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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동인문학상] 9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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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최은영), ‘날마다 만우절’(윤성희)

올해로 52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문학의 축제.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 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김인환·오정희·정과리·구효서·이승우·김인숙)는 최근 비대면 독회를 열고 지난 8월에 출간된 소설 작품들을 검토했습니다. 9월 독회의 추천작은 모두 2권. ‘밝은 밤’(최은영), ‘날마다 만우절’(윤성희), 입니다. 이로써 올해 독회는 끝이 났습니다. 이번 동인문학상의 주인공을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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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소설가 최은영/김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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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만우절' 소설가 윤성희/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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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21년 동인문학상 6월 독회 심사평 전문.

◇김인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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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은영 ‘밝은 밤’

최은영의 『밝은 밤』은 사대에 걸친 여자들의 이야기인데 시대 배경을 최소한도로 축소하여 마치 네 여자가 한 식탁에 둘러앉아서 서로 말을 주고받는 연극처럼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네 여자의 생애를 네 여자 가운데 누군가의 입을 통하여 연극 대사처럼 전달한다. 새비(아주머니)와 그녀의 딸 희자의 경우처럼 작가가 주석을 다는 경우에도 직접 개입을 피하고 편지나 이메일을 활용한다. 이정선, 박영옥, 길미선, 이지연의 옆에 각각 친구 새비와 희자와 명희와 지우를 배치하여 인물들의 구도도 대칭을 형성한다.

이 소설의 바닥에는 아주 짙은 우애가 흐르고 있다. 친구들에 비해서 남자들은 대부분 이중성을 드러낸다. 박희수는 백정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나 백정에 대한 차별의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길남선은 북에서 결혼한 아내를 만나자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박영옥을 버리고 길미선의 남편은 아내를 모욕하는 어머니 앞에서 침묵하고 이지연의 남편은 바람을 피우면서 오히려 아내를 비난한다. 그 시절에 백정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구타를 당해도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고 체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정선은 경멸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당당하고 잘생긴 여자가 정신대에 끌려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고 하며 그녀를 데리고 고향을 떠난 남편에게서 자신의 행동을 충동적 허영이라고 후회하는 기미가 보이자 이정선은 남편에게 존중받을 것을 아예 포기하였다.

전쟁 때 영옥은 새비의 고모에게 재봉틀로 옷 수선일을 배웠다. 대구에서 입대했다 휴전이 되어 돌아온 박희수는 부모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다고 가족을 데리고 강원도 희령으로 이사했다. 영옥은 열아홉 살 되던 해에 수산시장에서 일하는 27세의 청년 길남선과 결혼하여 59년 9월에 미선을 낳았다. 2년 후에 두 여자가 찾아와서 남선의 어머니와 아내라고 하였다. 남선은 열일곱에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북에서 못 온 줄 알았던 그들이 속초에 와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이미 결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도 결혼을 허락했다는 말을 듣고 영옥은 선선히 물러나서 옷 수선을 하며 혼자 딸을 키웠다. 당시의 법률로는 미선의 호적을 남선의 가족으로 올릴 수밖에 없었다. 일흔이 넘어서도 영옥은 농장과 과수원과 김치공장에서 품을 팔고 공공근로에 나가 일을 하며 혼자 산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미선은 서울로 가서 취직을 하고 희령과 인연을 끊었다.

남들과 비슷하게 사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다. 본 적도 없는 남자의 호적에 올라 법적으로 타인인 엄마와 사는 것이 싫었던 그녀는 딸만은 남들의 눈에 그럴듯하게 여겨지는 모습으로 살게 하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 테두리가 아무리 답답해도 그곳에서 벗어나지 않고 견디며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은 삶을 눈에 띄지 않게 살아야 딸이 번듯하게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시어머니의 무시와 남편의 무관심 때문에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아이를 엄마에게 맡기고 열흘 동안 집을 나와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딸을 생각하고 자진해서 그 테두리로 다시 들어갔다. 암이 재발하여 두 번째 수술을 받고 나서야 그녀는 남편에게 거리를 두고 명희를 따라 멕시코 여행을 다녀올 만큼 자신을 조금 회복했다.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부모 밑에서 늘 외롭다고 느끼며 자란 지연은 껍데기뿐으로 지속되는 결혼생활을 힘겹게 굴려 가면서 이해받고 싶다는 마음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껍데기들을 다 치우고 나니 그제야 내가 보였다(85쪽).” 희령에 내려가서 할머니를 만나 속내를 터놓으면서 지연은 미지근한 관계 속에서 안전하게 살려고 했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이혼은 남편의 기만 때문만이 아니라 자기를 속인 기만의 결과이기도 했다.

작가는 새비 아저씨 부부와 그들의 딸 김희자를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묘사한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지연은 희자의 아버지를 “생전 본 적도 없던 백정의 집에 가서 간병을 하고, 그 누구의 위에도 서려고 하지 않고, 아내를 귀하게 여기고, 그러다 아내와 딸을 위해 혼자 일본으로 떠난, 지금의 나보다 한참은 어린 이십 대 초반의 남자”(82쪽)로 기억한다. 그는 어머니는 일제의 수탈 때문에 잃은 땅을 며느리 탓으로 돌렸다. 여자가 잘못 들어와 집안이 망했다고 며느리를 욕하는 것을 본 그는 어머니에 맞서 단호하게 아내를 옹호하였다. 그들은 친구 같은 부부였다.

개성에서 정선은 39년에 영옥을 낳았고 새비는 42년에 희자를 낳았다. 희자의 아버지는 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있다가 원폭에도 살아남아 시월에 돌아왔다. 3년 후 피폭 후유증으로 죽을 때에 그는 하느님에게 사과받고 싶다고 말했다. 남편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하던 새비도 끝내는 남편의 고통을 더는 지켜볼 수 없다고 정선에게 고백했다. 그녀는 대구로 피란하여 옷 수선을 하는 고모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혼자서 아이를 키우다 63년 1월에 죽었다. 수학과를 나온 희자는 독일에서 암호학과 정보보호학의 전문가가 되었다. 조국을 빛낸 해외 동포 시리즈란 방송에서 희자를 봤다는 할머니의 말을 듣고 지연은 함부르크 대학 홈페이지에서 찾은 주소로 희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몇 달 후에 퇴직한 이후로 학교 이메일을 자주 확인하지 않아서 미안하다는 답신이 왔다.

소설은 지연이 희령의 천문대에 취직한 2017년 1월에서 시작하여 대전의 한 연구원으로 이직하여 김희자의 연락을 받은 2018년 3월에 끝난다. 소설에서 바다는 늘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역할을 한다. 바닷가에서 영옥과 지연이 마음을 열고 바다 앞에서 정선과 새비가 처음으로 노동의 구속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받고 바다에 가서 영옥과 희자가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자기 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바다를 배경으로 정선과 영옥과 미선과 죽은 언니와 자기가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을 지연은 소중하게 간직한다. 영옥과 지연이 희령 터미널로 희자를 마중하러 나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소설의 시간은 다층적이고 다원적인 원환을 그리며 완성된다. 진정한 행복이란 과거와 미래가 현재 속에서 한데 섞여 둥글게 도는 이 순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하는 직선적 시간은 기대와 실망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원환적 시간은 자신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해와 공감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 윤성희 ‘날마다 만우절’

엘리엇은 『네 사중주』에서 “난 그 소리 듣기 싫다. 늙은이들의 지혜니 뭐니”라고 말했다. 남들에게 또는 하느님에게 마음 열기를 두려워하는 늙은이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것은 고작 속임수 지침서이고 그들의 가을 같은 평정이란 것도 신중하게 꾸며낸 둔감함에 지나지 않으며 늙은이들의 마음은 힘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치솟는 격분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지혜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윤성희의 미덕이다.

소설집 『날마다 만우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보통은 생각하기 어려운 사건과 사고를 겪은 사람들이다. 몇 사람이 자동차 사고로 여러 번 골절상을 당하고 또 가족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은 살인 또는 살인미수로 갇혀 있다. 그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연애와 결혼에 실패하며 돈 때문에 가족이나 이웃과 사이가 틀어져서 오랫동안 서로 말도 안 하고 산다. 돈이 없으면 죽는 세상에서 돈에 대한 욕망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에게 판단의 마지막 척도는 늘 이익과 손해이고 우리에게 어떤 행동을 취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는 손해를 봤다는 감정이다.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인간의 관계구조를 파괴하고 끝내는 살인 충동에 굴복하게 한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나 인생이란 것은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집의 특이한 점은 인물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이익과 손해에서 눈을 돌려 빚을 못 받은 상태 그대로, 배반당한 상태 그대로, 가족 가운데 누가 감옥에 있는 상태 그대로 누군가와 만나서 마음을 주고받기 시작한다는 데 있다. “이 사람들을 봐라. 고통 감각이 파괴본능으로 흘러가지 않고 화합본능을 강화하여 공감 영역을 확대할 수도 있다.” 윤성희는 이렇게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과부족 없이 딱 부러진 문장이 감정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해가는 사물의 빛과 그늘을 묘사한다. 거기에는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 거의 없다. 문장의 기교 없음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인물들의 분노를 넉넉한 분위기로 감싸준다. 잘못했다고 뉘우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유 없이 다시 만나 의미 없는 장난을 하고 시시한 헛소리를 주고받는다. 삶이란 그렇게 자잘하고 시시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고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것이다.

대단한 것은 사람들이 삶의 시시함을 인정하고 자신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타인의 잘못에 대하여 따지는 것을 중도에 그만두고 그냥 그대로 함께 산다는 것이다. 분노가 지배하는 답답한 분위기에서 분노가 가라앉아 탁 트인 분위기로 바뀌는 감정의 변화에 소설들의 주제가 들어있다. 자신과 타인의 죄를 딱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눈길로 바라보는 체념이 유머의 본질이며 이 소설집의 바탕에 흐르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유머다.

마을버스를 하던 남편이 오빠의 사업에 담보로 내주었다가 집을 날렸다. 남편 회사의 공금을 유용한 경리과장과 남편의 내연녀 노릇을 하던 여직원이 유명한 국숫집 주인이 되어서 방송에 나왔다. 암이 재발한 아내가 왕년에 천오백만 원을 갚지 않은 이웃집 여자를 찾아가서 빚을 안 받을 테니 국수 가게에 가서 같이 욕을 해주고 오자고 했다. 땅 때문에 아버지와 고모가 싸우고 의절했다. 어느 날부터 고모가 고구마니 꽃이니 하는 것을 보내기 시작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암에 걸렸다고 대답했다. 가족이 놀라서 찾아가니 거짓말이라고 웃었다. 그리고는 만우절이라도 만난 것처럼 모여 앉아 서로 거짓말 늘어놓기 시합을 했다. 아버지는 어린 동생이 이뻐서 그 주위를 맴돌던 시절을 추억하며 고모에게 미친년이라고 욕을 했다. 모두 그 말이 다시는 싸우지 말자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아마 고모의 병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모의 헛소리에 힘껏 장단을 맞추려고 했을 것이다.

부부가 도배 가게를 해서 산 집을 시동생이 날려버렸다. 인테리어 가게들이 생겨서 도배 일을 못 하게 되자 남편은 아파트 경비로 취직을 했는데 순찰을 돌지 않은 어느 날 여학생이 남자애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공사 현장에서 투신하였다. 해고된 남편이 술에 젖어 사는 것을 보고 여자는 가끔 그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놀이터에 놓여있는 민지라는 아이의 킥보드를 다른 곳에 가져다 숨겨 놓고 여자는 밤에 혼자 나와 킥보드를 타보았다. 킥보드를 타면서 여자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버지는 댐 공사장에서 돌무더기에 왼쪽 다리를 깔려서 불구가 된 후로 난폭해졌다. 어머니가 술에 약을 타는 것을 보고 그 술을 그녀가 아버지 앞에 가져다 놓았다. 술에 취해 우물물을 떠먹으려 하는 아버지를 몇 차례 본 이웃의 증언으로 수사가 종결되었고 어머니는 어떤 종교집단으로 들어가 세상을 등졌다. 킥보드를 타고 멀리 신축 아파트까지 갔다가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 있는데 고시원에서 공부하던 청년이 지나다가 보고 구급차를 불렀다. 얼음땡 놀이를 하는 어린애들처럼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다가 구급차가 오자 서로 ‘땡’ 하고 헤어졌다.

윤성희의 소설에서 유머는 운명에 대한 관용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저질러 온 수많은 실수와 잘못, 그리고 치유되지 않는 상처와 고통에서 오는 끈적끈적한 분노의 감정이 넉넉하고 부드러운 눈길 아래 소리 없이 녹아버린다. 암흑으로 추락하지 않도록 우리를 붙잡아 주는 것은 도덕이 아니라 유머다.

◇오정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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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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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은영 ‘밝은 밤’

현실의 시간은 희령에서의 겨울에서부터 이듬해 봄까지 일년 남짓한 기간이지만 소설 속의 시간은 1930년 무렵부터 2017년에 이르는 근 백년의 세월이다. 그것은 화자의 증조할머니로부터 할머니, 어머니 화자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모계사이자 일제때로부터 광복과 전쟁과 사회변천을 겪어온 한국의 근현대사이며 그 시절을 살아낸 여성들의 내밀한 정서이자 삶의 내용이고 역사이기도 하다. 소설의 원줄기, 동력이라 할 수 있는 두 여성 삼천과 새비의 관계는 목숨의 이야기로 읽힌다. 여성들끼리의 자매애와 우정을 사랑을 이처럼 사무치게 질기게 거의 운명애적으로 다룬 소설은 흔치 않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죄가 있다면 여자로 태어나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어머니들의 탄식은 지금 이 시대의 딸들에게도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다음 생에서는 딸의 딸로 태어나거나 엄마의 엄마로 태어나서 이생에서 못다한 것들을 서로에게 주겠노라는 사무치고 무력한 탄식들 역시 그리 먼 이야기들이 아니다. 작가는 사랑과 연민의 깊은 시선으로 그들이 살아온 삶이, 목숨을 다해 살아낸 생이 보이지 않는 힘으로 면면히 이어져내려온다는, 그래서 딸은 엄마의 엄마가 되고 엄마는 다시금 딸의 딸로 태어나는 신비한 순환이 가능하다는 문학적 기술에 성공하고 있다.

◊ 윤성희 ‘날마다 만우절’

이 작가의 소설은 읽을 때마다 놀란다. 허를 찌르는 엉뚱한 발상과 전복적 사유의 재미에 놀라고 곳곳에서 빛을 발하는 통찰력에 놀라고 상처와 상실과 불행을 싸안는 따뜻한 힘에 놀란다. 이미 윤성희문학의 독특한 개성으로 자리매김된 재치와 빛남, 발랄함이 이 소설집에서도 약여하다. 소소한 일상, 무심히 지나치던 작은 풍경, 귓전을 스쳐가는 평범한 말들도 이 작가의 촉수에 닿으면 미모사잎처럼 미세한 떨림으로 흔들리며 빛을 발한다. 불행한 가족사도 끔찍하고 고단한 현실도 막막한 미래도 동화속 세상처럼 따뜻하고, 동시에 낮꿈처럼 서늘하고 낯설고 서럽기도 하다. 추락을 상승으로 만드는 것이 문학의 중요한 힘 중의 하나라고 한다. 소설 속에서의 빈번한 우연과 비틀리고 어긋나며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운명들이 문득 인간과 삶의 오묘함이라는 또다른 신비로 다가오는 것은 것은 이 작가의 유머의 힘일 것이다. 드문 미덕으로 보여진다.

◇정과리·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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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회를 마치며

동인문학상 대상작 검토 주기는 전해 8월부터 당년 7월까지이다. 2021년 동인문학상 독회는 올해 7월 출간작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번으로 끝난다. 마감을 하면서 오랫동안 망설였던 얘기를 하고자 한다.

한국문학은 시방 근본적인 생존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지난 9월 10일자 이기문 기자가 쓴 「그 많던 문학 밀리언셀러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에서도 언급된 바 있지만 근래 10여년 간에 진행된 한국소설 판매량의 급감은 독자들이 거의 한국문학을 떠나고 있다는 우려를 자아낸다. 이 위기의 원인들과 상황은 단일한 게 아니라 복합적인데 오늘은 한 가지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

현재 한국소설은 점점 더 특정한 연령대로 축소되어서 팔리고 읽히고 있다. 또한 공공 미디어의 관심도 같은 방향으로 연동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출판사들에게도 체온계처럼 그대로 전달되어 그들의 판매전략을 해당 연령대를 중심으로 짜게끔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속된 작가들이 마치 이너서클이 되어서 서로를 응원한다. 문학상 같은 주변 현상들에도 그 여파는 진앙의 강도를 고스란히 전달한다. 작가와 독자층이 세대 별로 호응하는 양상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지만(원래 소설은 어떤 나이에 쓰든 만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마땅한데 말이다), 이로부터 발원한 더 심각한 양상들은 소재와 주제들이 거의 엇비슷해지고 전개도 그렇게 되어, 한국문학의 폭을 급속도로 좁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항하면서 한국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려는 시도들은 기척도 없이 깜박였다가 사라지곤 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그것은 한국사람들이 거의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 속에서, 특정 연령대를 벗어나면 독서는 한국인에게 ‘뭣이 중헌디?’ 질문에 대한 부정의 집합에 배당되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 한국소설은 가장 ‘중하지 않은’ 부류로 취급되어 그 집합 속의 맨 구석 속으로 처박힌다.

그렇다면 그나마 책을 읽는 연령대는 왜 책을 읽나? 그 집단이 책읽기가 체질화된 집단이라면, 당연히 그들의 독서성향은 세월이 지나도 지속될 것이고, 따라서 연령대의 숫자도 바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들이 특정한 연령대로 접어들면 그들도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통계를 내보지 않았지만, 나는 내 주변의 사람들에서 어김없이 그 현상을 확인한다.

그렇다면 이 연령대가 책을 읽는 까닭은 분명해진다. 그들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어떤 상황 속에 처해 있기 때문이고 그 상황을 벗어나면 더 이상 책을 읽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읽을 게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생활에 이득을 가져다 줄 그런 책들 뿐이다.

결국 한국소설의 위기라는 이 현상의 두 개의 근원은 출판에 대한 비전이 부재한 문학 출판권의 지적 열악성(혹은 상업적 경향)이 장기간 지속되었다는 사정이며(내 판단에 이 지속은 소위 사회적 담론으로서 ‘큰 이야기’가 타박된 이후 30 여 년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책읽기를 체질화하는 데 실패한 교육의 문제이다. 그 때문에 ‘평생교육’이라는 화두도 등장하고 각종 단체며 기관들과 운동들도 번성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 유년 시절부터 책읽기에서 물질적 이득과는 다른 즐거움을 얻을 수 있도록 체질을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관해서 지금까지의 한국 교육은 아이디어를 내면 낼수록 구호를 만들면 만들수록 점점 더 반대편의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고, 그 파국의 결과가 한국소설을 ‘찬투’처럼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독자를 가지고 있는 작가라도 행복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 시점이 지나면, 지난 30년 동안 경제적 풍요에 뒷받침되어 화려한 작가 생활을 누렸던 사람들이 지금 맞이하고 있는 운명이 그들에게는 닥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누가 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런 일들이 누적이 되다 보니, 동인문학상도 차츰 ‘명예의 전당’이 되어가고 있는 인상이다. 일단 헌액이 된 다음, 작가들의 작품 생산은 뜸해지거나, 독자들의 주목이 희박해진다. 초창기 동인문학상은 거꾸로였다. 김승옥, 이청준, 최인훈 등등은 동인문학상과 더불어 한국문학사의 별들로 자기를 키웠다. 나는 오늘의 동인문학상도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무언가가 바뀌지 않으면 내 바램은 헛되고 헛된 허영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 최은영 ‘밝은 밤’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한다. ‘밝은 밤’은 밤을 밝게 한다. 전구 스위치를 올렸다는 실없는 상상은 하지 말자. 어슴푸레한 미명도 아니다. 어둠이 알갱이들로 뭉치며, 개울 속의 자갈들처럼 돌돌돌 구르고 매끄러운 여울처럼 자르르 흐른다.

요컨대 최은영은 특유의 문체로 감정의 흐름을 구슬들로 엮는다. 그 문체는 투명하고 보풀이 없다. 그의 언어는 또박또박 말한다. 구체적인 사실들의 묘사로 그 장면을 또렷이 한다. 어둠 속에서 훌쩍이다가 주책없이 흘러버리는 마음을 추스르고 되새기고 차분히 가다듬는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어두운 마음이란 무엇인가? 여성들이 겪는 온갖 사연들, 안식없는 안팎의 노동들, 고부간 갈등, 무심하고도 외도하는 남편, 이혼과 끝나지 않는 싸움, 사소한 이유로 외면하고 사는 가족들, 버림받고 거리로 내쫒긴 어떤 일, 살가운 듯하면서도 냉랭한 이웃들, 함께 살면 필경 생기는 자질구레한 상처들, 그리고 여자에 대한 끊임없는 규정들, 여자라서, 여자인데, 여자라구.

이 모든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지만, 때마다 일어나고야 마는 일들은 상처와 분노와 후회를 번갈아하며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최은영의 소설은 이런 일이 더 이상 반복되어서는 안된다는 자각에서 태어난다. 그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상황과도 싸워야 하지만 자신과도 싸워야 한다. 현실과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나를 재정립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화자는 말한다: “나는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나. 나에게, 내 인생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알고 싶지 않아서,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어둠은 거기에 있었다.”

자기에게 정직한 것은 자신과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는 단초이다. 주인공은 모든 것을 되새기며 그것들에 까닭과 책임과 의지를 배분한다. 감정은 정화됨으로써 삶의 이유가 된다. 그렇게 어둠은 스스로 빛나게 된다.

최은영은 현대의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에게 여전히 드리워지는 여러 불공평하고 부당한 삶의 모습들을 다채롭게 엮어 짜면서 그것들을 당사자 스스로 이겨내기 위한 판으로 변개시킨다. 아무리 내 인생이 억울하고 불행해도 결국 도움의 손길이 중단되리라는 걸 알기에 스스로 돕는 자임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한 자연발심주체인 여성은 그렇게 태어난다. 중성의 이름으로 여성의 고유한 삶을 여물차게 만끽했던 조르쥬 상드를 비롯, 올렝프 드 구즈, 콜레트, 그 당당했던 여성들이 떠오른다.

◇구효서·소설가

조선일보

/김연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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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은영 ‘밝은 밤’

일제 강점기와 해방공간, 전쟁과 분단을 관통하여 오늘에 이르는 장편 서사에서 이토록 총소리가 들리지 않는 소설을 본 적이 있었던가. 이 소설에서도 총소리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어쩌다 멀리서 한 번쯤 들리고 그마저도 금방 사라질 뿐 포탄의 굉음도 학살의 참경도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국가 간 혹은 국가 내부에서 무력이 첨예하게 충돌하던 시절의 이야기란 극적일 수밖에 없고 극적 상황의 필수 요건 중 하나가 총포와 학살 등에 의한 비극일 것이다. 한국 전후문학은 그동안 다양하고도 규모 있게, 어쩌면 충실하게 이러한 현대사의 고난과 비극을 사회적 효용으로 발현해 내는 나름의 관계식을 고민해 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도 충실하게 혹은 반복적으로, 어떤 면에서는 남성 서사의 일방향성에 의존해온 점이 있다면 고의적 은폐는 아닐지라도 그 서사의 극적 스펙터클들이 가려온 풍경들도 있지 않을까.

최은영의 첫 장편 《밝은 밤》이 귀하게 읽히는 까닭은 바로 그, 가려져서는 안 될 거였으나 가려졌던 이야기들을 이제 더는 가려질 수 없는 이야기로 고스란히 복원해 내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수없는 목숨이 비명으로 날아가는 난리를 겪으면서도 한국의 비정한 가부장만큼은 기적처럼 건재했고 오히려 더 굳건해졌다는 것, 그에 따라 여성들은 전쟁만큼 무서운 풍상을 전쟁보다 몇 배나 긴 세월 동안 맨살로 견딜 수밖에 없었다는 것. 최은영 소설이 총성을 멀리하고 대신 많은 할머니들의 쇠잔한 음성에 가까이 귀 기울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 아닐까. 증조할머니 삼천이와 할머니 영옥, 어머니 미선과 나 지연으로 이어지는 지극한 아픔의 기원이 슬프게도 외증조부와 할아버지, 아버지와 남편이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어지러운 시절 탓으로 돌리려 해도 달라질 수 없을 것이다. 두 흑인 여성이 보랏빛 꽃밭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손벽치기를 나누던 장면이 <칼라퍼플>의 대미였던가. 슬픔과 아름다움. 좋은 작품 속에서는 이 둘의 이름이 같은 이름일 수 있다는 것을 그 영화 이후로 처음 이 소설에서 찔리듯 상기하게 된다. 삼천이와 새비의 길고 긴 쎄쎄쎄에서.

◊ 윤성희 ‘날마다 만우절’

작가는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을 쓰는 동안 사람들 마음에 뚫린 구멍을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빨려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구멍.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구멍을 빠져 나올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싶었다고 말한다.(311~312쪽)

작가가 말하고자 한 구멍은 아닐지라도 윤성희의 소설에는 곳곳에 구멍이 있다. 구멍이 대개는 허점의 은유로 쓰이는데 텅 빈 점을 허점(虛點)이라고 하니 굳이 은유라고 할 것도 없겠다.

텅빈 점, 즉 허점인 구멍. 윤성희가 소설에서 내어주는 이 구멍에 빠지는 일은 우선 즐겁다. 윤성희의 소설은 정말 잠시도 쉬지 않고 우리를 즐겁게 하는데 그 강도와 빈도가 거의 고문수준이다. 아닌 게 아니라 빨려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구멍이다. 어이없음과 아이러니와 난데없는 우연들이 겹치면서 생겨나는, 도처에 널린 이 즐거운 에피소드의 구멍들은 작가의 타고난 유머감각이 빚어내는 것인데 즐겁다고만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해서 그 구멍을 ‘뻥 뚫린 구멍’이라고 해야겠다. 윤성희 소설의 즐거움은 막힌 것이 뻥 뚫리는 시원함을 동반하니까. 심지어는 그 즐거움과 시원함이 슬프기까지 하다.

첫 문장이 ‘욕을 했다.’로 끝나는 단편 <남은 기억>에서는 특히 씨발, 씨발년, 씨발놈, 개새끼 같은 욕도 느닷없이 튀어나온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하는 첫마디가 그렇다. 좀 맥락이 없어 보이지만 욕의 동기들을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장난과 후련함과 슬픔의 긴 그림자가 따라온다. 욕은 아니더라도 ‘싫어!’ ‘패주고 싶어.’ ‘죽었으면 좋겠다.’ 같은 식의 말들이 여러 단편들에서 단호하고 즉각적으로 튀어나온다. 욕과 곱지 못한 말들임에도 후련한 까닭은 작가가 인물의 캐릭터와 행동 동기를 이야기의 앞뒤로 성실히 마련해 놓았기 때문이다.

뻥 뚫려서 시원하다는 말은 그동안 무언가에 막혀서 답답했었다는 말과 같다. 차마 그러지는 못했지만 소설 속의 인물이나마 그런 식으로 해주니 독자로서는 속이 다 시원해진다는 말일 것이다. 윤성희가 잘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해 줄게. 내가 말할게.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 그러니 너를 이해해……. 이러면 어떤 작가보다 독자들은 윤성희가 해 주는 말을 듣고 싶어 할 것이다. 재미있고 슬프며 후련해지는 복잡한 정화기술은 아무나 발휘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두루 봐야한다. 무엇이 어떻게 꼬여있고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어떤 사정에 막혀 있는지, 모두의 숨통을 답답하게 짓누르는 음험한 주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그것의 마수에서 헤어날 수 있는지. 두루 보지 않고는 후련한 슬픔은커녕 작은 즐거움도 줄 수 없을 것이다.

윤성희 소설의 구멍이란 그런 면에서 숨구멍인 셈이다. 막히면 죽는 것. 그런 구멍이 윤성희의 소설 여기저기에 숭숭 나 있다. 즐거운 구멍에 빠지다 차라리 시원한 구멍이 되어버리는 것이 우리를 옥죄던 구멍에 갇히지 않고 여유로워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우리가 위로라고 할 수 있다면 여기서 말한 구멍이 윤성희가 작가의 말에서 한 구멍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승우·소설가

조선일보

/ 오종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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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은영 ‘밝은 밤’

한국 근현대사의 소설화 작업은 지난 시대 주로 남성 작가들에 의해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최근에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 주로 젊은 여성 작가들에 의해 씌어지고 있는데, 이 현상은 이전의 소설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영역을 채우려는 작가들의 의욕을 생각하게 한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 민주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중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한국 여성들의 삶을 복기하는 일. 김숨의 일련의 소설들, 그리고 올해만 해도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 김연경의 ‘우주보다 낯설고 먼’이 있었다. 이 작업은 대개 독자를 과거로 데리고 가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인물을 통해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을 현재로 불러내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소설들은 현재의 시각으로 역사를 재조명하고, 3, 4대에 걸친 여성들의 삶의 연쇄를 눈앞에 펼쳐 보이고, 더 나아가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들이 겪고 있는 불평등과 차별의 현실을 목도하게 한다.

최은영의 ‘밝은 밤’은 두 가지 점에서 인상적이다. 하나는 이야기의 힘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들의 유대, 혹은 우정의 힘이다. 작가는 첫 장편소설인 ‘밝은 밤’에서 특유의 감상을 절제하고 세세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데 집중한다. 이혼 상태의 여성화자인 ‘나’는 할머니를 통해 증조할머니의 삶과 그 시절 이야기를 듣는다. 이야기가 전해지는 과정의 자연스러움과 펼쳐지는 이야기의 생생함이 이 작가를 믿고 단숨에 읽게 만든다. 위안부로 끌려갈 뻔한 증조모, 중혼이라는 걸 속이고 결혼한 할머니,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던 어머니, 그리고 나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문제와 함께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아픔이 구체적인 이야기 속에 담겨 전해진다. 부당한 시대를 살아낸 이들의 삶의 태도는 마음을 감추고 사는 것이었다. “마음 다 감추고 사느라 얼마나 서럽구 외로웠어.”(115쪽)

여성들간의 우정, 혹은 유대도 꽤 중요한 요소로 보인다. 현실의 고난을 감내하고 이기기 위해 그들은 같은 처지의 여성들에게 마음을 준다. 이 소설에서 가장 뭉클한 몇 장면은 이들간의 속 깊은 우정과 관련되어 있다. 증조할머니와 새비, 할머니와 명숙 할머니, 엄마와 명희 아줌마, 그리고 ‘나’와 지우가 보여주는 정서적 유대는 이 소설이 말하려고 하는 핵심처럼 여겨진다. 힘든 시절을 살아낸 여성들을 살게 했던 힘은 공감하고 자기를 내주었던 같은 처지의 여성들이었다. 현재의’나’의 상처를 낫게 하는 것도 현실을 피해 온 회령에서 만난 할머니와의, 세대를 뛰어넘는 공감과 유대였다.

◊ 윤성희 ‘날마다 만우절’

타인의 삶을 엿보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면 윤성희의 소설 만한 것이 없다. 그의 소설에는 세상의 온갖 인물들이 다 등장하고 벼라별 사연들이 소개된다. 대개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잠깐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단역에게조차 각자의 사연을 부여함으로써 윤성희는 모든 사람을 고유한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인간의 고유성은 그가 가진 사연에 의해 확보된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 중 사연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한 작품에서 얼마 만한 분량을 배분받았는가 하는 문제와 상관없이 자신의 삶에서 누구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타인의 삶이 궁금한 것일까? 타인의 삶을 엿보려는 독자의 호기심이 자신의 삶이 세상(타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관련되어 있다면, 더욱 윤성희의 소설을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소설이 주는 안도감은, 예를 들어 말하자면 유명 연예인이 출연한 몰래카메라를 보며 우리가 느끼는 안도감과 유사하다. 특별해 보이던 연예인이 보여주는 지극히 평범한 모습을 통해 시청자는 이상한 안도감을 느끼는데, 그것은 자기가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게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윤성희의 소설 속 인물들은 화장하지 않은 맨 얼굴의 이웃들처럼 친근하고, 그 인물들이 하는 생각은 내 안에 있는 것처럼 익숙하다. 그의 소설들은 공허한 희망의 약속 대신 불친절한 세상을 직시하게 하고, 그것으로 삶을 긍정하게 한다.

일견 에피소드들의 모음처럼 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일종의 리듬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겉이 화려한 이 소설들을 산만하지 않게 만드는 요인인 것 같다. 일종의 구조적 안정감. 무성한 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굵고 튼튼한 줄기를 가진 나무와 같다고 할까.

◇김인숙·소설가

조선일보

◊ 최은영 ‘밝은 밤’

‘더는 이렇게 못 살겠어서’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때, 누군가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있다. “내게 누군가가 있다”라고 믿게 해주는 사람. 그리고 또 누구도 ‘괴로운 나, 슬픈 나와는 함께 하지 않으려고 할 때’, 섵부른 위로보다 가만가만히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있다. 사람을 ‘울게 하는 이야기. 모욕이나 상처조자도 건드리지 못한 마음을 건드리는’ 이야기.

최은영의 소설은 제목으로부터 다가와 그 끝까지 제목이 함께 한다. 까마득히 저물어버린 마음, 그 마음의 밤이 조금씩 어루만져지다가 조금씩 밝아져가는. 날이 밝기 전의 밤에도 저문 밤과 밝은 밤이 있는 것 같은 이야기.

소설은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한 화자가 어린 시절에 잠시 함께 시간을 보낸 후 이유를 알 수 없게 오래 관계가 끊어졌던 할머니를 우연히 다시 만나면서부터 시작된다. 20년이 넘는 시간의 간격과 반면 어떤 시간으로도 훼손하지 못하는 조모와 손녀간의 인력은 이 소설이 지탱하는 긴장과 호흡의 간격이기도 하다. 밀어내지도 않고 끌어당기지도 않는. 밀려날 염려를 하지 않고 잡아채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 관계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벌어졌던 모욕, 시대의 관념이라고 쉽게 불리워졌던 기만, 남성이 여성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너무도 쉽게 저질렀던 위선, 그 모든 폭력의 서사를 깊숙히 응시한다. 이 서사는 할머니의 할머니로부터 시작되는 백년의 이야기이기도 한데, 가혹했던 역사를 품은 한 여인이 견뎌온 삶은, 어느날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손녀를 위해 준비된 듯 보이기도 한다. 소설의 화자는 손녀이지만,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독자들이다. 벡년이 지나도, 백년이 흘러도 여전히 비슷한 곳을 다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설 속 화자의 한마디는 아프다.

“저도 사과받지 못했어요.”

나는 사과받지 못했다라고 말하지 않고 나도 사과받지 못했다라고 화자가 말하는 순간, 속수무책으로 끌려들어가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순하고 맑게 위로해주는 힘이 있다. 그것을 아마도 공감이라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공감하는 마음과 문장으로 손을 내미는 소설, 최은영의 ‘밝은밤’은 그렇다.

◊ 윤성희 ‘날마다 만우절’

좋아하는 작가를 만나게 되면 그 작가를 왜 좋아하는지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그 작가의 문장을 읽어주는 것이 더 옳다. 좋아하는 소설을 만나게 되면 그 줄거리를 말하기보다 역시 그 소설의 한 구절을 읽어주는 것이 옳다.

윤성희의 소설이 내게 늘 그렇다. 윤성희의 소설은 문장이 문장을 밀고, 다시 그 문장이 문장을 끌어당긴다. 그 문장은 이야기의 한 구절 같기도 하고, 노래의 리듬같기도 하고, 마치 내 곁에서 들려오는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하다. 옆집 앞집 윗집 아랫집 사람들의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한데, 그 많은 소리들이 조금도 소란스럽지가 않다. 소란스럽기는 커녕 그게 끝날까봐 아쉽다.

저기, 얘기 좀 더 해줄래요?

아무 벽이나 툭툭 두드리고 싶은 기분. 그 벽 너머에 윤성희가 살고 있을 것 같은 기분. 시침을 뚝떼고 타자기를 툭툭툭 치고 있을 것 같은 기분.

그래서 지금 윤성희의 문장을 골라 윤성희는 이런 작가라고 말해야겠는데, 또 그럴 수가 없다. 그 문장이 어떤 문장으로 이어질지 전혀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짐작할 수 없는 이야기, 다 뻔한데 여전히 오리무중, 캄캄하다가 문득 환하고, 환한가 싶으면 까마득해지는. 한마디로 말하면 아마도, 살아가는 얘기. 애를 쓰고, 기를 쓰고, 절절매는 삶의 이야기.

어떤 소설은 그런 삶의 한복판에 서서 뚫어질 듯 응시하고, 어떤 소설은 그런 삶을 그냥 같이 살아버린다. 윤성희는 후자. 소설이 소설 안에서 스스로 살아가고 있으니 문장은 태어나기 전이거나 태어난 후이다. 바꿔말하면 태어나는 순간 태어난 후이므로, 항상 현재형이다.

윤성희의 전작 중에 ‘첫문장’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그 소설의 ‘작가의 말’에서 작가가 한 말은 이렇다.

“첫문장은 중요하지 않다. 이 소설을 쓰면서 나는 여러 번 그 말을 중얼거렸다. 첫 문장은 중요하지 않다고. 그렇다면 두 번째 문장은?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세번 째 문장도. 네번째 문장도. 그리고 마지막 문장도.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문장이 아니다’ 그러면서 지워져도 상관없는 문장들로 이루어진 소설을 써야 했다고 말한다.

소설집 ‘날마다 만우절’에 실린 11편의 소설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장이 지워진 것이 아니라 스며들었다. 지워지는 순간 곧바로 발효가 되어 향기를 품는데, 그 조화가 놀랍다. 하기야 어찌 안 놀라울 수가 있겠는가. 이 세상 사람들 모두의 삶이 기절할만큼 놀라운데, 그 사람들의 가장 사소하고, 가장 진짜인 이야기만 툭툭 집어서 툭툭 이야기하고 있는 윤성희의 소설이 놀랍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이기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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