고의적으로 실거주 사유를 악용하는 경우다. 엄정숙 부동산 전문변호사(법도 종합법률사무소)는 “최근 실거주 때문에 발생하는 분쟁이 잦아졌다”면서 “세입자가 임대료 5% 상한 내 계약갱신을 요구하자, 집주인이 실거주하겠다며 거절하더니 막상 다른 세입자를 구하려는 정황이 드러나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이때 집주인이 새로 세입자를 들인 사실이 확인되면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하다. 그럼에도 실제 소송에 나서는 세입자는 드물다고 부동산업계는 전한다. 소송에 드는 시간과 비용, 노력 등에 비해 실익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예로 보증금 6억5000만원짜리 전세를 살던 세입자를 집주인이 ‘실거주’를 이유로 쫓아낸 뒤 보증금을 8억원으로 높여 새로운 세입자를 들인 경우를 가정해 경향신문이 직접 로펌에 상담해봤다. 그 결과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세입자가 손해배상액으로 받을 수 있는 금액은 최대 750만원 수준이었다. 새 임대차법이 정한 내용에 따라 계산해보면 ‘갱신 거절 당시 환산월차임 3개월분’(406만원), ‘집주인이 새 세입자로부터 얻은 환산월차임과 거절 당시 환산월차임 차액 2년분’(750만원), ‘갱신 거절로 인해 세입자가 입은 손해액’(500만~600만원) 중 가장 높은 금액을 추산한 값을 받게 되는데 최대 금액이 750만원인 것이다. 주로 중개수수료와 이사비 등을 포함하는 세 번째 항목에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갈 경우 손해배상액은 조금 더 늘어날 수 있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길게는 6개월가량 진행되는 소송에서 손해배상액으로 750만원을 받더라도 이사비와 다른 집을 구하는 데 들어간 중개수수료, 변호사 선임비(약 100만원) 등을 제하면 실제 남는 게 없다. 서울 개포동의 한 공인중개사는 “실거주한다고 세입자를 내보내고 집을 비워두는 집주인도 있지만, 세입자가 눈치챈다 해도 손해배상 소송을 적극적으로 검토하진 않는다”며 “배상액은 적은 반면 퇴거 이후 해당 주택 임대차 정보를 확인하는 일부터 변호사 선임 등 모든 과정이 그 자체로 비용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세입자 입장에선 번거롭게 소송까지 하며 권리를 요구할 유인이 적고, 오히려 임대인이 갱신 거절 사유에 대한 정당성을 입증하도록 버티는 선택지의 기회비용이 적다”면서 “손해배상 소송이 임대인의 실거주 사유 악용을 억제하고, 불필요한 분쟁을 줄이는 기능을 하도록 하려면 손해배상액이 지금보다 높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계약갱신을 거절당한 세입자의 경우 이사를 나온 뒤 해당 주택의 임대차 계약 여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새로운 세입자를 들인 사실이 확인돼야 소송 제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열람제도도 허점이 있다. 열람을 통해 확인이 가능한 건 임대차 계약이 존재하는지 여부일 뿐 해당 임차인이 제3자인지, 집주인의 직계 존·비속인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거주 사유에선 집주인뿐만 아니라 그의 직계 존·비속의 실거주일 경우에도 계약갱신을 거절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예컨대 제3자 계약임에도 집주인이 “장인어른이 거주하시는데 사정상 계약서를 쓴 것일 뿐”이라고 부인하면 당장 확인할 길이 없는 셈이다.

이렇다보니 집주인을 상대로 한 세입자들의 소송 제기보다는 집주인이 세입자를 상대로 소송하는 사례가 더 많은 게 현실이다. 지난 한 해 동안 새 임대차법과 관련해 나온 판결문을 살펴보면 대다수가 세입자가 제기한 ‘손해배상’ 등의 소송이 아닌, 세입자를 퇴거조치하기 위한 목적의 ‘건물인도’ 소송이었다.

김희진 기자 hjin@kyunghyang.com

▶ [뉴스레터] 식생활 정보, 끼니로그에서 받아보세요!
▶ 경향신문 프리미엄 유료 콘텐츠가 한 달간 무료~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