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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보험금 4400만원 반납? '식물인간' 눈물 닦아준 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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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추적]

중앙일보

A씨는 2018년 12월 13일 서울 구로구 한 도로에서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 1차로로 진입하던 중 택시 좌측 앞부분과 충돌했다. 사진 속 동그라미는 자전거를 타고있는 A씨. 사진 한문철 변호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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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 12월 13일 A씨(당시 77세)는 꼭두새벽에 집을 나섰다. 몸살을 앓는 아내를 대신해 청소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집에서 800m 남짓 떨어진 서울 구로구 한 건물을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청소하는 일이었다.

아내 대신 땀을 흘린 A씨가 다시 건물 밖으로 나온 시간은 오전 5시 30분쯤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도로 한편에서 역방향으로 달리던 그는 점차 중앙선 쪽으로 다가섰다. 이어 버스가 지나간 뒤 비스듬히 횡단해 반대편 1차로로 진입했다. 그러나 중앙선 너머 반대편 2차로에서 1차로로 들어서는 택시와 충돌했다. 택시는 경미하게 손상됐지만, A씨는 두개골 골절 등 상해를 입었다.

A씨는 사실상 ‘식물인간’ 상태가 됐다. 거동은커녕 대화도 어려웠다. 막대한 치료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택시기사 측 보험회사는 보험금 지급을 거부했다. 중앙선을 침범한 A씨에게 사고 책임이 있단 이유에서다. A씨 가족이 기댈 곳은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뿐이었다. 다행히 건보공단이 보험금을 지급하면서 위기를 넘기는 듯했다.



보험급여 4400만원 환수한 건보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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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현장약도. 서울행정법원


하지만 갑자기 상황이 달라졌다. 2019년 8월 건보공단이 A씨가 받은 보험급여 4400여만원을 부당이득금으로 환수하는 처분을 한 것이다. “교통사고가 A씨의 중앙선 침범이라는 중대한 과실로 발생했다”는 이유였다. 이의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A씨 가족은 어쩔 수 없이 소송을 시작했다. “택시기사의 전방주시 태만 또는 안전운전의무 위반이 사고의 주된 원인이고 A씨의 과실이 보험급여 제한사유에 해당할 정도의 고의나 중대한 과실이 아니다”라는 게 A씨 측 주장이었다.

지난 3월 서울행정법원은 A씨 가족의 부당이득금징수처분취소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주의를 태만히 한 채 중앙선을 침범한 A씨의 중대한 과실이 인정된다고 봤다. ▶택시기사가 중앙선을 침범하는 A씨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는 점 ▶어두운색 옷을 입어 식별이 어려운데도 A씨가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건보공단 처분이 재량 범위 내에서 적법하게 이뤄졌다는 게 1심 재판부 판단이었다.



“중대한 과실 아니다” 1심 뒤집은 2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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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등법원 청사 전경. 사진 서울고법 홈페이지


A씨 가족은 항소했고, 절망 끝에 희망이 찾아왔다. 2심 재판부는 1심 판결을 뒤집고 A씨 측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고법 11행정부(부장 배준현)는 지난 20일 건보공단이 A씨에 내린 부당이익금 환수처분을 취소한다고 판결했다. “교통사고가 A씨의 중대한 과실로 인한 범죄행위가 아니므로 보험급여 제한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취지다.

재판장은 국민건강보험제도가 국민에게 제공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인 점도 언급했다. 이를 토대로 “국민건강보험급여 제한사유 중 ‘중대한 과실’이란 요건은 되도록 엄격하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사고가 전적으로 당사자의 과실로 인해 일어났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면 되도록 건강보험급여를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A씨가 고령으로 돌발상황에 대비하거나 시야 확보 능력이 낮았을 것으로 보이는 점 ▶A씨가 상대 차량의 진행방향으로 비스듬히 횡단해 반대편 1차로 정방향에 가까운 진로로 진입한 점 ▶A씨의 움직임과 운행경로를 종합해 볼 때 실질적으로 보행자와 유사한 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사고 당시 택시가 제한속도인 시속 30㎞로 달렸다면 산술적으로 사고를 회피할 수도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 점 ▶A씨가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이나 도로교통법을 위반한 ‘범죄행위’를 저지르지 않은 점 등을 토대로 A씨가 보험급여 제한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한문철 교통사고 전문 변호사는 “과거 교통사고에서 본인 과실이 클 경우 건강보험급여 일부를 환수해야 한다는 판결이 있었다. 그러나 올해 초 대법원에서 이를 바로 잡았다”며 “이번 경우도 같은 맥락에서 일부러 사고를 내거나 그와 같게 평가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최대한 건강보험급여를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심석용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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