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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살롱] 백인 남성 중산층의 공간, 위키백과... 여성 이야기를 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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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집단지성 뒤에 숨은 성 편향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하미나 작가는 과학사 전공자답게 2030 여성의 건강문제, 덜 눈에 띄는 여성의 산업재해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한국일보

Mnet의 춤 경연 오디션 프로그램인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메인 홈페이지 화면. Mnet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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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장 뜨거운 콘텐츠는 단연코 Mnet '스트릿 우먼 파이터(스우파)' 아닐까. 처음 제목을 듣고는 생각했다. "싸움이라니 너무 호전적인 것 아니야? 꼭 싸워야만 해?" 1화를 보면서 속으로 외쳤다. "더 싸워! 더!"

'스우파'의 여성 댄서들이 산뜻하게 싸워서 좋다. 이들은 거침없이 말한다. "이기고 싶어요." "당연히 제가 더 잘하죠." "제가 중학교 때 하던 거던데요." "예쁘니까 춤은 못 췄으면 좋겠어요." 나의 바람이나 평가를 이런 확신을 가지고 세상에 드러낸 적이 있었나? 까마득하다.

댄서들은 각자의 개성대로 자신을 한껏 꾸민다. 이들의 몸짓은 아양이나 교태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게 하면 되게 재미없는 춤이다. 이들은 귀엽거나 예쁘기보다는 멋지다. 정말 멋지다. 열정을 다해 자신을 뽐내며 경쟁하고 결과에 승복하는 모습도 멋지다.

여자들은 잘 싸우는 법을 배울 기회를 좀체 갖지 못한다. 여자들의 공격이 말이나 암시 등 주로 수동공격의 형태로 발휘되는 것은 세상이 여성의 분노를 ‘여성적이지 못한 것’으로 여기며 억눌러왔기 때문이다. 때로는 복싱 선수처럼, 허락된 세계에서 누군가를 때리고 누군가에게 맞고 싶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아드레날린이 끓어 넘치며 온몸이 각성되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

최근 여성의 이야기가 미디어에 다채롭게 등장하고 있다. SBS의 '골 때리는 그녀들', 유튜브 채널 '시켜서 한다! 오늘부터 운동뚱', 여성 스포츠인 6인을 조명한 KBS의 '다큐멘터리 국가대표', 또 젠더의 관점에서 역사와 과학을 풀어내는 이곳 한국일보의 젠더살롱까지.

이런 콘텐츠들을 보면 만든 사람의 노고를 떠올린다. 한 회, 한 회를 만드는 노고도 노고지만, 그보다는 이것을 기획한 뒤 결정권자를 설득했을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한다.

방송사, 신문사, 잡지사, 출판사에 근무하는 여자들은 눈치를 보며 기획회의에서 자기가 준비한 안건을 소개했겠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든 자기가 속한 세계의 규칙에 맞게 풀어보려 애써보았겠지. 무수히 폐기된 수많은 기획안들 중 간신히 살아남은 것의 결과물을 보며 세상의 변화가 매우 구체적인 한 개인의 일상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리고 변화가 물결처럼 주변으로 퍼져간다는 것도.

민주적인 위키백과 규율, 독점성을 만들다


지식이 형성될 때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위키백과를 예로 들고 싶다. 2001년 미국의 사업가 지미 웨일스에 의해 시작된 위키백과는 인터넷과 함께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290여 개의 언어로 쓰인 위키백과의 월평균 페이지 조회 수는 150억 건, 전체 페이지는 약 5,000만 개다. 유튜브, 구글, 페이스북과 함께 몇 년째 방문자 수 상위권에 오른다.

신뢰도 면에서도 우수한데, 정확도를 가장 우선시하는 구글 검색 결과에서 위키백과는 언제나 가장 위에 뜨는 콘텐츠 중 하나다. 2017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컴퓨터과학 및 인공지능 연구실과 피츠버그대 경제학과 공동연구팀은 인공지능을 이용해 화학 분야의 논문을 조사해, 논문에 쓰인 830개 단어마다 1번꼴로 위키백과 내용이 반영됐다고 보고했다.

위키백과는 명실상부 집단 지성의 가장 좋은 예다. 위키백과에서는 모든 사용자가 동등한 편집권을 갖는다. 원칙적으로는, 누구나 문서를 만들고 고칠 수 있고 수정 사항이 반영되기 전 승인이나 검토 과정이 없다.
한국일보

위키백과는 원칙적으로 누구나 지식을 만들고 편집할 수 있다. 위키백과는 그 안의 규칙을 직접 만들고 시행하는 사용자들과 함께 성장해왔다. 2005년부터는 해마다 위키백과 사용자들이 모이는 국제 콘퍼런스 '위키마니아'가 열렸다. 사진은 2019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위키마니아의 모습.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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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아무 때나 고칠 수 있는데도 위키백과의 정확도가 유지되는 것은 위키백과 사용자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구축한 시스템 덕분이다. 누군가 위키백과의 페이지에 들어가 글을 수정하면 다른 편집자들이 수정사항을 자세히 뜯어보고 출처와 근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한다. 잘못된 정보를 쓰거나 문서를 삭제해도 이를 빠르게 복구하는 장치가 마련돼 있고, 고의로 가짜 정보를 입력한 편집자는 활동이 정지된다.

위키백과의 성장과 함께 그 안의 커뮤니티도 성장해왔다. 위키백과의 지식 생산을 관리하는 정책과 지침에 대한 원칙은 위키백과와 함께 성장한 커뮤니티 내 사람들에 의해 모두 투표와 토론을 거쳐 결정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민주적으로 형성된 위키백과의 규율은 새로운 사용자의 유입을 막고 위키백과를 독점적인 공간으로 만들기도 했다.

'백인, 남성, 중산층'이 보는 세상인 위키백과


2019년 윤진혁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미래기술분석센터 선임연구원, 이상훈 경남과기대 교양학부 교수, 정하웅 KAIST 물리학과 교수로 구성된 공동연구팀이 국제학술지 'Nature Human Behaviour'에 발표한 연구는 대단히 흥미롭다. 이들은 복잡계를 도입해 위키미디어의 2억7,000만여 건의 정보와 4,000만 건의 논문, 9,000만 건의 특허를 비교 분석해 각각의 불평등 정도를 소득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로 정량화했다. 그 결과, 위키백과와 논문, 특허 모두에서 지식이 축적될수록 소수 저자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지식의 독점화 현상이 나타났다.

흥미로운 점은 위키백과의 불평등지수가 논문이나 특허보다 높았다는 점이다. 위키백과는 누구나 편집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세한 규칙이 많아 진입장벽이 높다. 새로운 사용자가 규칙을 익힐 만한 시간과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보호 장치가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 위키백과라는 지식의 ‘정글’에 뛰어드니 살아남기 어려운 것이다.

위키 편집인의 구성은 탄생 초기와 비교해 크게 변하지 않았다. 초반 편집의 헤게모니를 잡은 이들이 20여 년 넘게 유지된다는 이야기다. 이들은 위키백과를 편집하는 편집인이기도 하면서 편집의 규칙을 만들어간 규칙의 제정자이기도 하다.

위키백과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편집자의 대부분이 남성이다. 2018년 위키미디어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위키백과 편집자 중 여성은 9%에 불과하다. 성별에 더해 서구 중심적이다. 참여자의 지역 분포는 서유럽이 50%, 아시아가 20%, 아프리카는 5%에도 못 미친다.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하듯 사용 언어와 무관하게 위키백과에 등재된 인물 정보 중 여성은 대체로 20%를 넘지 못한다. 위키백과로 보는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라기보다는 백인, 남성, 중산층이 보는 세상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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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기준 위키백과 참여자의 성비를 나타낸 그래프를 보면 남성이 90%, 여성이 9%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위키백과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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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의 인물 등재 기준은 내용보다는 형식으로 결정된다. 이때 신뢰할 만한 출처를 명확히 표기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신뢰할 만한 출처란 무엇인가? 바로 ‘성문화’된 지식이다. 위키에 특정 인물을 등재하기 위해서는 그와 관련된 글로 된 지식이 많아야 한다. 특히 언론 보도와 위키백과는 서로를 참조하는 관계다. 노벨상을 수상한 여성 물리학자보다 성범죄를 저지른 연예인의 정보가 위키백과에 풍부해지는 이유는 그와 관련한 정보가 자주 보도됐기 때문이다.

역사를 바꾼 더 많은 여성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그와 관련한 지식이 유통되어야 한다. 위키백과에 인물이 등재되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론이 이들 여자를 조명하고 관련한 정보를 세상에 알렸어야 한다. 기사를 참고해 또다른 글이 쓰이고, 이것은 다시 위키백과를 풍부하게 만들며, 또다른 지식의 원천 재료가 된다.

무언가 고쳐보려는 여자들


고쳐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2016년 시작된 페미위키는 현존하는 인터넷 상의 정보가 여성혐오적, 남성중심적이며 소수자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사용자들과 함께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위키 및 여성주의 정보집합체를 만들어 나가려 애쓴다.

2018년 국제학술지 네이처가 '가장 주목할 만한 과학자 20인'으로 선정한 영국 임페리얼칼리지의 젊은 여성 물리학자 제스 웨이드는 하루에 한 명씩 여성, 유색인종 과학자를 소개하는 위키백과 페이지를 만들어왔다. 지금까지 쓴 과학자만 900명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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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임페리얼칼리지의 젊은 물리학자 제스 웨이드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유색인종 과학자를 소개하는 위키백과 페이지를 만들어왔다. 지금까지 그가 소개한 과학자만 900명이 넘는다.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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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스 웨이드가 쓴 인물 중 한 명은 글래디스 웨스트로, 1931년에 태어나 초기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개발에 기여한 흑인 여성 수학자다. 웨이드가 글래디스 웨스트 위키백과 페이지를 만든 뒤 웨스트는 BBC 선정 100대 여성에 뽑혔고, 미국 공군 명예의 전당에도 입성했다.

세상은 초인적인 영웅 한 명에 의해 벼락이 떨어지듯 바뀌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충실히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미세한 변화를 통해 조금씩 천천히 바뀐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 미세한 변화다. 어느 날 어느 순간 듣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 선택하지 않았던 것을 선택해 보는 것, 낯선 주제의 글을 읽어보는 것, 기회를 줘보는 것.

이 같은 변화는 느리고 굼떠서 일으키기 어렵지만, 또 반대로 한번 시작되면 도무지 무거워 멈춰 세우기 어렵다. 셀 수 없이 많은 물 분자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해일처럼 말이다.

하미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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