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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노벨상 실망하긴 이르다"…전세계 '1% 과학자' 한국에 4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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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도 노벨상 배출하자 ③ ◆

매일경제

2028년 충북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에 들어설 예정인 세계 최고 성능의 4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 `오아시스(OASIS)` 조감도. 그동안 방사광가속기를 통해 탄생한 노벨상은 30개에 달한다. [사진 제공 =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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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한국은 노벨 과학상을 받지 못했지만 정부가 과학기술 분야 기초연구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 30년이 채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망하긴 너무 이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과학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이미 세계 상위 1%의 영향력을 가진 과학자들이 수십 명씩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100여 년 전부터 기초과학에 뛰어든 미국, 독일, 일본 등 선진국들과 비교하기보다는 긴 호흡에서 꾸준히 기초과학에 투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15일 "그동안 한국에서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은 것은 한국이 기초과학을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경제 발전을 위해 산업기술 개발에 집중하느라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우리는 왜 노벨상을 못 타느냐'는 얘기는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현택환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입자연구단장(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석좌교수)은 "노벨상 시즌이 되면 국민이 25명(국적 기준)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과 자주 비교하는데 일본은 이미 1900년대 초부터 기초과학에 투자하기 시작했다"며 "기초과학은 어느 정도 성과가 빛을 보려면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한데, 우리는 일본이 축적해 온 시간의 절반도 오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이 '노벨상 수상 과학자를 배출하겠다'며 2011년 IBS를 설립하면서 벤치마킹한 기초과학 연구기관인 독일 막스플랑크협회(MPG)와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리켄)는 각각 1911년과 1917년 설립됐다. 그동안 무려 32번의 노벨상 수상 영예를 안은 MPG는 단일 기관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기관이기도 하다. 리켄도 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100년을 앞서간 이들 기관과 비교하기엔 IBS의 역사가 너무 짧은 게 사실이다. 이 교수는 "아직도 정부기관에서는 기초도 기술 투자의 개념으로 접근한다"며 "한국은 여전히 기초과학의 시작 단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최근 10년 사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뤘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분석에 따르면 한국은 연구 자원과 연구 활동, 네트워크, 연구 환경, 성과 등을 기준으로 산정한 과학기술혁신역량지수(COSTII) 순위에서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세계 8위를 기록했다. 2010년 11위에서 출발해 3계단을 올라간 것이다.

IBS 설립 이후 우주 입자의 측정을 위한 지하실험연구소, 세계 최고 출력의 초강력 레이저, 저온 원자현미경, 슈퍼컴퓨팅 시설 등 첨단 과학 장비가 들어서면서 그동안 한국에서 하지 못했던 기초연구가 가능해진 것도 고무적이다. 2028년 가동을 목표로 충북 청주시 오창에 건설을 추진 중인 4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 '오아시스(OASIS)'는 세계 최고 성능을 자랑한다. 총 30개의 노벨상을 안겨 준 방사광가속기는 '노벨상의 산실'로 통한다. 우주 미세먼지부터 신약 개발, 신소재 연구에 이르는 다양한 과학기술 연구에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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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과학자도 꾸준히 늘고 있다. 전 세계 학술정보회사인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가 발표한 '세계 상위 1% 영향력을 가진 과학자(HCR)'에 선정된 한국 과학자는 2014년 18명에서 2017년 29명, 2020년엔 46명으로 늘었다. 이는 과학자용 연구정보 데이터베이스(DB)인 '웹 오브 사이언스'에 기록된 논문 인용 데이터를 바탕으로 최근 10년간 각 분야에서 논문의 피인용 횟수가 상위 1%인 논문의 저자를 분석한 결과다.

글로벌 학술정보회사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가 예측한 '노벨상 수상 유력 후보'에 오른 한국인 과학자도 4명이다. 다양한 다공성 나노물질 합성법을 창안한 유룡 KAIST 화학과 명예교수(2014년·화학상)와 페로브스카이트 태양전지 연구를 개척한 박남규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2017년·화학상), 나노입자의 대량생산법을 고안해낸 현택환 IBS 나노입자연구단장(2020년·화학상), '한탄 바이러스'를 최초로 발견하고 백신과 치료법까지 개발해낸 이호왕 고려대 의대 명예교수(2021년·생리의학상) 등이다. 이들의 영향력은 세계 상위 0.01%로 평가된다. 현재 한국 연구기관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있는 로드니 루오프 IBS 다차원재료연구단장도 2018년 한국 소속으로 이름을 올렸다.

클래리베이트가 2002년 이래 예측한 노벨상 수상 후보 가운데 실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전체의 약 17%(61명)에 달한다. 또 올해 노벨 화학상을 받은 베냐민 리스트 독일 막스플랑크석탄연구소장이 무려 12년 전인 2009년에 노벨상 수상자 예측 명단에 올랐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앞서 한국에서 노벨상 수상 유력 후보로 지목된 과학자들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전망도 나온다.

세계는 오히려 이처럼 단기간에 전 세계 수준으로 성장한 한국에 주목하고 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경제 성장만큼이나 과학 분야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학술정보 DB인 '네이처인덱스' 창립자인 데이비드 스윈뱅크스 네이처 호주·뉴질랜드 회장은 매일경제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한국은 울산과학기술원(UNIST) 같은 신생 대학을 중심으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며 "과학계에서 최근 한국을 주목하고 있는 이유"라고 말했다. 네이처인덱스는 지난해 5월 세계적인 권위지 '네이처' 본지를 통해 최근 한국 과학계의 변화를 집중 조명한 바 있다. 스윈뱅크스 회장은 "한국에 있는 누군가가 가까운 미래에 노벨상을 탄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닐 것"이라면서도 "한국이 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면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이 이뤄낸 최첨단 연구 성과에 대해 더 많이 인식할 수 있도록 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석학들은 미래 세대에 대한 기대가 더 크다고 했다. 유 교수는 "앞으로 한국에서 '노벨상 클래스' 명단에 오르는 과학자는 점점 더 늘어날 것"이라며 "그 수가 10명, 20명쯤으로 늘어나게 되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다"고 전망했다. 현 단장도 "예전에는 한국에서 네이처, 사이언스 같은 권위지에 논문을 발표하면 신문 1면을 장식할 정도로 화제가 됐는데 요즘에는 네이처 사이언스에서 흔히 한국인 저자를 찾을 수 있다"며 "단기간 이만큼 과학 수준을 끌어올린 국가는 전 세계 어느 곳에도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국내 젊은 연구자들은 최근 학계에서 떠오르는 샛별로 평가된다. 일례로 45세 이하의 젊은 우수 과학자 집단인 한국 차세대 과학기술한림원(Y-KAST) 회원인 김석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비고전적인 양자장론 분야에서 최근 눈에 띄는 성과를 발표하면서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홀로그램 방법론을 통해 양자 중력에서 블랙홀이 나타내는 열물리 현상에 대해 미시적으로 규명한 것이 대표적이다. 국종성 포스텍 환경공학부 교수는 지구 기후 시스템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대기와 해양의 상호작용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엘니뇨 등 여러 현상의 메커니즘을 규명한 연구 성과로 한국인 최초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과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노벨 과학상을 수상하려면 역설적으로 더 이상 노벨상에 연연하지 않고 국제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과학 연구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노벨상이 주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다. 이덕환 교수는 "그동안 한국이 과학기술 개발로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선진국들이 이뤄놓은 기초과학 연구 성과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이제는 우리도 이익 추구와 관계없이 인류의 지식을 진일보시킬 수 있는 기초연구 성과로 개발도상국과 국제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 교수도 "노벨상을 목표로 하는 건 굉장히 후진국적인 발상"이라며 "이제 선진국이 된 한국에는 맞지 않는 사고방식"이라고 지적했다.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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