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존중' 외쳤지만 길거리 여성 총살
탈레반 집권 정당성 인정받을 수 있나
美 "시기상조" 中 "파벌 존중" 온도차
한국은 "인권 존중 국가와는 항상 협력"
지난 18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순찰을 돌고 있는 탈레반 대원들. M4소총 등으로 무장한 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공포가 현실화했다. 지난 15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아프간) 대통령궁에 입성하며 사실상 정권을 장악한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 얘기다.
이들은 정권 장악 후 지난 나흘간 수차례에 걸쳐 ‘여성 인권’을 보호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대다수의 아프간 여성들은 반강제적으로 집 안에만 갇혀 있고, 부르카(눈 부위를 제외하고 전신을 가리는 의상)를 착용하지 않은 여성이 총탄에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외신 보도도 이어지고 있다.
탈레반은 아프간 내에서 ‘대안 없는 정치세력’으로 평가받는 게 현실이지만, 국제사회에선 이들을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할 수 있을지를 두고 여러 국가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다.
핵심은 역시 인권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유엔 주재 대사를 역임한 오준 세이브더칠드런 이사장은 “탈레반이 집권하게 됨으로써 아프간의 내전 상황은 종식되지만,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간 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할 것이냐의 과제가 남아 있다”며 “미국을 포함한 서방국은 탈레반 정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과거와 같은 극단적인 반인권정책으로 회귀하지 못하도록 압박과 회유를 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
정권 장악하자마자 '공포 통치'
아프간 정권을 장악한 탈레반이 수도 카불에서 시민들을 위협하며 총살에 나서는 모습. [트위터 영상 갈무리] |
탈레반은 정권 장악 뒤 수도인 카불 시내 전역에 검문소를 설치해 지나가는 시민들을 멈춰세우고 신체 수색을 하거나 휴대전화까지 뒤지는 등 공포 통치를 이어가고 있다. 무력을 사용한 내부 통제도 강화하고 있다.
다만 탈레반도 국가를 제대로 운영하려면 국제적으로 합법성을 인정받는 게 관건이기 때문에 일단 안정기에 접어들면 서서히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웅현 고려대 융합대학원 교수는 “서구적 기준에서 이슬람 원리주의자인 탈레반에 급작스러운 변화를 기대하긴 어렵겠지만 여성과 아동 권리 등 인권 문제에 대해선 조금씩 변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탈레반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거나 국제적으로 고립시킬 경우 아프간 내부의 인권 상황을 포함해 지역 안정과 평화는 오히려 더 악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
'탈레반 정당성' 판단도 미·중 온도차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 17일 탈레반 집권의 정당성과 관련 "탈레반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려 하는지 보여주기에 달렸다"고 말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미국과 유럽 국가들을 비롯한 서방 진영에선 탈레반 정권을 국가로 인정할지에 대한 입장 표명을 자제하는 한편 일단 거리 두기에 나서고 있다.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 17일 ‘탈레반을 합법적 집권세력으로 인식하는가’라는 질문에 “그 질문에 답을 하기는 시기상조”라며 “탈레반이 어떻게 나아가려 하는지 보여주기에 달렸다”고 답했다. 제임스 카리쿠키 주유엔 영국 부대표 역시 이날 “탈레반이 기본적인 인권을 계속해 침해한다면 (탈레반 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반면 화춘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16일 “아프간의 주권과 국가 내 모든 파벌을 존중한다”며 탈레반 정부를 인정하는 듯한 입장을 발표했다. 드미트리 지르노프 아프간 주재 러시아 대사 역시 이날 “(카불은) 평화로운 상황이며, (탈레반은) 문명화된 방식으로 책임감 있게 행동하고 있다”며 탈레반의 집권을 옹호했다.
━
韓 인권·국제규범 전제로 협력 가능
탈레반의 아프간 정권 장악으로 주아프가니스탄 한국 대사관은 지난 15일을 기점으로 잠정 폐쇄한 상태다. 최태호 주 아프가니스탄 한국 대사를 포함한 공관원들은 카타르에 임시사무소를 개설, 아프간 내부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8일 아프가니스탄을 벗어나던 상황에 대해 화상브리핑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 최 대사의 모습. [외교부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한국 정부 역시 유보적 입장이다. 이는 한·미 관계까지 고려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정부의 공식 입장은 “아프간 현지 상황 및 관련 국제사회의 동향 등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적으로 지켜보면서 검토해 나가고자 한다”(지난 17일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는 것이다. 다만 최영삼 대변인은 “인권을 존중하고 보편적인 국제규범을 준수하는 국가와는 항상 협력한다는 원칙”을 언급하며 향후 탈레반의 아프간 정부 운영 방식 등에 따라 외교적 협력 관계를 맺을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표했다.
앞서 지난 2월 1일 미얀마에서 군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많은 나라들이 비슷한 고민에 빠졌다. 쿠데타로부터 6개월이 지났지만, 국제사회는 아직 미얀마 군부를 합법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민주정부 인사들에 대한 숙청과 시위대 살상 등 미얀마 군부 역시 반인권적 행태를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미얀마 주재 대사를 교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일부 국가들은 대사가 아니라 ‘대사 대리’로 임명하는 식의 방법을 쓰고 있다고 한다. 대사 임명에는 우선 접수국의 동의 절차(아그레망)가 필요하고, 부임한 뒤에는 대사가 자국 원수로부터 받은 신임장을 주재국 정부에 제정한 뒤 공식 외교 활동을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미얀마에 아그레망을 요청하거나, 신임장을 제정하는 등의 절차를 진행한다면 그 자체가 자칫 미얀마 군부를 합법 정부로 인정하는 모양새로 비칠 수 있다. 이에 여러 나라가 미얀마에 실제로는 대사급 인사를 임명하면서도 형식상으로는 아그레망이나 신임장 제정 등 절차가 필요 없는 대사 대리 직급을 달아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
"美 탈레반 주도 아프간 미래 설계"
지난 15일 아프간 대통령궁을 장악한 탈레반의 모습. 이들은 정권 장악 후 무력을 사용한 내부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수도인 카불 전역에 검문소를 설치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다만 탈레반의 경우 2018년 10월부터 약 2년 10개월간 미국과 직접 협상을 했고, 평화 협정도 체결했다. 이 자체로 미국이 사실상 탈레반을 공식 정부로 인정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희수 성공회대 이슬람문화연구소장은 “미국이 2018년 아프간 정부가 아닌 탈레반과 평화협상을 시작한 것은 아프간의 미래를 설계할 때 결국 탈레반을 중심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며 “탈레반의 정권 장악은 오래전부터 예정된 결론이었고, 다만 예상보다 아프간 정부군이 빨리 붕괴해서 지금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