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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노태우 사망] ‘보통사람 시대’ 연 87년 직선제 첫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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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저득표율로 대통령 당선… ‘물태우’·‘보통사람’ 별명

남다른 외교정책으로 대한민국 외교지평 넓힌 점 인정

12·12로 친구 전두환과 함께 수의… 말년 병상에서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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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숨졌다. 사진은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 부인 김옥숙 여사와 함께 참석한 노태우 전 대통령.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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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홍석희 기자] 대한민국 13대 대통령(1988년~1993년)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의 1987년 선거 캐치프레이즈는 ‘보통사람’ 이었다. 군부 내 사조직이었던 ‘하나회’의 멤버이자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구기도 했던 노 전 대통령은 자신에게 씌워져 있던 ‘군(軍) 출신’ 이미지를 벗기 위해 ‘보통사람’을 내세웠다. ‘나 이사람, 보통사람 믿어주세요’는 1987년 대선 당시 아이들도 따라할 정도의 전국적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6·10 민주항쟁 이후 6·29 특별선언을 읽었던 당사자로,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야권의 김대중-김영삼 두 후보의 표가 갈라지며 ‘어부 지리’로 대통령이 됐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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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29일 ‘6·29 선언’을 읽고 있는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6·29 선언’ 발표자… 대통령 되다= 1987년은 대한민국 근대사 가운데 가장 뜨거웠던 한해다. 새해 벽두였던 1월 14일 서울대학교에 재학중이던 박종철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사망했다. 그 유명한 ‘책상을 탁치니 억하며 죽었다’는 발표가 나온 뒤 전국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들이 넘쳐났다. 4월 13일 전두환 정권은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으나, 야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4월),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5월) 등을 기화로 6월 10일 전국적인 시위가 일어났고, 이를 수습할 대책으로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6·29 선언을 대독했다.

민주화를 위한 열망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해낸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13대 대통령 투표율에서도 증명된다. 당시 대통령 투표율은 89.2%로 건강에 문제가 있는 사례가 아니면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이 대선에 참가해 다시 얻어낸 ‘대통령 투표권’을 행사했다. 문제는 야권의 분열이었다. 당시 야당이었던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가 동시에 출마해 결국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가 당선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현재까지도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역감정’의 원인 중 하나로 13대 대선 결과가 꼽힌다.

1987년 12월 16일 실시된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는 36.6%를 얻었고, 그 뒤로 김영삼(28.05), 김대중(27.0%), 김종필(8.1%) 순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정 사상 국민들이 직선을 통해 선출된 대통령 가운데 가장 낮은 득표율을 거두고 당선된 사례로도 꼽힌다. 여기엔 KAL기 폭파사건 등 선거일 직전 터진 중대사고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노태우 후보의 당선으로 사실상 5년의 군사 정부는 연장됐다는 비판도 나왔다. 이후 들어선 김영삼 정권은 스스로를 ‘문민정부’라 칭했다. 더이상 ‘군부정권’이 아니라는 것이 정권의 정체성이었던 셈이다.

노 전 대통령은 그러나 이전 군사정부와는 다소 결이 다른 정책들을 폈다. 여전히 노 전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도 적지 않지만 그가 폈던 북방외교 정책과 토지공개념 법률안,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등에 대해서만큼은 인정해야 한다는 분위기도 적지 않다.

노 전 대통령은 1991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시민단체들의 자방자치단제 부활 요구를 수용하여 지방자치제도를 부활시키기도 했고, 보수 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1991년 남북한 UN 동시 가입 결정을 강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1993년 퇴임 후 1995년 비자금 사건 등에 연루됐으며, 12·12 군사 반란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구속됐다.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김영삼 대통령 시절이던 지난 1997년 12월 22일에 특별사면을 받고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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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숨졌다. 사진은 1988년 제13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모습.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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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코미디 소재로 쓰라’=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주목받았던 것은 언론 자유 범위를 확대한 것이다. 가장 상징적인 것은 대통령을 코미디 소재로 활용해도 좋다고 한 것이다. 이는 그의 선거 공약이기도 했다. 실제로 개그맨 최양락은 80년대 시절 “여러가지 제약이 많았던 시절에는 유난히 금기용어들도 많았다”며 “대머리, 주걱턱이라는 단어는 물론 콩트 속 여자 역할에는 이순자 여사를 상기시키는 ‘순자’라는 이름도 함부로 쓸 수 없었다”고 말했다. 최양락은 시사풍자 개그였던 “‘네로25시’, ‘회장님회장님’ 코너가 가능했던 것이 노태우 덕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대선 선거 유세를 위해 광주를 방문했을 때 ‘광주 학살의 원흉’, ‘방조자의 한 사람’이라고 팻말을 든 항의 시위대가 나타나서 달걀과 밀가루 세례를 받았으나 노 전 대통령은 이를 ‘민주주의의 양념’이라며 관련자들의 처벌에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구체적인 정책 가운데엔 외교 정책에 대한 성과가 주로 거론된다. 2021년 한국의 최대 교역 대상국은 중국인데 적성국이었던 중국과의 첫 수교가 노 전 대통령 시절이던 1992년이다. 이외에도 노 전 대통령은 소련, 헝가리 등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를 맺었다. 이는 국제 외교 무대에서 미소 양국의 군축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과도 무관치 않다. 국내적으론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에 대해 보수층의 반발도 있었다.

북한과의 관계 개선 노력도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7 ·7선언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특별선언’에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제시됐다. 노 전 대통령은 남북한간의 적극적인 교류를 제의하고, 북한이 미국 및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키로 했다. 또 1990년 1월에는 북한에 고령이산가족 왕래 및 금강산 공동개발 등을 추진할 것을 제의했고, 북한이 이를 수락하면서 남북간의 대화분위기가 지속되기도 했다. 이산가족 상봉과 남북 자유 방문도 추진됐다.

노 전 대통령의 경제 정책 기조는 자유화와 개방화 확대로 노태우 정권 하에서 한국의 경제는 연평균 8.5%라는 고속성장을 달성했다. 1988년 수출은 600억 달러를 돌파했고, 1986년 대한민국은 대외교역사상 최초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한 이래 그 폭이 매년 확대됐다. 1989년 대한민국은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역전됐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는 여전히 역대 ‘가장 저평가된 정권’으로 남았다. 국회입법조사처가 2015년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노태우 정부는 정치·경제·외교에 대한 일반인 평가에서 역대 정권 중 최하점을 받았다. 한국대통령평가위원회가 학자 500명을 설문한 조사에서 노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4위를 차지했다. 대중 평가와 전문가 평가가 다른 것은 ‘상대적 저평가’로 해석된다. 나를 코미디 소재로 쓰라고 했던 노 전 대통령은 ‘물태우’와 ‘보통사람’을 유행어로 각인시킨 채 이날 영면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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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숨졌다. 사진은 1996년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의 모습.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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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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