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9 (금)

‘봉사왕’ 할아버지, 손주 이름으로 기부… “커서 남 도우렴”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아이가 행복입니다] [우리 아이 첫 기부]

‘나눔 유산’ 물려주는 권문혁씨

“저도 저의 할아버지께 나눔을 배웠습니다. 나눔은 제가 남겨줄 가장 비싼 유산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 주말 인천 계양구에 사는 권문혁(61)씨 집에 권씨와 큰아들, 손자 3대가 모두 군복을 입고 모였다. 권씨 아내 이연옥(60)씨의 환갑 축하를 위해 모인 것인데, 2대째 군인의 길을 걷고 있는 권씨 부자가 특별히 군복을 차려입은 것이다. 권씨는 지난 199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했고, 아들 처용(34)씨는 아버지를 따라 현재 육군 상사로 전방에서 근무 중이다. 손자 유준(5)군은 “할아버지와 아빠처럼 군복을 입고 싶다”고 졸라 아동용 군복을 입었다.

조선일보

권문혁(61)씨 가족이 지난 11일 함께 모여 사진을 찍었다. 손자 권유준(5)군이 할아버지 권씨와 할머니 이연옥(60)씨 사이에 앉아 웃고 있다. 권씨 뒤로는 왼쪽부터 둘째 아들 처원(28)씨, 첫째 아들 처용(34)씨, 처용씨 아내 이소라(31)씨다. 권씨는 올해 4월부터 손자 이름으로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 후원을 시작했다. /권문혁씨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날 권씨는 깜짝 선물로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손자 유준군에게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후원 증서를 선물한 것이다. 후원자 이름란에 손자 이름이 적혀 있었다. 권씨가 올해 4월부터 유준군 이름으로 매달 1만원씩 어려운 아이들에게 후원한 것을 이날 처음 가족들에게 알린 것이다. 권씨는 손자에게 “이건 할아버지가 너 대신 평생 내려고 한다”며 “나중에 너도 크면 조금씩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준군이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예, 할아버지~”라고 넙죽 대답하자 가족들이 모두 웃었다. 처용씨 부부는 “저희가 유준이를 위해 해야 할 일을 아버님이 먼저 시작하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권씨는 전역 후 지난 2019년까지 인천 일대에서 예비군 동대장으로 일하며 봉사 활동을 꾸준히 해 국방부 장관 표창까지 받은 ‘나눔 대장’이다. 인천 부평구 예비군 동대장으로 근무할 때에는 ‘한울회’라는 주민 봉사 모임을 만들었다. 회원들과 장애인 복지 시설을 매주 찾아 봉사 활동을 하고 독거 노인과 조손 가정도 도왔다. 계양구로 근무지를 옮긴 뒤에는 6년 동안 매일 아침 학교 앞에서 녹색어머니회와 함께 교통 봉사를 하고 야간 방범 순찰 봉사 등도 했다. 이런 활동들이 알려져 2003년 국방부 장관 표창과 2005년 인천광역시장 표창을 받았다.

권씨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 나눔의 DNA를 물려받았다”며 “나 역시 자식들과 손자에게 나누고 봉사하는 마음을 물려주고 싶어 손자 이름으로 후원을 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1960년대 권씨는 시장 한가운데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서 함께 살았는데, 당시 상이군인 등 사정이 딱한 사람들이 오면 할아버지가 “마당에 들여 밥 먹여 보내라”고 하셨다고 한다. 권씨는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의 행동을 눈여겨봤다”며 “성인이 되고 난 뒤에도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권씨는 예비군 동대장에서 퇴직한 후 작년 도서관장직에 도전해 현재 인천 계양구 서운도서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나눔 활동은 “여력이 될 때까지 계속할 계획”이라고 했다. 병원비가 없어 강제 퇴원 위기에 있는 환자들을 도우려 인천의 한 병원을 10여 년째 후원 중이다. 학생들에게 자원 봉사에 대해 교육하는 지역 ‘교육 봉사단’ 강사 활동도 10년 넘게 해오고 있다.

권씨의 바람은 자식들과 손자에게 나눔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것이다. 권씨는 “큰아들에게 병원 후원을 언젠가 이어서 해달라고 부탁했고, 실용음악과에 재학 중인 둘째아들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음악을 하라고 당부했다”고 했다. 권씨는 “안 보이는 곳에서 저보다 값진 봉사를 하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런 선한 영향력이 우리 사회를 만드는 주춧돌이자 단단한 바탕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권씨는 손자 유준이가 태어난 뒤 인생의 기쁨이 배가 됐다고 했다. 권씨는 “며느리가 유준이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 초음파 사진을 보내줬는데, 존재 자체만으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고 했다. 손자 이름도 며느리가 한 글자를 고르고, 권씨가 나머지 한 글자를 골라 지었다. 이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유준이는 “할아버지와 아빠를 따라 나도 군인이 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권씨는 “3대 모두 군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대가 조금 되는 건 사실이지만 아직 어려서 좀 더 지켜봐야겠다”며 웃었다.

[김민정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