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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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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남성 정치인 저격? 메르켈이 군악대에 신청한 고별곡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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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남성 정치인 동료들을 겨냥한 것일까. 2일 저녁 독일 국방부 청사 마당에서 열린 ‘그로저 자펜슈트라이히(Großer Zapfenstreich)’ 행사에서 퇴임하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선정한 퇴임곡을 놓고 해석이 분분하다. ‘그로저 자펜슈트라이히’는 독일 대통령‧총리‧국방장관의 퇴임을 기념하는 독일군 최고의 군대 의식(儀式)으로, 퇴임하는 공직자는 원하는 세 곡을 군악대에 신청할 수 있다.

16년 총리 직을 고별하며 메르켈이 첫 번째로 고른 곡은 17세기 찬송가로 독일 가톨릭과 개신교가 함께 부르는 ‘주 천주의 권능과(Holy God, We Praise Thy Name)’였다. 그가 동독에서 루터교 목사의 딸로 자란 배경을 생각하면 이해할 만했다. 두 번째 곡은 독일 가수 힐데가르트 크네프가 1960년대에 부른 ‘내겐 빨간 장미가 내려야 해’였다. “세상은 맞춰 살고/대충 때우며 살라지만/난 그럴 수 없어/언제나 이겨야 하고/내겐 하늘에서 빨간 장미가 쏟아져 내려야 해”라는 가사로, 10대 청소년 특유의 꿈과 반항심을 담은 노래다.



문제는 세 번째 곡, 동독 시절의 대표적인 펑크록(punk rock) 가수였던 니나 하겐스가 1974년에 불러 히트한 “칼라 필름을 까먹었잖아”였다. 동독의 유명 관광지에 놀러갔는데 남자 친구가 흑백 필름만 가져온 탓에, “찍어봤자 아무도 이게 얼마나 멋진지 알 수 없잖아”라며 호통 치는 내용이다. 메르켈이 동독에 살던 20세때 나온 이 노래는 금지곡은 아니었지만, 당시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 온통 칙칙하고 회색빛이었던 동독 사회를 노래했다는 해석을 낳았다. 메르켈은 펑크록 애호 사실을 공개한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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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펑크록 가수 니나 하겐이 1985년 공연에서 카메라에서 흑백 필름을 빼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유튜브 스크린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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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메르켈이 왜 이 노래를 택했을까. 독일 정치평론가들은 “자기 일을 똑바로 못하는 남성 정치인들에게 좌절했던 메르켈이 떠나면서 한 방 날렸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한편, 메르켈은 근 30년 전인 1992년 여성‧청소년부 장관 시절 펑크록 가수 하겐스와 마약중독 문제를 놓고 TV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하겐스는 메르켈에게 “당신의 거짓말과 위선에 질렸다”고 비난했는데, 메르켈은 퇴임하면서 이 ‘과거사’와도 화해한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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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저녁 독일 국방부 청사 마당에서 열린 고별 군대의식에 참석한 앙겔라 메르켈 총리.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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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군악대에게도 ‘빨간 장미’와 ‘칼라 필름’ 연주는 처음이었다. 군악대장인 라인하르트 키아우카 중령은 “악보도 없었는데, 1주일 전에야 신청곡이 도착했다”며 “그러나 총리를 위해 최선의 연주를 하려고 이틀만에 금관악기용 악보도 편곡하면서 열심히 준비했다”고 일간지 타즈에 말했다. 앞서 게르하르트 쉬뢰더 전 총리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My Way)’, 헬무트 콜 전 총리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Ode to Joy)’를 신청했다.

한편, 이날 고별 행사에서 메르켈 총리는 코로나 팬데믹 와중에 의료진이 보인 노고에 특히 감사하며, “우리의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교정하는 능력과, 서로에 대한 존중, 연대와 신뢰 위에서 번창한다. 무엇보다도 “팩트(facts)를 신뢰하고, 음모론을 경계하라”고 당부했다고, 슈피겔은 전했다.

[이철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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