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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행복이란 아름다운 문장…내게 글쓰기는 내적인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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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대담] 세계적 소설가 아룬다티 로이

박혜영 “한국인들에게 인도는 특별

영적 탐구여행 종착역쯤 여기기도

우리는 독재 대항 소중한 경험

그런데 현재 매우 불행하다 느껴

엄청난 빈부격차가 존재하고…”

로이 “‘지복의 성자’ 모든 캐릭터는

이름 바꾸는 등 경계적 정체성

당신은 많은 젊은 세대들이

그런 문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어”


한겨레

24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옥마을 게스트하우스에서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왼쪽)가 박혜영 인하대 교수와 대담에 앞서 사진을 찍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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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첫 소설 <작은 것들의 신>으로 영어권 최고 문학상인 부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 작가로 떠오른 인도 소설가 아룬다티 로이가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한겨레>는 제4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 수상자로 시상식에 참석하고자 방한한 로이와 단독 대담을 마련했다. 로이의 에세이 <9월이여, 오라>를 번역하기도 한 영문학자 박혜영 인하대 교수가 대담을 맡았다. 대담은 지난 24일 오후 로이가 머무는 서울 은평구 한옥마을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이루어졌다.

박혜영(이하 박) : 시대를 선도하는 작가이자 사회운동가이며, 지난해 이호철통일로문학상의 수상자인 아룬다티 로이를 이 자리에 모시게 되어 영광이다. 지금까지 로이는 부커상, 레넌 상, 시드니 평화상, 노먼 메일러 상 등 다수의 영예를 안았고, 지난해에도 드디어 이호철통일로문학상의 수상자가 되었다. 로이는 두 개의 주요 소설을 출판했는데, 첫 번째 소설은 1997년에 출판된 <작은 것들의 신>이고, 이 소설로 부커상을 받았다. 그로부터 20년 뒤, 두 번째 소설 <지복의 성자>를 2017년에 출판했다. 그 사이 로이는 정치, 세계화, 실향, 공공재의 사유화와 같은 주제들 다루는 많은 에세이를 냈다. 이렇듯 로이는 두 개의 다른 장르를 넘나들며 세계화, 자본주의, 환경파괴, 민족주의 등에 반대하는 공통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나는 오늘 인터뷰를 인도 내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한국인들에게 있어 인도는 특별한 나라인데, 어떤 한국인들은 인도를 그들의 영적인 탐구 여행에 있어 마지막 종착역 쯤으로 생각한다. 반면, 버스 안에서 남자 친구가 보는 앞에서 집단 성폭행을 당한 여대생 사건과 같이 전혀 다른 종류의 인도 또한 뉴스 기사 등을 통해 접하기도 한다. 이렇듯 인도는 모든 종류의 빛과 어둠이 매우 뒤섞인 혼돈과도 같다. 현재 인도의 코로나 확산 상황을 보자면, 이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직업, 가족,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다. 또한 많은 노동자들이 직업을 잃고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뉴델리와 같은 도심을 떠나 자신들이 살았던 시골이나 지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 모두가 모디 총리의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에게 준비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은) 봉쇄 정책 때문이었다. 이렇듯 인도에는 많은 문제가 있는 듯 보이는데, 그 당시 그리고 지금 현재 인도의 상황은 어떻다고 보는가?

아룬다티 로이(이하 로이) : 영적 감화 또는 마음의 평화를 위해 인도를 찾는다는 건 한국인들뿐 아니라 전세계에 퍼져있는 일종의 클리셰다.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인도의 혼돈이며 이것이 서구나 한국에서와 같은 방식으로는 제어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은 것들의 신>에서 감동적일 수 있는 지점은 인도의 영성(靈性)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다. 카스트제도는 힌두주의의 한 부분으로 매우 잔인한 형태의 사회 위계 관습이다. 이렇게 외부에서 찾고자 하는 그 영적인 내면은 실제 내부자들에게 있어선 매우 엄격한 사회적 위계라는 모순이 존재한다. 사실 인도는 폭력이 매우 빈번하게 발생하는 곳인데, 사람들이 간디나 비폭력을 많이 언급하는 까닭은 인도가 매우 폭력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카스트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선 많은 폭력이 필요하다. 여성을 가두기 위해서 폭력의 위협뿐 아니라 적용 등, 많은 폭력이 필요하다. 힌두의 봉건적 전통문화 안에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존재하는 한편으로, 현대화되어가는 여성들 또한 그에 대해 벌을 받고 있다. 이것이 현재 인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어쨌든 인도는 매우 모순이 많은 사회다. 당신이 말하는 인도의 영성은 힌두 민족주의를 만들어내기 위해 정치적으로 다져진 것이다.

나는 인도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당신이 알고 있는 인도가 어떤 건지 묻고 싶어진다. 인도는 과거의 소련연방과 비슷하다. 거기엔 많은 하위 민족이 있고, 28개의 공용어가 있고, 공용어가 되고자 하는 30개의 언어가 있고, 사용되는 방언이 3000개가 넘는다. 힌두라는 명칭은 그들 스스로가 붙인 이름이 아니다. 첫 번째로는 모굴(Mogul)에 의해, 나중엔 영국인들에 의해 사용된, 인더스강 동쪽 편에 사는 사람들을 수식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힌두인 스스로는 언제나 카스트제도로써 자신들을 설명할 것이다. 이렇듯 인도는 다양한 민족과 언어와 종교가 공존하는 곳이다. 그리고 힌두 민족주의 정부가 있다. 이런 나라에서 이 정부는 하나의 언어, 하나의 종교, 단일한 나라를 말하는데 이것은 마치 엄청나게 복잡한 사회에서 핵폭발을 일으키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마치 바다를 한 잔의 물 안에 담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이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자, 여기까지는 배경이다. 이제 팬데믹을 말해보자.

한겨레

24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옥마을 게스트하우스에서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가 박혜영 인하대 교수와 대담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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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팬데믹이 발발했을 때, 인도 정부는 관심도 없었다. 지난해 3월11일, 세계보건기구(WHO)가 공식적으로 팬데믹을 선포했을 때도, 인도 정부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당시 두 가지 사안이 동시에 진행 중이었는데, 그중 하나는 새로운 시민권법으로 이른바 반 무슬림 시민법이다. 이 시민권법에 따라 정부는 특정 서류를 시민들로 하여금 제출하게 했는데, 이러한 서류는 사실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이다. 이와 비슷했던 사례는 과거 독일의 나치밖에 없다. 나치의 뉘른베르크법은 특정 서류를 제출할 수 있느냐로 국가가 개인 한 사람이 시민일지 아닐지를 결정했는데, 새 시민권법이 바로 그러하다. 인도의 동북쪽 아삼(Assam)주에서 이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이로써 2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무국적자가 되었다. 이 때문에 2019년 후반부터 2020년에 시위가 많이 일어났다. 다른 나라들이 난민 수용을 고려하고 있을 때, 인도에서는 수백만명의 시민권을 빼앗아감으로써 무국적자를 양산하고 있었다. 그해 2월에 트럼프가 인도를 방문 중일 때 델리에선 무슬림 학살이 벌어졌다. 그가 돌아가고 난 뒤, 코로나 확진자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고, 시위대는 거리에 있었다. 3월에 모디 정권이 하룻밤 새, 마치 습격이라도 하듯이 불과 4시간만 공지하고 봉쇄를 단행했다. 그 당시 난 델리에서, 다음날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이는 마치 습격 같았고, 전 국민이 총리의 적이라도 된 것 같았다. 우리 모두는 놀랐다. 13억8천만명의 인구가 단지 4시간 전의 공지만으로 봉쇄당했다. 총리는 자기가 총리를 맡은 나라가 어떤 곳인지 도통 모르는 듯했다. 인도의 도시에서 차마 감당하기 힘든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는 비정규 노동자들이 봉쇄 조치로 갑자기 도로에 쏟아졌다. 돈도, 집도 없어서 수천마일을 걸어 그들이 나고 자란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성경 속 대이동처럼 말이다. 그들은 두들겨 맞고, 살충제로 살포 당했다. 봉쇄를 하는 이유는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 아닌가? 그러나 인도에서 봉쇄는 사람들이 버스나 기차에 갇히게 만드는 등, 사회적으로 육체적 집약을 만들어낸다.

한겨레

24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옥마을 게스트하우스에서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오른쪽)가 박혜영 인하대 교수와 대담에 앞서 사진을 찍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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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인도에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서구에서와는 다른 의미나 중요성을 가진다고 보는가?

로이 : 인도는 카스트제도가 있는 나라이기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말할 때 이는 끔찍하게도 카스트 간 육체적 거리두기를 암시하는 게 되기도 한다.

코로나 1차 유행이 끝나고, 모디는 인도는 괜찮다고, 우리가 전세계에 모범이 될 만하다 말하고 난 뒤 2차 유행이 터지고 델리에서 40만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 수치는 그 열배에 달한다. 사람들이 길에서, 주차장에서, 병원에서 죽어갔고, 화장터의 땔감이 떨어지고, 묻을 곳이 없어 시체가 강을 떠내려 갔으며, 모두가 절망했다. 마침내 2차 유행이 끝났을 때, “공짜 백신을 맞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모디”(실제로는 유료였으나)라고 말하는 포스터가 델리 여기저기에 나붙었다.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친 모디이며 친 기업적인 언론 전체가 무슬림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시작했다. 무슬림이 코로나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있다고. 마치 나치가 유대인이 장티푸스를 퍼뜨린 주범이라고 대중을 선동했듯이 말이다. 힌두 민족주의, 힌두 파시즘 혹은 힌두 민족주의 파시즘이라 불러야 할 것은 소수의 약자를 악마로 매도하는 것이다.

: 당신의 에세이, <팬데믹은 포털이다>에서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더 나은 사회와 인류를 위해 무엇인가를 버리고 갈지를 결정할지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우리가 이런 재앙적인 팬데믹 상황에서도 무언가 좋은 점을 배울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로이 : 전세계가 봉쇄된 것만 같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비록 매우 공포스러운 광경이었지만 미국과 같이 강력한 나라도 무릎을 꿇게 되는 걸 보았다. 미국과는 반대로, 공동체나 시민을 위한 의료 복지가 잘 갖춰진 곳은 견뎌내는 것도 보았다. 이렇듯 현대 세계가, 그리고 그 안의 부정들이 팬데믹 속에서 확대되는 것을 보았다. 팬데믹은 엑스레이라서 이 엑스레이를 제대로 통해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다. 갑작스런 충격은 종종 인류와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변화시킨다. 죽음에 가까운 경험을 하고 난 뒤, 삶을 다르게 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 2010년 당신이 쓴 정치 에세이를 보면 미국의 제국주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략 등과 같은 주제에 매우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이 매우 글로벌한 주제들이었다면, 요즘 당신은 인도 국내 문제로 관심사가 옮겨간 것 같은데, 힌두 민족주의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당신은 매우 강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모디 정권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모디의 권력이 계속 강해져가고 있기 때문일 텐데, 당신은 내가 아는 한 항상 ‘작은 이들’의 편에 서있었다. 그런데 무슬림 인구는 선거란 측면에서 봤을 때 여전히 중요하지 않은가? 시민권법과 같은 것을 행하는 것은 선거에서 무슬림 표를 무력화하는 게 아닌가? 선거에서 이기는 데 있어 무슬림 표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가?

로이 : 대의 민주주의가 인도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본다면, 선거를 통해 많은 의석을 얻기 위해서 대다수의 표를 얻을 필요는 없다. 모든 선거구에서 출마한 다섯 또는 열개의 정당을 볼 수 있다. 인도는 양당제가 아니다. 당신이 만약 20퍼센트의 투표율로 선거에서 이겼다고 해도, 많은 선거구를 차지하므로 의회에서 80퍼센트에 가까운 의석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실제 2014년과 2019년에, 모디 정권은 무슬림 표를 얻을 필요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인도의 파시즘은 유럽의 것과는 다르다. 독일 나치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을 때 그는 먼저 전후 독일 경제를 부활시키고 난 다음에 전쟁으로 경제를 파괴시킨 반면, 모디는 어떠한 부흥도 없이 경제를 망가뜨렸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 자신들의 경제적 파괴를 지지하는 셈이다. 내 집 근처의 차 가게에 이와 관련한 좋은 예가 있다. 모디의 열렬 지지자이던 남자가 있는데, 그는 모디를 욕하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2016년 모디가 화폐개혁을 단행했을 때 그는 모든 돈과 직장을 잃었고, 봉쇄로도 가진 것을 다 잃었다. 그래도 그는 모디를 비판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목을 매고 죽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을 파멸시킨 사람은 비판해본 적 없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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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옥마을 게스트하우스에서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오른쪽)가 박혜영 인하대 교수와 대담에 앞서 사진을 찍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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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항상 약자들의 편에서 법, 기관, 입법, 언론, 기업 등과 같은 강자들을 비판해왔다. 이런 점에서 당신의 안전이 염려되지는 않는지 궁금하다. 한 번이라도 체포나 구금과 같은 위협을 받아본 적은 없는가?

로이 : 2002년에 구금된 적이 있다. 상황은 언제든 매우 유동적일 수 있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구금되는 사람들은 보통 나처럼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다. 즉 내가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은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인 건데, 잘 알려져 있다는 이유로 공격도 받는다. 당신이 뭘 했고 안 했고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원하지 않으면 이야기를 만들어내서 당신을 몰아낼 수 있다. 그런데 나를 그대로 두고 내가 원하는 대로 말하게 놔두고 감옥에 가두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민주주의다’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이건 둘이 추는 춤사위다. 이것이 얼마나 오래갈 지는 두고 볼 일이다. 모든 것은 철저한 계산하에 벌어지고 있다.

: 바로 그 지점에서, 인도에는 언론 탄압이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사실 당신은 모디 정부에 가장 비판적인 사람 중 한 명이 아닌가? 그 점은 인도에 언론의 자유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될 수 있지 않은가?

로이 : 나는 인도 티브이(TV)에서 발언하지 않고, 인도 언론에 글을 기고하지도 않는다. 내가 쓰는 게 무엇이든 온라인에 올라가거나 인도 외부(<가디언> 같은 매체)에서 나온다.

: <지복의 성자>로 돌아가서, 사담 후세인이란 캐릭터와 관련해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다. 작품에서 그는 힌두족으로서 불가촉천민인 달리트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죽은 후 개종한다. 이처럼 단지 한낱 민초에 지나지 않았던 이가 자신의 의지로 무슬림이 되는, 그리고 안줌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자신만의 낙원을 찾게 되는 설정을 통해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나?

로이 : 인도에서 카스트는 사회뿐 아니라 정치를 가동시키는, 모든 사회적 상호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엔진이다. 내 생각에 카스트를 벗어나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은 인도에서 1퍼센트도 되지 않을 것이다. 카스트는 모든 것 안에 존재한다. 수세기 동안 인도에서 불가촉천민으로 알려진 달리트들은 카스트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이슬람으로, 기독교 등으로 개종했다. <지복의 성자>에서 사담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은 그의 전투적 선언이다.

<지복의 성자>에선 두 가지 종류의 묘지가 나오는데, 하나는 델리 바깥의 무슬림 묘지이다. 당연히 인도에서 대부분의 묘지는 무슬림의 묘지다. 힌두족들은 시체를 태우기 때문이다. 안줌이 살고 있는 묘지에서,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가족들의 묘지를 둘러싸면서 게스트 하우스를 짓는다. 거기에 사담이 오고, 나중에 틸로가 오면서 낙원이 되는 게스트 하우스가 생겨난다. 이야기의 다른 부분에서 카슈미르는 엽서에서 낙원으로 묘사되는 곳이다. 즉 낙원 게스트 하우스가 된 델리의 묘지가 있는 한편으로, 카슈미르에서 보게 되는 것은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묘지로 뒤덮인 낙원이다. 안줌의 게스트 하우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에게 일어난 일,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누가 죽는지, 기도를 읊는 게 누군지 등은 사실 모두가 다 혁명적인 일이다. 이들 모두는 바다를 한 잔의 물로 담으려는 정치적 관념을 거부하고 있는 인도인들이기 때문이다.

: 안줌의 성적 정체성에 관해 보자면, 그녀는 히즈라, 즉 트랜스젠더로 등장하는데 혹시 경계적 정체성에 대해 묘사하고 싶었던 것인가? 이쪽뿐만 아니라 저쪽 세계에서도 모두 배제된 사람들 말이다.

로이 : 내게 안줌은 안줌이다. 내게 그녀는 틸로나 다른 캐릭터들과 마찬가지다. <지복의 성자>에 단일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가 있을까? 모든 캐릭터들이 어느 지점에선가 그들의 이름을 바꾸거나 또는 다른 누군가로 변신하게 된다. 안줌뿐 아니라 틸로나 사담 모두 경계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안줌은 흥미로운 캐릭터인데 그녀는 구자라트 폭동에 휘말리는 것으로 나온다. 그녀가 무슬림이고, 구자라트 폭동에 휘말렸을 때 같이 갔던 일행은 죽지만 그녀는 히즈라라서 살아남는다. 뭐가 더 위험한 정체성일까? 물론 무슬림이라는 정체성은 그녀에게 전통적으로 인도 사회에서 자리가 매겨져 온 히즈라라는 정체성보다 더 위험하지만, 히즈라라는 사실에도 폭력은 뒤따른다. 하지만 <지복의 성자>에서 안줌의 무슬림 정체성은 그녀를 거의 죽게 할 뻔하지만 히즈라라는 사실 덕분에 그녀는 다행히도 살아남는다. 왜냐면 히즈라를 죽이는 것은 불행이 따르는 일이라 여겨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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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옥마을 게스트하우스에서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가 박혜영 인하대 교수와 대담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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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전작을 보자면 당신의 주요 캐릭터들은 가족, 친척, 혹은 집안과 같은 개인적인 혹은 사적 경험에 기반하고 있다. 그런데 트랜스젠더와 같은 경계적 정체성과 관련된 이렇게 놀랍도록 기발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얻을 수 있었나?

로이 : 어떤 사람들은 <작은 것들의 신>이 개인적 경험담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허구라 한다. 그 모든 캐릭터들은 내가 알고 있는 실제 사람들이 아니지만 내가 알고 있었고, 같이 걷고, 숨쉬고, 먹고, 담배 피웠던 사람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지복의 성자>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은 도시와 같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서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나서 도시를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도시를 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도시 안을 두루 걷고 길도 잃어봐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별로 중요치 않은 모든 캐릭터들과 같이 바닥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건 내게 중요한 일이다. 카스트제도 때문에 인도의 사람들은 그의 신분으로 불리지만, <지복의 성자>에서는 아주 사소해 보이는 캐릭터들일지라도 이름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작중 캐릭터 모두가 당신이 그러리라 생각하는 대로 전형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안줌은 엄마가 될 수 없는 존재이지만 엄마가 되고, 엄마가 될 수 있는 틸로는 그렇지 않다. 작품 안에서 그들은 모두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점에서 비전투적인 방식으로 전투적이다.

: <지복의 성자>란 소설을 끝냈으니 말인데, 당신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당신의 삶에서 찾고자 하는 행복은 무엇인가?

로이 : <작은 것들의 신>에서 나오는 가족이 상처 난 가슴을 지닌 전통적인 형태라면, <지복의 성자>에서는 망가진 가슴으로 시작하지만 묘지에서 비전통적인 방식으로 상처를 치유해나간다. 작가로서 행복이란 아름다운 문장이다. 또는 저 산 너머에서 새로운 소설이 나오면서 “안녕. 지금 그리로 갈게”라고 말하는 것일 테다(웃음). 행복은 구글맵을 통해 찾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닌, 그저 왔다 가는 것이다. 해와 그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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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옥마을 게스트하우스에서 박혜영 인하대 교수가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와 대담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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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에 대항한 소중한 경험을 가지고 선거를 통해 매우 훌륭한 민주주의를 이룩한 듯 보인다. 그런데 현재, 이런 민주화 이후에도 우리는 매우 불행하다고 느낀다. 엄청난 빈부격차가 존재하고, 개발로 인해 살던 터전으로부터 쫓겨난 이들이 있다.

로이 : 민주주의와 자유시장이 결합하면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없다. 인도에서 농담처럼 하는 말이 사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려면 사람들을 죽이거나 땅을 빼앗거나 해야 한다는 거다. 그러려면 민주주의는 어느 특정 순간 경찰국가가 되어야 한다. 그 속에서 계속 선거 같은 걸 하지만 한편으로 스스로를 민주주의라 부를 수 없는 법들도 갖게 된다.

: 비록 우리가 경제적으로 많은 성취를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그런 풍요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자신들이 가난하다고 느끼고, 결혼과 출산 등을 거부한다. 반면 자살률과 노인 빈곤율은 증가하고 있다.

로이 : 그러니까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선, 그런 것들이 자연적인 결과일 수밖에 없다.

: 자본주의는 점점 더 강해져만 가는데, 이 속에서 여전히 희망을 찾을 수 있는가?

로이 : 물론 자본주의는 강해지곤 있으나, 한편 당신은 많은 젊은 세대들이 그러한 문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15년 전 미국에선 자본주의나 계급 같은 단어들도 사용할 수 없었다. <자본주의: 유령 이야기>라는 에세이에서 나는 어떻게 기업들이 교육과 특정 상상력을 장악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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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주제로 넘어가서, 마하트마 간디에 대한 당신의 언급은 다소 놀라운 데가 있다.

로이 : 그것은 아마도 비폭력과 독립투쟁 등 그와 관련되어 쓰이고 전해지는 이야기에 너무 많은 거짓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혹시 <박사와 성자>라는 내 에세이를 읽었는지 모르겠는데, 그것은 간디와 카스트, 인종에 대해 다루고 있다. 간디에 관한 모든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카스트, 인종, 여성에 대한 그의 견해가 문제적이라는 것이다. 걸으면서 껌을 씹는 일도 할 수 있듯이, 어떤 그의 견해는 선지적이라고 말한다면 문제적인 건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를 다각화할 수 있어야 한다. 단지 그의 머리에 광휘를 내걸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이미 그러한 태도는 인도에 너무 많은 폐해를 끼쳤다.

: 당신이 쓴 에세이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당신이 사용하는 영어가 근사하다고 생각한다. 언어 자체 사용에서뿐 아니라 운율적인 부분에서도 그렇다. 때때로 당신은 마치 시처럼 운율을 구사하기도 한다. 영어를 어릴 때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알다시피 영어는 영국 제국주의의 유산이라는 견해도 있다.

로이 : 인도에는 많은 팔을 가진 칼리라는 여신이 있는데, 나는 내 칼리 여신이 팔은 적은데 많은 혀를 가지고 있을 거라 말하곤 했다. 내게 영어는 나의 영어이다. 이것은 내게 매우 인도적인 언어인데, 인도에 있는 그 많은 지역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유일한 언어가 영어다. 어떤 제국주의 역사학자가 내게 말하길, 당신 소설이 영어로 쓰였다는 건 대영제국주의에 대한 찬사가 아니냐고 했다. 그럼 재즈는 노예제에 대한 찬사인 것인가?

: 두 번째 작품이 나오기까지 20년이란 세월이 걸렸는데, 그 사이 스트레스는 없었나?

로이 : 내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면 인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공격할 것이란 걸 알면서 그런 정치 에세이를 쓰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글쓰기는 내게 매우 내적 과정이다.

정리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녹취·번역 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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