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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아침햇발] ‘빚 권하는 사회’의 종착역 / 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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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6일 오전 서울 명동 포스트타워에서 열린 ‘제6회 금융의 날’ 기념식이 끝난 뒤 고승범 금융위원장이 기자들의 ‘가계부채 관리 강화방안’ 관련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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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 논설위원

최근 지인 모임에 갔다가 내심 놀랐다. 6명 중에 3명이 공모주 투자를 하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하거나 아니면 배우자가 하고 있었다. 명색이 경제 담당 기자인 나보다도 유망 종목이며 청약 방식을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그런데 더 놀란 건 2명이 신용대출로 청약자금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었다. 신용대출로 며칠 빌려서 청약하고 바로 상환한다는 거였다. 이렇게 손쉽게 몇십만원 벌 수 있는데 이런 기회를 활용하지 않으면 바보 아니냐고 했다.

두달 전에는 수도권의 한 공인중개사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주변에 신용대출까지 모두 끌어다가 아파트를 산 사람이 많다고 했다. 이른바 ‘영끌’이다. 대부분 대출 한도가 꽉 차 있다면서, 자신도 그렇게 아파트 2채를 샀다고 했다.

요즘 주변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굳이 이런 경험을 얘기하는 건, 우리 사회가 지금 ‘빚투’의 꼭짓점에 와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다. 지금 분위기는 2003년 신용카드 사태 직전 시기를 떠올리게 한다. 정부가 경기 부양 목적으로 1999~2000년 카드 현금서비스 한도(월 70만원)를 폐지하고, 심지어 길거리 회원 모집까지 허용했다. 소득이 없는 대학생도 손쉽게 카드를 만들 수 있었고, 2~3년 새 카드 현금 대출은 7배나 폭증했다. 지금은 길거리까지 나가지 않아도 된다. 집에서 스마트폰 몇번 터치하면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카뱅·케뱅 등 인터넷전문은행이 몇년 전 이 시장을 열자 시중은행까지 뒤질세라 디지털 대출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대출받는 데 3분이면 족하다. 이런 신세계가 따로 없다.

빚내기가 쉬워지자 너도나도 빚투에 나섰다. 주 대상은 주식·부동산·가상자산이다. 이게 벌써 몇년째 이어지고 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주식과 가상자산은 이미 꼭짓점 찍기를 몇차례 반복하고 있다. 거품이 터지는 징후다. 그런데 부동산 가격은 아직도 오르고 있다. 정말로 부동산 가격은 계속 오르기만 할까.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금융위기에 관한 세계적 권위자인 찰스 킨들버거 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17세기 네덜란드 튤립 투기부터 20세기 말 일본 부동산 거품, 미국 닷컴 거품까지 수많은 자산 가격 거품과 붕괴 역사를 연구한 뒤 ‘자산 가격의 거품은 신용(융자)의 증가에 달려 있다’는 일종의 공리를 발견했다. 그는 저서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에서 사람들이 미친 듯이 부동산·주식 등에 투자하는 광기가 발생할 때는 항상 신용 공급의 팽창을 동반했으며, 이때 돈은 언제나 공짜처럼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투기자들이 ‘이보다 더 좋은 적은 없다’며 풍요로움에 젖어 있을 때 정부 정책의 변화나 대기업·금융회사 파산 같은 대내외 충격이 발생하면서 자산 가격의 상승은 멈추고 결국 거품은 터진다고 했다.

금융당국이 26일 비교적 강도 높은 가계부채 관리 강화 방안을 내놓은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가계부채 문제가 너무나 커져버려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을 지우기 어렵다. 지금의 상황은 금융당국에도 책임이 있다. 예컨대, 2017년 출범한 인터넷전문은행의 경우를 보자. 금융위원회는 중금리 대출 같은 기존 은행과 차별화한 서비스를 활성화하겠다면서 인터넷전문은행을 허용했다. 그러나 이 은행들은 중금리 대출은 찔끔 늘리는 데 그치고, 대신에 고신용자를 대상으로 한 신용대출 장사에 몰두했다. 결과적으로 신용대출 팽창의 일등공신이 됐다. 이 은행의 도입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상환 능력 범위 내’ 대출 관행을 정착시키면서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금융당국이 ‘빚 권하는 사회’를 방치 내지는 조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계부채 문제는 해법을 찾기가 매우 어려운 과제다. 위기를 맞은 다음에야 비로소 부채 재조정이 이뤄지는 게 대부분이다. 최선의 시나리오는 앞으로 10여년간 가계대출 증가율을 경제성장률 내외로 관리하고, 그동안 채무자들이 빚 부담을 감당 가능한 수준으로 낮추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연착륙이 가능하려면 그사이에 대내외 충격이 없어야 한다. 문제는 지금 공급망 충격에다 에너지 위기, 인플레 조짐까지 보여 세계 경제가 언제 경착륙할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예기치 않은 위기가 닥칠 경우 누적된 가계부채 문제는 폭발할 개연성이 매우 높다. 이런 비관적인 ‘종착역’에 이르기 전에 지금부터라도 안전띠를 단단히 매야 한다.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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