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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전세대출 딜레마… 안줄이면 가계대출 못잡고, 줄이면 서민 직격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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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난 가계대출 절반이 전세대출

중소기업에 다니는 30대 김모씨는 경기도 구리시의 아파트에 2억6000만원짜리 전세를 살고 있다. 은행에서 2억원 전세대출을 받았다. 김씨는 “금리가 연 2%대인 전세대출이 없으면 월세를 살아야 하는 상황”이라며 “가계대출 줄이려고 전세대출도 묶는다는 소문이 돌아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가계대출 축소를 위한 정부의 ‘대출 조이기’가 금융권 전반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전세대출이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본지가 5대 은행(KB국민·신한·우리·하나·NH농협)의 가계대출 현황을 집계한 결과, 올 들어 늘어난 대출의 절반이 전세대출이었다. 전세대출 증가세를 그대로 두고는 가계대출이 늘어나는 상황을 바꾸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세대출은 대부분 무주택 실수요자가 받아가기 때문에 금융 당국이 쉽게 손대기 어렵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가계대출 증가액이 지난 8월 8조원을 넘었는데, 9월 이후 5조~6조원대로 떨어지지 않으면 전세대출도 손을 대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전세대출이 밀어올린 가계대출 급증

작년 말 이후 지난 8월까지 5대 은행의 가계대출을 살펴보면, 전체 증가액(28조6610억원)의 51%(14조7543억원)를 전세대출이 차지했다. 우리은행의 경우 가계대출 증가액 가운데 전세대출의 비율이 84%에 달한다. 신한은행도 75%나 됐다. KB국민은행은 60% 정도로 집계됐다.

조선일보

그래픽=백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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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당국의 대출 조이기 압박으로 은행들이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의 문턱을 높였지만, 가계대출 확산세를 주도하는 전세대출을 줄이지 않으면 대출 증가세를 낮추는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전세 가격이 급등한 데다 가을 이사철까지 다가오고 있어 전세대출 수요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전세대출이 이렇게 증가한 것은 집값이 치솟으며 전셋값까지 끌어올린 영향이 크다. KB국민은행 리브부동산에 따르면, 지난달 말 전국 아파트 평균 전세가는 작년 말보다 11.6%나 올랐다. 그뿐 아니라 주택금융공사와 주택도시보증공사·서울보증보험 등이 거의 100% 보증을 하고 있어 손실 리스크가 적다보니 은행에서도 전세대출은 상대적으로 쉽게 내주는 경향이 있다. 전세대출은 소득에서 대출 원리금이 차지하는 비율을 일정 기준 이내로 정하는 개인별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규제 대상에서도 제외돼 있어 주택담보대출에 비해 규제가 약하다.

금융 당국이 전세대출 규제를 검토하는 이유는 신용대출보다 훨씬 싼 2%대 저금리로 빌릴 수 있다보니 여윳돈이 있어도 최대한 전세대출을 끌어 쓰는 대출자들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수요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수요라는 것이다. 전세대출을 많이 받아 전세 보증금을 내고 남는 돈으로 주식 등에 투자하고 있다고 금융 당국은 보고 있다. 한 30대 직장인은 “요즘은 은행 전세대출 안 받고 자기 돈으로 전세살이 하면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라고 했다.

◇가계부채 안 잡히면 전세대출도 규제 시작될 듯

금융 당국은 전세대출 급증에 대해 심각하게 보고 있다. 하지만 전세대출 가운데 실수요를 정밀하게 구분하기가 어렵고 자칫 실수요자가 피해를 입을 수 있어 대책 마련을 망설이고 있다. 한 금융 당국 고위 관계자는 “전세대출 증가세가 꺾이지 않으면 대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지만, 전세대출을 줄이면 여론의 반발이 클 수 있어 고민이 깊다”고 했다.

전세대출은 일부 1주택자도 포함되지만, 기본적으로 무주택자 대상의 대표적인 서민 금융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40~64세 중 60%가 무주택자다. 전세대출 수요층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 당국 내부에서는 가계대출 증가세가 이대로 이어진다면 전세대출도 손을 댈 수밖에 없다는 기류가 점차 강해지고 있다. 한 정부 당국자는 “전세대출을 어느 정도 통제하는 방안도 하나의 카드로 고려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잡음이 일더라도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16일 “전세대출, 집단대출, 정책모기지 등 실수요와 관련된 대출이 많이 늘고 있는데, 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계속 검토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가계부채 증가세를 끌어올리고 있는 전세대출 증가 추세를 꺾을 방안으로 전세대출을 DSR 규제에 포함시키는 것 등을 대책으로 거론한다. 신용상 금융연구원 금융리스크연구센터장은 “가계부채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단계적으로나마 전세대출을 DSR에 포함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세대출을 DSR에 넣으면서 만기를 길게 하거나 점진적으로 포함 대상을 확대하는 방식이라면 대출 축소 충격을 줄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김은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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