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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나더러 “어머님”이래…엄마가 되지 않은 여자들의 성장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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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이런 홀로

“애들은 모르는 그런 게 있어”

힘든 육아 얘기하던 친구의 말

아이 기르는 일 대단한 거지만

성숙의 잣대가 단지 그것뿐일까


한겨레

엄마가 된 사람만 할 수 있는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엄마가 되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다른 성숙의 잣대는 아닐 것이다. 부모가 되기 전엔 절대 알 수 없는 게 있다는데, 그게 과연 누구나 꼭 알아야 하는 진리일까.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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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 식당에서 반찬을 놔주던 아주머니가 말을 건넸다. 솔직히 어머님 다음에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뒷말은 기억이 안 난다. 나에게 어머님이라고 했어! 그 말이 주는 충격이 너무 컸다. 맞은편에 내 친구가 앉아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내가 친구의 엄마처럼 보였다는 건가?! 여기까지 읽은 독자에게 변명을 좀 해보자면, 나는 평소에 꽃무늬를 무척 좋아해 사건 당일에도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꽃을 찾아 입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세상에 나쁜 꽃무늬는 없다! 겨자색 바탕에 개화한 꽃이 존재감을 과시하는, 동아시아풍의 여행용 원피스를 입은 나는 당시 어머님들이 텃밭을 일굴 때 착용하는 밀짚 소재의 버킷 해트를 쓰고 있었다. 그래, 차림새 때문에 어머님이라 오해(?)받았다고 하자(집에 오자마자 원피스를 기부 상자에 넣었다).

길에서 “거기, 아줌마!”라고 낯선 남성이 나를 불러 세운 적도 있다. 낯선 이에게 아줌마라고 호명된 날이면,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다. 아니, 왜 함부로 남의 산책길을 망치는 거야?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어머님, 혹은 아줌마로 불리는 것이 왜 나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느껴질까. 아줌마가 중년 여성을 부르는 호칭이라면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게 영 틀린 것은 아닌데 말이다.

어른의 증명서


어쩌다 보니 비혼에 비슷한 관심사를 가졌거나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친구들만 자주 만난다. 멀어진 친구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역시나 경조사가 있을 때다. 얼마 전,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침에 문자를 받고, 급하게 고향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시간이 좀 흐르자, 익숙한 얼굴들이 장례식장으로 급하게 들어오는 게 보였다. 한 시절 친하게 지냈지만 얼굴 못 본 지 오래된 동창들이었다. 우리는 “지지배, 어떻게 지냈니? 연락도 안 하고” 같은 통속 드라마의 대사를 주고받았다. 그중 결혼을 안 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더 나눌 대화 소재도 떨어지자 친구 한명이 농담을 건넸다. “야, 다음엔 ○○(내 이름) 결혼식장에서 만나자.” 이제 뭐, 이 정도에는 다채로운 응대법이 준비된 나는 1번 답변을 꺼내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핫, 누구 소개도 안 해주는 애들이 꼭 그런 소리 하더라.”

아이 연령대에 따라 힘든 육아 이야기를 하던 친구 한명은 또 이렇게 말했다. “애들은 모르는 그런 게 있어.” 여기서 애들이란 그들의 아이들이 아니라 아이를 낳지도 키워보지도 않은 나를 칭하는 것이었다. 육아하며 일하는 맘들의 전쟁 같은 하루에 비하면 내 한 몸 건사도 힘든 나의 고난이란 얼마나 만만한가. 10년 동안 나만 제자리였다. 엄마가 된 아이들은 연봉이나 커리어를 자랑하지 않아도, 이미 그럴싸한 어른의 증명서가 있었다. ‘아이’라는.

인간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위대한 발자국이 출산과 육아일지도 모르겠다. 손도 발도 조그만, 겨우 숨만 쉬던 생명체를 의젓한 인간으로 길러내는 그 일은 분명 위대하다. 그 힘든 일을 해내다니, 너희 참 대단하다.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어른이 되어 출산과 육아를 해낸 엄마들 사이에서, 과거에 비해 지금의 내가 성장했다는 증명을 무엇으로 해야 하는지 아득해졌다.

최근 나와 비슷한 연령대로 추정되는 필자의 ‘추억팔이’ 에세이를 읽다가 멈칫한 순간이 있었다. 2000년대 초반 풍경을 묘사한 에세이였는데, 그는 나와 비슷한 문화적 토양을 지니고 있었다. 2000년대에 10대 후반이었던 사람들은 그때 들었던 음악과 즐겨 읽던 패션잡지 같은 것의 명칭만 들어도 물개박수 치며 그리워한다. 이를테면 ‘응답하라 2002’ 같은 것이다. 필자는 20대에 힘들 때 자주 들었던 음악을 오랜만에 들으니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자아 찾기에만 골몰했는지 떠올랐다고 서술했다. 과거에는 진정한 나를 찾는 노래 가사에 위로받았지만 지금은 어린이 동요를 가장 많이 듣는다고 글을 맺고 있었다. 시디플레이어가 닳도록 들었던 노래에서 벗어나 이제는 아이의 최애곡을 가장 많이 듣게 된 자신. 그는 그것을 긍정하고 있었다. 매일 전투적으로 육아와 일을 해내느라 자아에 골몰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공감하며 책을 읽다가, 갑자기 그와는 멀리 떨어진 행성으로 쫓겨난 기분이었다. 물론 필자는 남을 평가하는 말은 조금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20대 때 즐겨 듣던 노래를 지금도 듣고, 비슷한 고민을 반복하는 나는 전혀 성장하지 못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삶의 모양새는 다른 건데


엄마가 된 사람만 할 수 있는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엄마가 되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다른 성숙의 잣대는 아닐 것이다. 부모가 되기 전엔 절대 알 수 없는 게 있다는데, 그게 과연 누구나 꼭 알아야 하는 진리일까.

거울 속에는 10년 전에 비해 팔자주름이 깊어진 여자가 있다. 성장은 모르겠지만 노화의 증거는 명백하다. 모르는 사람에게 어머님이라고 불리지만 어머님이 되지 못한 나, 육체는 노쇠하고 있는데 ‘정상’적인 생의 주기에는 이르질 못했다. 직장도 연봉도 그대로라면 성장의 증거는 어디서 찾을까. 다만, 일할 때 대처 능력과 요령이 좀 생겼고, 억울할 때 사정을 설명할 수 있는 용기도 생겼다. 그리고 예전엔 생존이 너무 시급해 매일 급한 불 끄기 바빴다면, 지금은 동물, 지구, 공익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여전히 14~19살에 듣던 노래들이 좋고, 그 시절 좋아했던 시트콤을 백번쯤 재탕하고 있는데 이건 퇴행일까.

무엇보다 왜 성장을 해야만 하는지도 의문이다. 삶의 모양새는 다를 수밖에 없으니, 서로 비교도 평가도 안 하면 좋겠지만 둘만 모여도 눈치 싸움이 되는 게 현실이다(곧 명절인데, 모두 덜 상처받읍시다). 일단 다른 분들이 열심히 성장하고 계신 것 같으니, 저는 당분간 그대로 좀 있을게요. 그래서 뒤처지게 되면 할 수 없고요. 쭈굴.

늘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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