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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은밀히 털어놓은 내 '상처'…모두가 공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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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일부 보육원서 원생들과 상담한 내용 담긴 일지, 원장 등이 보고하라고 요구해 '논란'…아동복지 전문가 "비밀보장 원칙, 비상식적인 일…만천하에 공개되면 누가 맘 편히 털어놓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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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임종철 디자인기자


#. 보육원에서 지낼 때였다. A양은 상담하는 시간에, 상담 선생님에게 자신이 가진 상처에 대해 털어놓았다. 원가정에 있을 때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얘기한 거였다. 그러면서 A양은 상담 선생님에게 "제 상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그런데 얼마 뒤, A양은 보육원의 다른 선생님들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단 걸 알게 됐다. A양은 "크게 부끄러움을 느꼈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아직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 뒤로는 상담은 물론, 늘 주위를 신경쓰고 행동 처신을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일부 보육원에서 심리상담사에게 아이들과 상담한 내용이 담긴 '상담일지'를 원장 등 윗선에 보고토록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담 내용은 '비밀 보장'이 원칙이며 위급 상황 등 예외적인 경우에만 공유할 수 있는데도, 일부 보육원장 등이 이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일을 겪는 보육원의 임상심리상담원들은 "인권 침해 또는 윤리적인 문제 소지가 있다"고 답했고, 전문가들 역시 "비상식적인 일이며 필요할 때 도움 요청을 못하게 하는 부작용이 있다"고 조언했다.


보육원장이 "우린 부모 같은 사람들인데 왜 보면 안 되냐", 보고토록 요구


해당 문제를 제보한 임상심리상담원 B씨는 "일하는 보육원의 원장이 아이들과 상담한 내용이 담긴 일지를 전체 다 공개해서 보고하라고 한다"고 했다. 원장 뿐 아니라 국장 등 단위까지, 상담일지 결재를 받으라고 했다는 거였다.

이에 B씨가 아이들에게 동의 받은 것도 아니며, '비밀 보장 원칙'을 이유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해당 보육원장은 "우린 아이들에게 부모 같은 사람들이다. 왜 보면 안 되느냐"며 요약본이라도 낼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B씨는 "상담일지를 올리고 결재 받으라는 건 정말 인권침해"라며 "아이들이 기관에 대한 불만도 얘기할 수 있고, 원장에 대해 비판도 할 수 있는데, 다 통제하려 하면 상담 받고 싶지도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상담내용 공개된 보육원생들 "아예 개방된 공간서 상담한 적도, 말할 수 없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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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씨가 근무하는 보육원이 아닌, 다른 보육원에서 지낸 원생 일부도 비슷한 일을 겪어본 적이 있다고 했다.

보육원에 있었다는 C양은 "학교 생활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학교서 겪은 일들이 선생님들을 통해 다른 원생들에게 알려졌다"며 "아이들끼리 싸우며 그 일을 들추고 상처 주는 걸 봤다. 그런 내용들은 주의를 기울여줬으면 어떨까 싶었다"고 했다.

그는 또 "아이들 연령이 어렸을 땐, 아예 개방된 공간에서 상담한 적도 있었다""상담사가 아닌 선생님들이 내용을 알고 계시는 게 좀 그랬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다른 보육원에서 지냈던 D군도 "상담했던 내용이 원장님께도 알려진다는 걸 (눈치로) 알게된 뒤엔, 솔직하게 말하기 힘들었다"고 했다.


심리상담은 '비밀보장 원칙'…전문가 "상담일지 보고는 비상식적인 일"


통상 심리상담은 상담자의 '비밀보장'이 원칙이며, 예외적인 몇몇 사례 외에는 누설할 수 없게 돼 있다. 예외 사항은 △내담자 동의를 구한 경우 △내담자 또는 제3자의 생명, 재산 등에 급박한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경우 등이다.

그러나 B씨가 이와 관련해 보건복지부에 "시설장이 임상심리상담원에게 상담일지 결재를 받으라고 한다"며 민원을 제기한 부분에 대해, 보건복지부 아동권리과 관계자는 "통상적으로 아동복지시설의 장은 종사자에 대해 지휘, 감독권을 행사할 수 있다" "정보 주체에 불이익이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상담일지 내용을 보고토록 요청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고 답변을 했다.

하지만 아동복지 전문가들은 "상담일지 보고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일축했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아이들의 극단적 선택 시도나, 생명 위협에 대한 부분이라면 보고가 되는 게 맞지만, 그외엔 봐야할 이유도 없고 봐서도 안 된다"고 조언했다.

이어 "내 상담 사실이 원장, 국장에게 알려진다면 누가 가서 상담하겠느냐""상담은 도움을 요청하게 해야하는데, 오히려 (그런 보고가) 필요한 도움을 주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남형도 기자 hum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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