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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유레카] 샅바 싸움 / 이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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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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샅바는 씨름할 때 허리와 넓적다리에 고리모양으로 두르는 헝겊이다. 힘을 전달하는 지탱점 구실을 하기 때문에 상대 샅바는 바투 잡고, 내 샅바는 최대한 느슨하게 잡히는 게 유리하다. 민속씨름 출범 초창기만 해도 제한 시간이 5분인 본경기보다 샅바를 잡는 데 4~5배 긴 시간을 소모하는 경우가 잦았다. 1984년 3월 천하장사대회에서 우승한 장지영은 홍현욱과의 8강전에서 잡았던 샅바를 스무 차례나 놓아버리는 신경전 끝에 승리했다. 관중석에선 환호 대신 야유가 쏟아졌다. ‘샅바싸움을 방치하면 씨름 인기도 얼마 못 가 사그라들 것’이란 언론의 질타가 이어졌다.

씨름판의 샅바싸움은 공인 샅바가 도입되고 관련 규칙이 정비되면서 사라졌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개헌과 민주화 일정을 놓고 여야 대립이 격화되면서 샅바싸움은 ‘본격 대결에 앞서 상대의 기세를 누르려고 벌이는 심리전’을 일컫는 정치 용어로 의미가 확장됐다. 2000년대 들어 공직 후보자를 뽑는 정당 내부 경선이 활성화되자 그 용례는 한층 구체화된다. 경선에 앞서 당내 예비 후보끼리 벌이는 ‘룰 싸움’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싸움의 단골 이슈는 선거인단 조합 비율, 여론조사 문항이었다.

당의 대선 후보 선출을 앞두고 국민의힘 대선 주자들이 벌여온 샅바싸움이 26일 일단락됐다. 당 선거관리위원회가 경선 여론조사 문항을 “가상대결을 전제로 해서 질문하고 본선 경쟁력을 묻는 방식”으로 결정한 것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의 일대일 가상대결 득표율을 비교하는 방식이 아닌, 4명 가운데 경쟁력이 가장 높은 후보가 누구인지를 묻는 방식에 가깝다고 한다. 지난 3월 오세훈-안철수 단일화 여론조사 방식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승부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기울기를 바라는 절박감은 씨름 선수나 정치인이 매한가지다. 그러나 씨름판과 정치판은 승부의 결정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정치판에서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건 관객들이 던지는 표다. 샅바싸움이 길어질수록 지켜보는 관객의 실망과 피로감은 커지기 마련이다. 결과만 두고 보면 윤석열 후보 쪽이 손해를 본 모양새가 됐지만, 합의 시한(26일)을 넘기지 않고 경선 규칙 협상을 타결한 것은 모두에게 합리적인 선택이다.

이세영 논설위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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