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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英 못 믿겠다”… 佛, 드골 노선으로 복귀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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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호주 주재 프랑스 대사 소환 ‘극약처방’

“G7 정상회의 때 마크롱 몰래 ‘오커스’ 논의”

다시 소환되는 드골… 프랑스, 또 나토 탈퇴?

세계일보

장이브 르드리앙 프랑스 외교장관은 미국·영국·호주 3국 동맹 ‘오커스’ 발족을 “중대한 신뢰 위반”으로 규정하며 맹비난했다. 사진은 그가 지난 10일 독일 바이마르를 방문해 연설하는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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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영국·호주 3국의 새로운 안보 동맹 ‘오커스’(AUKUS) 발족 이후 프랑스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 뿌리깊은 ‘앵글로색슨’(영국·미국)에 대한 반감이 다시 확산하며 “결국 프랑스만의 독자 노선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 안보를 의존할 수 없다며 나토 탈퇴를 단행한 샤를 드골 전 대통령 시대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된다.

◆미국·호주 주재 프랑스 대사 소환 ‘극약처방’

18일(현지시간) AFP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장이브 르드리앙 프랑스 외교부 장관은 방송에 출연해 ‘거짓말’, ‘경멸’ 등 거친 표현을 내뱉으며 미국·영국·호주를 맹비난했다. 호주는 당초 프랑스 방산업체과 우리 돈 77조원 규모 계약을 맺고 디젤 잠수함 12척을 구매하기로 했으나, ‘오커스’ 출범에 따라 미·영으로부터 핵추진 잠수함 개발을 지원받게 되자 계약을 파기해버렸다.

이날 르드리앙 장관은 호주가 프랑스 기업과의 잠수함 공급 계약을 깰 때까지 “거짓말, 이중성, 중대한 신뢰 위반, 경멸이 있었다”고 말했다. 프랑스는 오커스 발족 직후 미국과 호주에 주재하는 자국 대사들을 본국으로 소환하는 극약처방까지 내렸다. 대사 소환은 국교 단절 또는 전쟁 직전에나 나올 법한 고강도 조치다. 대사 소환에 관해 르드리앙 장관은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와 우리가 얼마나 불쾌한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오커스’ 3국 중 영국 주재 대사만 소환 대상에서 제외됐다. 르드리앙 장관은 “영국의 끝없는 기회주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영국 대사를 다시 데려와 설명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며 이번 협상에서 영국 역할은 미미했다고 깎아내렸다. ‘오커스’의 핵심은 미국이 호주에 핵잠수함 개발 기술을 지원하는 것이며, 영국은 미국·호주 양국의 오랜 우방으로서 그냥 이름만 올린 정도라는 프랑스 정부의 인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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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영국·호주 3국 동맹 ‘오커스’ 발족으로 미국·프랑스 관계를 한 단계 격상시키려던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구상은 물거품이 됐다. 사진은 지난 6월 영국 콘월에서 열린 G7(주요7개국) 정상회의 때 마크롱 대통령(왼쪽)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다정한 포즈를 취하는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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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7 정상회의 때 마크롱 몰래 ‘오커스’ 논의”

눈길을 끄는 건 르드리앙 장관이 내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나토 정상회의 때 이번에 벌어진 ‘오커스’ 출범을 정식 의제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6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 당시 나토가 중국 견제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해 프랑스 등 유럽 동맹국 정상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냉전 시기 소련(현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대항하고자 결성된 나토가 중국을 ‘가상의 적’ 삼아 인도·태평양 지역으로까지 관심 영역을 확장키로 한 것은 세계 안보 패러다임의 대전환이자 바이든 외교의 승리로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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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영국·호주 3국 동맹 ‘오커스’ 발족 직후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환대를 받고 있다. ‘오커스’ 출범으로 미국·영국에 배신당했다고 여기는 프랑스 입장에선 독일과의 관계가 한층 더 중요해졌다. 파리=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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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미국·영국이 나토와 무관한 호주를 끌어들여 ‘나토의 인도·태평양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오커스’를 따로 만들었으니 프랑스 입장에선 배신감을 느낄 법도 하다. 이날 영국 언론들은 지난 6월 영국 콘월에서 열린 G7(주요7개국) 정상회의 때 바이든 대통령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특별 초청을 받아 참석한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가 따로 모여 비밀리에 ‘오커스’ 결성에 관한 회의를 했으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논의에서 소외된 것은 물론 그런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몰랐다고 보도했다. 호주가 프랑스 기업과의 잠수함 구매 계약을 파기하기 직전까지도 프랑스 정부는 잠수함 사업을 일컬어 “호주·프랑스 안보협력의 상징”이라고 대외 홍보에 열을 올렸으니 국제사회에서 체면을 단단히 구긴 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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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1959∼1969년 재임)을 지낸 샤를 드골이 육군 장군이던 시절의 모습. 드골은 미·영에 의존하지 않는 프랑스만의 독자적 안보전략을 모색하며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서 프랑스를 탈퇴시켰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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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소환되는 드골… 프랑스, 또 나토 탈퇴?

일각에선 내년 나토 정상회의 때 이 문제를 거론하겠다고 다짐한 프랑스가 미·영과의 거리두기, 더 나아가 나토 재탈퇴까지 구상하는 것 아닌가 하는 관측을 내놓는다. 프랑스는 1950∼1960년대 나토를 주도하던 미국이 중요한 사안을 프랑스는 쏙 빼고 영국하고만 의논한 뒤 결정을 내리는 구조에 강한 불만을 터뜨리며 ‘앵글로색슨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의구심을 품어왔다. 당시 드골 대통령은 “프랑스와 영국을 동등하게 대우하라”는 자신의 요구사항이 미국에 의해 단칼에 거부당하자 1966년 “프랑스는 프랑스 힘으로 지킨다”며 나토 탈퇴를 단행하기도 했다.

그 뒤 오랫동안 나토와 거리두기를 해 온 프랑스는 친미 성향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집권하던 2009년 나토에 복귀한 바 있다. 하지만 여전히 미·영이 주도하는 나토에서 별다른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해 온 프랑스는 ‘오커스’ 출범으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이 크게 추락하고 말았다. 일각에선 “내년 나토 정상회의를 계기로 프랑스가 정색을 하고 미·영에 관계 재정립을 요구할 수 있다”며 “그와 별개로 과거 드골이 그랬듯 미·영에 의존하지 않는 프랑스만의 독자적 안보 구상을 추진하고 나설 가능성 또한 크다”는 관측을 내놓는다. 나토 재탈퇴도 선택지가 될 수 있어 보인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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