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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이재명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인식 맞나? [김세형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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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지난 13일 국회에서 열린 대통령 후보-당대표-상임고문단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사진=이승환 기자


[김세형 칼럼]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대선후보가 된 10월 10일 "좌파정책으로 대공황을 이겨낸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배우겠다"고 연설했고, 16일 국회에서 여당과 상견례에서는 "루스벨트 대통령을 존경한다. 대공황 당시 소득세·법인세율을 92%까지 올렸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복지, 실업, 일자리, 세금 정책을 만들면서 미국의 50년 호황을 만들었다"고 역설했다.

국민이 더불어민주당에 압도적 다수 의석을 몰아준 것은 개혁하란 뜻이라며 루스벨트는 공산주의적 사회주의적 강력한 정책으로 성공했는데 자신이 당선하면 다수 의석을 빌려 그런 정책을 몰아붙일 것 같은 뉘앙스를 풍겼다.

이재명 지사는 개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곧잘 루스벨트의 성공 치적을 예로 드는데 기자들이 공부가 부족한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앞으로도 계속 써먹을 것 같다.

이재명 지사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업적을 제대로 연구하고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80~90여 년 전 대공황이란 특수 상황에서의 정책이 현시점에도 응용될 수 있는 것인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미국의 50년간 성공의 토대를 루스벨트가 닦았다는 게 이 지사의 후렴구이므로 집중해서 보기로 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재임(1933년 3월 4일~1945년 4월 12일)은 대공황, 2차대전이라는 국가적 비상 시기에 4선(選)을 하는 바람에 가장 길다(그 후 미 의회는 2선 이상 못하도록 수정헌법을 개정했다).

그의 재임 기간 첫 8년은 대공황과 싸웠고, 이후 2차대전의 전시(戰時)에는 자유진영의 승리를 위해 싸웠다.

2차대전 후에는 경제도 살아나고 미국이 절대적인 승자가 됐으므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치적은 미국에서 링컨(1위)에 이어 초대 조지 워싱턴과 더불어 2, 3위를 다툰다.

이런 루스벨트를 문재인 대통령도 뉴딜이란 명칭으로 정책을 도입하고, 이재명 후보도 배우겠다니 성공수표쯤으로 통과다.

결론부터 말하면 대공황과 싸운 첫 8년간 루스벨트의 성적표는 앨런 그린스펀이 '미국 자본주의'라는 역저에서 '대실패'로 판정했다.

좌파정책이 대공황을 이겨냈다는 이재명 후보의 진단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노조를 부추겨 표를 얻고, 소련을 방불케 하는 국가 주도 경제 운용, 대기업을 적대시해 8년 동안 두 번의 공황(두 번째는 1937~1938년)이 엄습했고 '루스벨트 불황'이란 낙인이 찍혔다.

이재명 후보는 루스벨트정책에서 배우겠다는데 대공황 때 무슨 정책을 폈는가.

루스벨트는 취임 다음날 행정명령으로 모든 은행의 영업을 중단시켰다.

당시 예금보호 장치가 없어 고객이 불안해해 예금 인출이 속출해 은행 파산이 너무 심각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가 은행예금 100%를 보호하는 긴급은행법을 통과시키자 장롱 속에 숨겨뒀던 돈이 은행으로 되돌아왔다.

전임 후버 대통령이 얼마나 무능했는지 알 수 있게 한 대목이다. 연방예금보험공사, 증권거래위원회를 새로 만들어 금융시장을 급속 안정시켰다.

루스벨트는 성격이 밝았다. 매일 라디오 연설 15분 동안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무슨 일에나 통하는 방법이 있으며 도전하면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첫 100일 동안 청년 25만명을 고용해 공공일자리를 줬고 테네시계곡 개발공사 같은 공공사업을 펼쳤다. 여기까진 국민이 환호했다.

취임 100일이 경과한 후 루스벨트가 들고나온 첫 정책은 '국가산업재건(부흥)법'으로 여기에서 급진 노조 결성권, 파업권을 부여하고 국가재건청, 공공사업청을 설립했다.

이 법의 목적은 잉여생산을 없애려는 것으로 전체 기업 77%를 가입시켜 국가 전체 생산량, 가격, 임금을 통제했다.

가입 기업엔 푸른독수리 휘장을 주고 거부 기업엔 국가가 세무조사를 하여 복수하는 이상한 짓을 시작한다.

곧이어 '농업조정법'을 제정해 농산물 생산, 가격을 통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생산량을 통제해 농산물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농사를 안 짓는 농부에게 높은 보조금을 주고 불황 속 미국인 전체는 영양실조에 허덕였다.

뉴딜(New deal)이란 용어가 '잊힌 사람들' 약자를 보호하는 사고에서 따온 것이고 정책도 그런 쪽에 비중을 둔 것이었다.

연방대법원은 2년 후인 1935년 국가재건법, 농업조정법 둘 다 위헌 판결을 했고, 화가 난 루스벨트는 대법원을 개조해야 한다고 펄펄 뛰었다.

여론은 "루스벨트에게 독재 성향이 보인다"는 비판과 더불어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의석을 크게 잃었고 현재도 이 부분은 평가가 안 좋다.

1935년 사회보장법을 도입해 정부와 국민 간의 관계를 영구적으로 바꿔놨다.

미국인 의식에 큰정부를 각인시킨 대통령 하면 루스벨트다.

노조 권한을 강화해놨던 국가재건법이 위헌 판결을 받자 '와그너법'을 제정해 다시 노조에 엄청난 혜택을 부여했다(루스벨트 타계 후 1947년 태프트-하틀리법으로 노조 가입 의무화를 폐지하고 노조 지도부는 공산주의가 아님을 맹세토록 했다).

1936년 재선 캠페인에서 루스벨트는 "기업의 탐욕스러운 이기심을 무찔러 국민을 노예 상태에서 구제하겠다"고 역설하자 국민은 그의 포퓰리즘을 환호하며 노조 등에서 압도적인 표를 몰아줘서 대승에 성공했다.

반짝 살아났던 경제는 이런 무리한 정책들 도입으로 1933년 5월부터 다시 가라앉았고 1937년 5월 이후 13개월 동안 2차 공황이 내습했다.

뉴딜정책의 성적표를 보면 1939년 실업률 17.2%, 실업자 948만명이었고 미국에 이민 온 사람보다 다시 이민을 떠난 사람 숫자가 많았다.

루스벨트 재임 8년간 성적표는 후버 말기의 실업률 16.3%(802만명)보다 더 악화됐다. 요컨대 루스벨트의 정책은 대공황 극복에 완전 실패한 것이다.

이재명 지사가 배울 것이 있다며 예로 든 공산주의, 사회주의적 정책은 국가산업재건법, 농업조정법 등을 가리키는 것 같다.

소련의 신경제정책을 방불케 하는 국가 주도의 정책 전개에 우파들은 루스벨트 이름 앞에 '스탈린 델러노어'를 갖다붙였다.

와그너법은 미국 기업들을 위협해 태프트-하틀리법으로 교체됐고 국가재건법, 철도연금법, 농업조정법은 위헌 판결을 받았다.

결국 루스벨트 1기 정책은 철저하게 패배했으며 국민을 더 고통 속으로 몰아넣어 전혀 배울 게 못 된다는 결론이다.

1940년에 3선에 성공한 루스벨트를 살린 것은 2차대전이었다.

1941년 진주만 폭격으로 2차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무기 생산에 제조업체 총동원령을 내렸다.

대기업들은 "실비 정산과 노조파업 금지를 해주지 않으면 협조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루스벨트는 항복(?) 했다. 노조들에 무파업 서약서를 받아냈다.

2차대전 이전 GDP에서 정부지출 비중이 1.5%였던 것이 1944년에는 36%까지 치솟았고 33대 기업이 군수품의 절반 이상을 담당했다. 대공황 때 실업은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

비행기 선박 탱크 총 등을 만드는데 미국 기업의 생산성이 독일의 2배, 일본의 5배에 달했다.

헨리 J 카이저, 헨리 포드 같은 영웅적인 기업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쟁 후 산출량을 보니 미국의 자동차 생산은 전 세계의 80%, 철강은 57%, 석유화학은 62%로 전 세계에서 펄펄 날았다.

루스벨트는 독서를 많이 하고 하버드 출신답게 깊은 사고로 자신의 철학이 틀렸으면 정반대의 길도 서슴없이 가는 인물이었다.

2차대전 중에 평시정책을 180도 반대로 하는 유연성이 미국과 자신을 살렸다.

그는 그전 탈원전을 했더라도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바로 고쳤을 인물이었다.

루스벨트는 1945년 3월 1일 독일이 곧 항복하면 그 후 일본멸망 계획과 세계 질서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 얄타회담을 마치고 돌아와 4월 12일 조지아 웜스프링스 별장에서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프다"고 말한 후 한때 애인이었던 루시 러더퍼드가 지켜본 가운데 2시간 후 돌연 사망했다.

미국이 오늘날 세계 1등의 위치를 확고히 굳힌 비결은 루스벨트가 2차대전 중 대기업을 경쟁시키고 기술을 중시한 정책으로 선회하여 막강 제조업을 키운 게 시초였다. 원자폭탄 개발 경쟁에서 처음엔 영국, 독일이 앞서 나갔으나 루스벨트는 유럽에서 히틀러를 피해 이민온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기술자들의 두뇌를 모아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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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인 이재명 경기지사가 18일 경기도청에서 열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경기도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 /사진=한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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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후보는 루스벨트가 미국의 50년 성공 기틀을 닦았다는데 진실은 트루먼(민주)과 아이젠하워(공화) 후임 두 대통령이 방향을 잘 잡은 데 있다.

앨런 그린스펀은 역저 '미국 자본주의'에서 2차대전 후 미국의 성공은 3가지 이유 때문으로 분석했다.

첫째, 유럽이 사회주의에 경도된 정책으로 돌았으나 미국은 사회주의를 뿌리치고 철저히 지유시장경제로 갔다.

둘째, 글로벌 경제를 중시하여 마셜플랜 같은 적극 정책으로 독일 일본 등 패배한 국가들에도 원조금을 줘서 경제가 살아나게 해 미국 생산품의 수출 시장을 크게 키웠다. 그 결과 미국 대기업이 해외 진출, 수백만 개 일자리 창출을 이뤄냈다.

셋째, 기술력이 곧 국가안보라는 관점으로 버니바 부시 등의 기초과학 증강 정책을 강화시켰다. 미국은 1943~1969년 사이 노벨물리학상 21개를 따냈다.

버니바 부시로 하여금 과학연구개발국(OSRD)을 창설케해 기술 개발을 이끌었다.

특히 이민정책을 통해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유럽의 두뇌를 유치하는 데 성공한 게 크게 기여했다.

이재명은 루스벨트를 존경한다, 국민이 민주당에 압도적인 의석을 줘서 개혁하라고 했는데 루스벨트 시절 소득·법인세를 95%나 올려 50년간 국가 발전의 기틀을 닦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본 칼럼에서 살펴보았듯 루스벨트 첫 8년간은 공황의 연속이었고, 2차대전 이후 후임 대통령들의 각성으로 미국은 1973년까지 호황을 누렸다.

그 이후는 2차 오일쇼크, 월남전 패배 등의 후유증으로 세계 경제 1등 위치를 일본에 빼앗길 정도로 휘청거렸다.

2차대전 이후 50년간 호황이라는 이재명의 진단 역시 틀렸다는 얘기다.

그렇게 된 배경은 소득·법인세 등을 너무 장기간 높게 과세해 국제 경쟁력이 떨어진 데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

미국 소득세는 20세기 초 10% 수준이던 것이 1차대전 때 70%까지 올라갔다가 대공황 초기 1930년대에 다시 25%로 하락했다.

2차대전 전비 마련을 위해 1944년 94%까지 올렸는데 그 시점은 루스벨트 사망 후였다.

1960년대 초반까지 20년 까까이 소득세율 92%를 유지하다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이 38.5%로 낮췄고 현재 37%로 다시는 40%를 넘긴 적이 없다.

그에 비하면 한국은 5억원 초과 42%, 10억원 초과 45%이고 여기에 10% 지방소득세가 추가로 붙어 최고 49.5%로 미국보다 압도적으로 높다.

미국의 법인세는 2차대전 후 70%까지 올렸던 것을 레이건이 35%로 낮췄고, 전임 트럼프가 21%로 낮춰놨는데 한국은 22%에서 문재인정부가 25%로 높여 미국보다 4%포인트 높다.

글로벌 경쟁 시대에는 소득, 법인세율은 중요한 경쟁력 변수이며 기업 진출 자본이동의 결정적 변수가 된다.

이재명은 소득·법인세 92%를 대단히 부러운 것처럼 말하는데, 그러면 왜 오늘날 미국의 법인세, 소득세는 한국보다 낮은가?

이재명 후보는 그 이치를 설명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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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 대통령 기념관 방문한 문대통령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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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후보는 거의 한 세기 전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배우겠다는데 유독 문재인정부에 이어 한국에서만 루스벨트 붐이 있는 것 같다.

이 글에서 분석한 대로 루스벨트에게 현재 한국이 배울 것은 2차대전 중 기업가정신을 높게 장려한 것 정도 외에는 없다.

한국 정치지도자들이 배울 게 있다면 밝은 기운, 국민과의 소통, 잘못된 정책은 180도로 바꿀 줄 아는 용기로 이 글에서 파악했을 것이다.

루스벨트가 노조에 너무 기울었던 것은 10년 이상 미국을 어렵게 했다.

공교롭게도 문재인정부는 민노총과 공동정권일 정도로 특혜를 베풀었고, 현재 한국 경쟁력에 큰 짐이 돼 있다.

이재명의 후보 수락연설을 보면 재벌 언론 등 13개 분야의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하면서도 노조 분야에 대해선 한마디 언급조차 없다.

폴 존슨이 쓴 '미국인의 역사'를 보면 루스벨트는 거짓말의 명수, 속마음 감추기, 그리고 상대를 가리지 않는 난봉꾼 기질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 지도자들이 이런 기질을 부러워하진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재명 후보는 루스벨트의 무슨 면을 존경하고 뭘 배우겠다는 것인지 직접 말해줄 차례다.

[김세형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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