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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미 대사관, 아프간서 치욕적 대피…바이든표 '사이공 탈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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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N "카불 대사관서 전원 대피"…최소인력 유지 방침서 후퇴

미군 5천명 투입하고 기밀문서 폐기…아프간 체류 미국인도 대피 명령

바이든 '안전하고 질서있는 감축' 공언 무색…안이한 판단 책임론 거세

연합뉴스

아프간 미 대사관 상공에 뜬 미 치누크 헬기
[AP=연합뉴스]


(워싱턴=연합뉴스) 류지복 특파원 = 미국이 15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내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의 수도 카불 장악으로 아프간의 미국 시민권자 대피에 비상이 걸렸다.

탈레반의 예상보다 빠른 진격에 놀란 미국은 카불 함락을 우려해 미군 철수가 진행 중이던 상황에서 다른 부대를 투입하는 이례적 결정까지 내리며 시민권자의 아프간 출국, 대사관 직원의 대폭 감축을 추진했다.

그러나 대피가 완료되지도 못한 시점인 이날 아프간 정부가 항복을 선언하고 카불까지 탈레반의 수중에 넘어가는 일이 발생했다. 1975년 베트남전 때 치욕적 탈출작전에 빗대 '바이든표 사이공'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CNN방송에 따르면 미국은 카불 대사관의 모든 요원을 오는 17일까지 대피시킬 계획이다. 당초 대사를 비롯한 최고위급 인사와 경호요원 등 최소한의 인력만큼은 남겨두기로 했지만, 상황이 악화하자 전원 철수를 결정한 것이다.

미국이 탈레반과 20년간 전쟁을 치른 탓에 이곳에는 전 세계 대사관 중 최대 수준인 4천200명의 직원이 근무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대사관 직원들은 일단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으로 이동한 뒤 대부분 미국 귀국길에 오르고, 최고위급 인사 등 소수는 공항에 남는다.

앞서 외신은 미국이 카불의 대사관이 위험에 처할 경우 공항 격납고에 임시 대사관을 설치한 뒤 관련 업무를 볼 수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탈레반이 급속도로 아프간 영토를 장악하자 지난 12일 대사관 인력 감축 방침을 밝힌 후 비상계획에 들어갔다. 대사관과 공항 경비를 위해 이미 배치된 1천명의 미군 외에 3천명을 더한다고 했다가 14일에는 1천명을 추가해 모두 5천명을 투입한다고 발표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지원군 성격으로 쿠웨이트에 수천명의 미군을 대기시키고, 1천명의 육군과 공군 요원으로 구성된 태스크포스는 공수 지원과 함께 미군을 도운 아프간 현지인의 비자 과정 등을 돕기 위해 카타르로 간다고 밝힌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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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사관 대피 등을 돕기 위해 아프간 투입되는 미군
[AP=연합뉴스]


현지 대사관은 기밀자료를 소각로와 분쇄기 등을 이용해 폐기하고, 탈레반의 선전 도구로 사용될 우려가 있는 대사관 로고, 미국 국기인 성조기 등도 처분하라고 지시했다.

대사관은 또 지난 12일 아프간 내 자국민에게 즉시 아프간을 떠나라고 촉구한 데 이어 15일에도 보안 악화를 이유로 대피 명령을 재차 내렸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전날 성명에서 언급한 '질서 있고 안전한 감축'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는 상황인 셈이다. 미 요원을 위험에 빠뜨릴 경우 군사 대응에 직면할 것이라는 전날 바이든 대통령의 언급이 경고가 아닌 요청처럼 들릴 정도다.

CNN은 잘메이 할릴자드 미국의 아프간 특사가 미국 시민이 대피를 완료할 때까지 탈레반이 카불에 진입하지 말도록 요구했다고 소식통을 인용해 전했다.

아프간에서 미 대사관의 치욕적 대피는 1975년 남베트남 패망 직전 4월 29일부터 이틀간 펼친 탈출 작전인 '프리퀀트 윈드 작전'(Operation Frequent Wind)을 연상시킨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시 북베트남군의 포격이 미군이 주둔한 사이공 떤셔넛공군기지까지 닿자 비행기 탈출을 중단하고 헬기를 왕복 운항해 북베트남에 남은 미국인 등 민간인을 남중국해에 있던 함정들에 실어날랐다.

이 작전으로 미국인 1천300여명, 베트남인과 제3국적자 5천500여명이 사이공이 북베트남 수중에 떨어지기 직전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다.

실제로 CNN방송에는 미국 헬리콥터가 직원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카불의 대사관 건물을 긴박하게 왕복하는 모습이 수차례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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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 29일 베트남 사이공(현재 호찌민) 미국대사관 인근 호텔에서 사이공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헬기를 타고자 줄을 서서 사다리를 오르는 모습. [미 국무부 홈페이지 갈무리=연합뉴스]


지난 4월 아프간 철군을 결정한 바이든 대통령이 이런 상황을 방지하지 못했다는 비판론이 벌써 나온다. 미군의 철수 시작 이후 탈레반의 진격 속도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고, 이에 따라 대피책도 온전히 마련하지 못했다는 뼈아픈 지적이다.

스티브 스칼리스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는 "불운하게도 이 상황은 매우 예측 가능했다"고 바이든 책임론을 거론했고, 같은 당 마이클 매컬 하원의원은 "바이든 대통령의 오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CNN은 미 정부 당국자들이 아프간 정부의 붕괴 시점을 잘못 계산했다는 것을 이제는 솔직히 인정한다며 "바이든 행정부가 외교요원의 아프간 대피에서 질서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CNN에 출연해 바이든 대통령의 철군 결정을 옹호하면서도 아프간 정권의 붕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빨리 일어났다고 시인했다.

jbry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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