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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전범선의 풀무질] 에고냐 에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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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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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선ㅣ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1976년 <소유냐 존재냐>에서 마음 혁명을 주장했다. “사상 최초로 인류의 육체적 생존 자체가 인간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에 달렸다.” 대뇌 피질의 용량을 십분 활용하여 생태 재앙으로 돌진하는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지성이 아닌 영성이었다. 프롬은 자기가 세계와 관계 맺는 양식을 소유와 존재로 나누고, 소유가 인류를 자멸로 이끈다고 경고했다. 지금, 여기, 온전히 존재하는 것이 중요했다.

인류세 절멸의 초읽기에 들어간 오늘, 프롬의 화두는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기후생태위기는 예언이 아닌 현실이다. 문명의 존속이 의식 혁명에 달렸다. 갖기 위한 사회를, 살기 위한 사회로 고쳐야 한다. 그런데 생명을 생각하면 화두부터 바꿔야 한다. ‘소유냐 존재냐’의 주어는 ‘나’다. 휴머니스트였던 프롬에게 주체는 당연히 인간이었다. 포스트휴먼 시대, 우리는 이처럼 인간중심적인 질문 자체가 오류라는 것을 안다. 참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를 앞세우는 관념부터 재고해야 한다.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론이 필요하다.

‘에고냐 에코냐?’ 에고(ego)는 라틴어로 ‘나’다.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나와 남의 경계를 나누었다.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규정했다. 중세까지 에고는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나머지는 귀족의 소유물에 불과했다. 노비는 에고가 없다. 일단 스스로 주인이 되어야 세상을 가질 수 있다. 에고는 소유의 필요조건이다. 따라서 근대 이전에는 에고로서 존재하는 이가 많지 않았다. 세상을 다 가지려는 자는 귀족밖에 없었다.

자본주의와 함께 부르주아 윤리가 득세하면서 에고도 보급됐다. 기계를 노비로 삼은 현대인은 모두가 에고로서 존재한다. 누구나 주인이며 주체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비인간 존재를 소유할 권리가 있다. 내가 남을 갖는 것이 경제 발전이며 역사 진보다. 에고의 총량이 비대해질수록 도시는 팽창하고 생태는 파괴된다. 지난 21일 대한민국은 누리호를 발사했다. 지구를 망쳐놓고 우주를 가지려 한다.

에고로서의 존재는 외롭다. 자기와 세계, 나와 남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끝없이 소유하여 스스로 채우려 한다. 하지만 아무리 많이 가져도 부족하다. 세상은 여전히 내 것이 아니다. 자기중심의 삶은 외로운 만큼 괴롭다. 불행과 불만의 굴레에서 지친다. 지속 가능하고 회복력 있는 사회를 위해 우리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 에고가 아닌 에코로 존재해야 한다.

에코(eco)는 그리스어로 ‘집’인 ‘오이코스’에서 유래했다. ‘이콜로지’(ecology·생태)와 ‘이코노미’(economy·경제)에 쓰인다. 이콜로지는 우리 모두의 유일한 집, 지구로서 사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쳤다. 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아론이 아니다. 나만 존엄하다는 이기주의도 아니다. 내가 곧 우주이며 우주가 곧 나라는 것이다. 모두가 부처다.

에코로서의 존재는 나와 남의 경계가 없다. 숲에서 나무와 버섯이 어울려 사는 방식이다. 개체와 전체가 구분 없이 하나로 존재한다. 전체주의가 소수의 머리를 위해 다수의 손발이 봉사하는 초개체라면, 생태주의는 모두가 주체이자 객체로서 연결된 그물망이다. 전자는 철저히 영장류적인 사고방식이다. 위에 있는 머리가 중심이며 아래에 있는 나머지는 거들 뿐이다. 반면 숲에는 우두머리가 없다. 뿌리가 열매에 종속되지 않는다. 인간도 그리 존재해야 한다. 주객과 위아래 없는 네트워크로서 서로 돕고 돌보며 살아야 한다.

이코노미의 정확한 번역은 살림이다. 집안 살림 하듯이 나라 살림을 하면 무한 성장의 신화에 목매지 않을 것이다. 살림의 목적은 소유도 성장도 아니다. 말 그대로 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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