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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詩想과 세상]백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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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신문

손잡이 뜯긴 장롱은 하루 만에 치워졌는데

거울은 며칠째 제자리다

빈집처럼 작은 발자국들은 얼어 있고

표정은 닳아 없어진 겨울 골목

착하게 살다 가장자리로 나선 거울은

어떤 궁리를 하고 있을까

외롭고 치명적인 몇 장의 구름과

두 겹의 생처럼 핀 십이월

함박눈 몇 장이 얼굴을 들이민다

도무지 닿지 않는다

김병호(1971~)

아파트 앞 언덕에 고만고만한 집들이 모여 있었다. 재개발지구로 지정된 후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빈집 대문에는 붉고 흉한 X자가 그려져 있었다. 침범하면 어디선가 몽둥이를 들고 나타날 것 같았다. 버리고 간 세간이 골목에 나뒹굴었다. 밤이면 음산하게 고양이 울음이 들려왔다. 주인 없는 집들이 몽땅 헐리고, 언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 언덕 밑에 잠들어 있던 흙의 속살까지 파헤쳤다. 아무 이유 없이, 아파트가 들어설 때까지 사진을 찍었다.

12월 “겨울 골목”은 스산하다. 이사를 한 것인지, 가재도구를 다시 장만하면서 내놓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장롱은 하루 만에 치워졌는데/ 거울은 며칠째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거울은 반대편 제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다. 장롱이나 거울이나 낡기 전에는 소중한 물건이었을 터. 손잡이가 부서지고 윤택이 사라지자 매정하게 한데로 내쳐진다. 누군가 헌것을 버리고 새것을 찾아 떠나면, 누군가의 생은 “외롭고 치명적”이다. 뜬눈으로 하얗게 밤을 지새운다.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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