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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노동선진국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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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수업 중 생긴 트라우마도 있었다. 선생님은 요트에 타는 고객 응대업무를 하는 현장실습이라고 했다. 그날도 평소처럼 일찍 출근했다. 그날, 사장님은 요트 밑바닥에 붙어 있는 따개비를 제거하는 일을 지시했다. 바다에 잠수한 채 7t짜리 요트 아래에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18세 미만에, 현장실습계약에도 없을뿐더러, 잠수 관련 자격증도 경험도 없는 학생에게 시켜선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알지 못했다. 현장실습의 하나라고만 생각했다. 12㎏짜리 납 벨트를 매달고 바다로 들어갔다. 작업 도중 위급 상황이 생겼지만, 무거운 납 때문에 물 위로 나올 수가 없었다. 홀로 30~40분 사투를 벌이는 동안 물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2인 1조로 잠수한다는 안전수칙도 무의미했다.

경향신문

이주영 정책사회부장


이보다 약 열흘 전 인천 송도의 고층 아파트. 20대 노동자가 49층짜리 아파트 유리창을 닦기 위해 작업용 밧줄을 몸에 걸고 외벽에 매달렸다. 건물 유리벽 청소 경력 5년차. 이 현장에 출근한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49층 옥상에서 시작해 2시간쯤 청소를 하며 내려오던 중이었다. 15층 높이에서, 몸이 유일하게 의지하던 밧줄이 끊겼다. 아파트 외벽 간판 모서리에 밧줄이 계속 쓸리다 끊긴 것이다. 밧줄 절단 방지를 위해 간판 모서리와 밧줄 사이에 설치했어야 할 보호대는 없었다. 작업용 밧줄이 끊어졌을 때를 대비해 추가 설치해야 하는 구명줄 역시 없었다. 구명줄을 설치하면 걸리적거려 작업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그랬다는 해명이 추후 나왔다. 40m 아래 지상으로 떨어진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일어나지 못했다.

청년 노동자들이 계속 죽고 있다. 지하철역 스크린도어에서, 공장에서, 화력발전소에서, 컨테이너 야적장에서, 고층 아파트에서, 요트장에서 생을 마감하고 있다. 이들의 죽음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늘 예고된 참사다. 현장에선 노동자의 안전보다 속도와 효율이, 생명·인권보다 자본의 논리가 앞섰다. 4년 전 제주 특성화고 현장실습생 사망사고 이후 정부가 내놨던 제도 개선책은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개선책을 다시 개선하면 달라질까. 취업률 끌어올리기에 급급한 학교는 현장실습 업체의 열악한 환경을 알고도 안전 규정과 지침이 제대로 지켜지는지에 대해선 무관심했다. 정당한 비용을 내고 전문 잠수부를 고용해 처리해야 할 작업을 최저임금 이하의 현장실습생에게 맡긴 사업주에겐 산업안전보건법도, 근로기준법도, 현장실습표준협약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법과 절차를 어겨도 제대로 된 처벌은 없다. 5인 미만 사업장은 사람이 죽어도 중대재해를 처벌하는 법망을 피할 수 있다.

억울한 죽음이 반복되고 있지만 정부는 기업에 책임을 떠넘긴 채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법과 제도가 있어도 지키지 않는 기업과 학교, 자신들이 만든 법과 제도가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는지엔 무관심한 정부와 정치권이 청년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이는 외줄에 몸을 의지한 채, 혼자 무거운 납 벨트를 매단 채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작업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더 이상 억울한 죽음은 없어야 한다”고 외치는 추모집회가 각지에서 이어지지만 내년 대선을 앞둔 선거판에서 노동 이슈는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대장동 의혹 블랙홀’이 모든 이슈를 집어삼킨 채 상대를 향해 서로 “감옥 갈 사람”이라는 힐난과 ‘주술 정치’ ‘조폭 연루설’ ‘개 사과’ 등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만 쏟아지고 있다. 비정규직도, 현장실습생도, 중대재해도 없는 선거판을 바라보는 유족들의 심경은 비애와 분노를 넘어 황량하고 어두운 벌판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리라. 여야 대선 주자 중 여수 현장실습생 사고 현장을 찾은 이는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유일하다. ‘노동존중 사회’를 약속했던 문재인 정부가 지난 4년여간 얼마나 충실히 이행했는지 역시 의문이다. 현 정부 들어서도 매년 800~9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산업재해 사고로 사망했다.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이 국제노동기구(ILO) 차기 사무총장직에 입후보하자 정부는 “노동선진국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 법과 제도가 무시된 노동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사회가 노동선진국인가. 한국인 최초의 ILO 사무총장을 배출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것은 노동기본권을 강화하고 근로감독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일이다. 사람 목숨보다 이윤이 먼저인 사회 구조와 인식을 바꾸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순 없다.

이주영 정책사회부장 young78@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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