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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육지 해녀의 바다 사용료[김창일의 갯마을 탐구]〈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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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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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일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삶의 양상을 기록하는 일은 대중에게 역사의 발언권을 주는 일이다. 현장 기록은 사실을 엮어 만든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삶의 현장 깊숙이 들어가서 오랜 시간 참여하고 관찰하려 한다. 삼척과 울산 어촌에서 주민들과 사계절을 함께 생활하며 해양문화를 조사한 적이 있다. 두 마을의 가장 중요한 생업이 돌미역 생산이라는 점과 해녀가 돌미역 채취를 도맡는다는 점이 같았다. 해녀 계통은 다르다. 삼척 갈남마을 해녀는 제주도에서 이주했다. 울산 제전마을에는 바깥물질 온 제주 해녀를 보고 배운 자생 해녀 집단이 있다.

제주 소재 언론사 초청으로 동해안 해녀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다. 질의응답 시간에 당황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객석에 앉아 있던 제주 주민이 발표 내용에 감정이 이입돼 격앙된 목소리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해녀가 어촌계에 입어료를 지불하는 육지 어촌의 관행은 부당하다. 이는 육지로 이주한 제주 해녀의 노동력을 갈취하는 행위’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시간이 촉박해 차분히 설명할 수 없어서 아쉬웠다. 이미 100년 전부터 이런 갈등은 동해안 어촌 곳곳에서 발생했다.

일제강점기에 제주 해녀들은 육지 해안으로 바깥물질을 다녔다. 이 과정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1921년 3월 19일 동아일보 ‘해녀문제해결호’에서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제주도에서는 해녀가 있어서 해마다 경상남도 울산, 장승포에 나와서 옷을 벗고 바닷속으로 들어가 해조와 전복 등을 따는 사람이 4000명 이상이라. … 그들이 버는 금액이 수백만 원에 달하는데 울산 장승포 등지에 있는 지방 인민은 남의 지방에 와서 이와 같이 무수한 수산품을 가져가서는 안 되겠다 하여, 해녀와 그 지방 인민 사이에 서로 분쟁이 있음으로 당국이 조정하여 해녀는 그 지방 인민에게 입어료라는 것을 바치고 이것만은 무사히 해결되었으나….” 수많은 제주 해녀들이 몰려와 해산물을 채취하자 지역민 불만이 증폭됐고, 이에 해산물 채취 대가를 지불했다는 내용이다.

광복 후에도 갈등이 잦아들지 않자 1952년 수산업법에 ‘입어관행보호법’이 제정됐으나 충돌은 이어졌다. 입어료, 위판 수수료 등 명목으로 채취한 해산물에 일정한 요금을 매겼다. 해녀들은 이를 과도한 수탈로 봤고, 해당 어촌 주민은 자신들의 바다에서 채취한 것이기에 당연한 권리라 여겼다. 1962년 수산업협동조합법이 제정돼 어촌계로 연안어장 관리 권한이 위임됐다. 이로써 어촌계가 합법적으로 지선어장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했다.

현재 대부분 어촌계는 어민 의견을 민주적으로 수렴해 운영하고 있다. 동해안에서 해녀는 이제 약자가 아니라 어촌계 의사결정에 중심 역할을 한다. 삼척 갈남마을과 울산 제전마을은 해녀가 어촌계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하다시피 하고 있다. 제주에서 해녀 3600여 명이 활동하는데 육지 해안도 엇비슷한 수의 해녀가 물질하고 있다. 뭍 해안에서 제주 해녀는 튼튼히 뿌리내렸다. 개별 어촌 상황과 시대 변화에 맞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더 이상 피해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을 늦게나마 지난번 청중에게 전하고 싶다.

김창일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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