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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경복궁 향원정이 '왕의 휴식처라고?'…명성황후의 눈물이 담겨있다. [이기환의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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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얼마전 왕과 왕비의 휴식처인 경복궁 향원정과 취향교가 3년만에 복원·공개됐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도하 각 언론은 ‘이곳이 고종이 거닐던 왕의 휴식처’이라는 이구동성의 제목으로 일제히 소개했습니다. 복원의 전 과정을 풀어준 친절한 기사와 함께 단풍으로 물든 정취어린 늦가을 향원정의 사진과 영상이 봇물을 이뤘습니다.

해체 및 복원과정에서 1881년과 84년 벌채된 목재가 확인되면서 향원정의 조성시기가 1885년 무렵으로 추정됐습니다. 또 정자 안을 따뜻하게 데웠을 온돌시설의 전모도 파악했답니다. 기울어지고 침하되는 위험한 상태였기에 완전해체 후 복원이라는 결정을 내렸다네요. 무엇보다 공간이 협소한 섬에서 작업이다 보니까 크레인 없이 모든 공사를 사람 손으로 해야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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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이 물든 향원정의 가을. 왕의 휴식처로 조성된 향원정은 3년간의 해체·복원을 끝내고 일반에 공개됐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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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휴식처에서 첫 선보인 빙족희

그렇게 복원된 늦가을 고즈넉한 궁궐 정원의 멋에 흠뻑 빠져있던 며칠 후 또하나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번에는 아주 기분 더러운 소식이었는데요. 일본 아사히(朝日) 신문에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1895년)에 가담한 일본 외교관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1865∼1945)가 친구인 다케이시 사다마츠(武石貞松)에게 보낸 편지가 실렸는데요. 그중 명성황후가 시해된 1895년 10월 8일자 편지에서 이렇게 씁니다.

“내가 담당한 임무는 진입이었다…담을 넘어 (중략) 간신히 오쿠고텐(奧御殿·귀족 집의 안쪽에 있는 건물이나 침소)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했다.” 그런데 그 다음의 촌평이 기가 막힙니다. “(왕비 시해가) 생각보다 간단해 오히려 매우 놀랐다.”

당시 영사관보의 신분이었던 호리구치는 일본 외교관과 경찰, 민간인으로 구성된 명성황후 시해단의 일원이었는데요. 명색이 외교관이라는 자가 할 수 있는 소리인가요. 인두축명(人頭畜鳴), 즉 사람의 얼굴로 짐승의 소리를 내지르는 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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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이 11월16일자에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당시 일본 영사관보였던 호리구치 구마이치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공개했다.



■고종이 건청궁·향원정을 지은 까닭

여러분들은 궁금하게 여기시겠죠. 왜 ‘왕의 휴식처’ 운운하며 감성을 자극하다가 갑자기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야기를 해서 피를 끓게 만드냐구요. 그러나 이유가 있습니다. 향원정과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향원정의 모태는 세조 연간(1459년) 세운 취로정입니다. 세조(1455~1468)는 경복궁 후원에 연못을 파고 취로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는데요. 단순히 놀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이 농사 짓는 수고와 고달픔을 알기 위해 후원에 논 2~3이랑을 개간해서 농사의 길흉을 가늠해 보았다”(<세조실록> 1459년 4월22일)고 합니다. 세조는 후원에 조성한 논이랑에 새싹이 핀 것을 보고 “농사는 나라의 근본이고, 음식은 백성의 하늘이니, 어찌 내가 농사짓는 일을 버리겠느냐”고 흡족함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1873년(고종 10) 고종이 막 중건된 경복궁 후원에 임금 부부 만의 공간을 조성하는데요. 건축비용도 나랏돈이 아닌 고종 개인의 돈(내탕금)을 털었답니다. 그것이 건청궁인데요. 이 때는 고종이 흥선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 친정을 선포한 해였거든요. 그래서 정치적인 독립을 선언한 고종의 의지가 건청궁 조성에 드러났다고들 말합니다.

향원정은 건청궁 앞의 연못 한가운데 조성된 2층 정자입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인 건청궁과는 다리(취향교)를 통해 연못을 건널 수 있게 했답니다. 정자 이름은 북송의 유학자인 주돈이(1017~1073)의 ‘애련설’ 즉,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아진다”는 ‘향원익청(香遠益淸)’에서 따왔습니다. 향원지를 건너는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라 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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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때 궁궐진입을 담당한 일본 외교관 호리구치는 친구에게 “왕비의 시해가 생각보다 너무 쉬웠다(깜짝 놀랐다)”는 편지를 보냈다.|일본 아사히신문 캡처


■“미국 당상관은 광대처럼 스케이트 타나?”

이곳은 물론 조성초기에는 왕과 왕비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됩니다. 특히 한국 스케이팅의 역사가 바로 이 향원정에서 시작됩니다. 즉 19세기말 향원정에서 ‘빙족희(氷足戱)’ 혹은 ‘빙예(氷藝)’라 일컬었던 스케이팅 시범공연이 심심찮게 벌어졌다는 겁니다.

이 ‘빙족희’는 “꼭 한번 보고싶다”는 명성황후(1851~1895)의 간청에 따라 스케이팅에 능한 외교관·선교사 가족들이 참가했답니다. 이때 명성황후는 향원정 안에서 발을 내리고 서양인들이 펼치는 스케이팅을 관람했다네요.

그런데 명성황후가 “아니 저 미리견(米利堅·미국) 당상(堂上)은 재인(才人·광대)이냐”고 물어봤다는군요. 외교관이면 조선에서는 당상관(정 3품 이상)의 지위인데요. 명성황후는 “미국에서는 당상관이 사당패처럼 재주를 부리냐”고 망측스러워했다는 겁니다.(<조선일보> 1968년 6월4일·1976년 10월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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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잡지인 <더 코리아 리포지토리>에 실린 향원정 연못 위의 ‘스케이팅 갈라쇼’ 기사. 1895년 2월 고종과 명성황후는 겨울철이면 꽁꽁 언 향원정에 서양외교관들을 초청하여 ‘빙족희(스케이팅)’ 시범을 관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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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육영공원(국립영어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조선을 방문한 조지 길모어(1857~?)도 향원정에서 심심치않게 열렸던 스케이팅 갈라쇼 모습을 실감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시범을 보이라’는 왕비(명성황후)의 초청장이 배포되어 상당한 스케이터가 응했다. 궁궐 안…둥근 모양에 직경으로 약 70야드쯤 되는 연못에 예쁘고 작은 정자가 있었다. 장막 뒤에 몸을 가렸지만 시야는 확보된 시종들과 더불어 국왕과 왕비는 이 정자에 있었다. 두 분 역시 의심할 바 없이 열정적인 구경꾼이었다.”(<서울풍물지>·1892년)

길모어는 “마술전문가이기도 한 피겨스케이터가 전속력으로 달려와 아이스체어 위로 점프를 했을 때 흥미는 최고조에 달하였다”면서 “두 분 전하의 탄성의 소리가 스케이터의 귀에까지 들렸다”고 전했답니다.

이날 얼음이 꽁꽁 언 한겨울에도 이 스케이팅 시범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증거가 2019년 향원정 발굴에서 나왔습니다. 즉 고종 부부의 한겨울 향원정 나들이를 가능케 한 온돌시설이 확인된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고종 부부는 물론이고, 외교사절 및 귀빈들까지 조선의 온돌 덕분에 쾌적한 환경에서 갈라쇼를 관람했을겁니다. 길모어를 비롯한 그 어떤 외국인도 ‘얼어죽을 뻔했다’는 소감을 남기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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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공원(왕실영어학교) 교수로 방한한 조지 길모어(1857~?)는 고종 부부와 서양 외교관들이 향원정에서 즐긴 빙족회(피겨스케이팅) 갈라쇼를 실감나게 표현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시범단이 곡예에 가까운 솜시를 보일 때마다 탄성을 질렀다고 소개했다.|정현정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주무관 제공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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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발상지

그보다 7년 전인 1887년 1~3월 건청궁 앞 향원정 일대에서는 조선 역사상 기념비적인 이벤트가 열립니다.

동북아 3국의 궁성 중 가장 먼저 전등불을 밝힌 겁니다. 중국 베이징(北京)의 자금성은 물론, 일본의 궁성보다 약 2년 앞지른 선구적인 사업이었답니다. 고종은 ‘전깃불에 관한 한 얼리어댑터’였던 셈이죠. 사상 처음으로 전등불이 켜지는 모습을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하는데요. 당시 이 모습을 숨어서 지켜봤다는 안상궁(1936년)의 회고담이 재미있습니다.

“건청궁 앞 연못(향원정)에 설치된 쇳덩이(기계)를 서양인이 움직였는데 연못의 물을 빨아올려 물끓는 소리와 우레와 같은 굉음이 났다. 얼마 뒤 궁전 내의 가지 모양의 유리에 휘황찬란한 불빛이 대낮같이 점화됐다.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건청궁 내에 설치된 발전설비는 16촉광의 전구 750개를 켤 수 있는 시설이었다니 대단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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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원정 해체보수 과정에서 한겨울에도 정자를 따뜻하게 데워주었을 온돌이 확인됐다. 고종 부처와 각국 외교관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피겨스케이팅 갈라쇼를 관람했을 것이다.|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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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증이 들죠.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부모가 물려주신 것”이라며 자르기를 거부했던 조선인들이 아닙니까. 그런 조선이 왜 전깃불만큼은 빨리 도입했을까요. 그것도 중국·일본보다 더 빨리….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죠. 조선은 1882년(고종 19년) 5월 서구열강 가운데는 처음으로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죠. 그런다음 이듬해(1883년) 9월 보빙사라는 이름의 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합니다. 민영익(1860~1914)을 전권대사로 한 사절단 11명은 당시 미국의 체스터 아서 대통령(1829~1886·재임 1881~1885)에게 국서를 전달했는데요. 보빙사는 미국 체류 기간 중 아주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토마스 에디슨(1847~1931)이 전등불을 발명한 지 불과 4년 만인데요. 전깃불이 뉴욕과 보스턴의 밤거리를 비추는 희한한 장면을 목격한 겁니다.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신문물을 눈 앞에서 보게 된 겁니다.

1883년(고종 20년) 9월24일 뉴욕의 에퀴타블 빌딩을 방문해서 발전기에서부터 전기불이 켜지는 과정을 지켜본 유길준(1856~1914)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악마의 힘으로 불이 켜진다고 생각했다”고 경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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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1~3월 사이 조선의 정궁 경복궁에서도 가장 깊숙한 건청궁과 향원정 일대에 전등을 설치하고 불을 밝혔다. 전등 설치에 관한 한 중국과 일본보다 2년이나 빠른 것이었다. |전기박물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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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할 뿐 아니라 조작법도 알게 됐다. 더이상 검증할 필요도 없으니 조선에서 이 전기를 사용하고 싶다.”(<서유견문>)

고종은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보빙사의 강력한 추천으로 전기 도입을 서둘렀습니다.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84년) 등의 변란은 고종이 전기를 도입하는데 촉진제가 되었구요.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은 “고종이 임오군란·갑신정변 이후 변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가마꾼 20여명을 궁성 북문에 대기시켜놓았다”면서 “밤에 변란이 많이 일어나니 궁궐 내에 전등을 많이 켜서 새벽까지 훤하게 밝히도록 명했다”고 썼습니다. 전깃불을 도입하려는 고종의 열망을 좀 이해할 수 있겠죠.

여하간 향원정 연못에서 물을 끌어대어 환하게 밝힌 전등은 여론을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때 설치된 발전기가 증기동력이었기 때문에 증기기관의 냉각용수가 열탕이 되었는데요. 때문에 뜨거운 증기수가 역류되어서 연못의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증어망국(烝魚亡國)’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또 전기등이 건들거리면서 자주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한다 해서 ‘건달불(乾達火)’이라고까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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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청궁 옥호루와 향원정 앞을 밝히던 전등불. 중국 일본을 통틀어 가장 먼저 궁궐에 전등을 밝히자 이것을 불가사의로 여긴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전등불을 신기하게 여긴 명성황후는 무슨 구실을 붙여서라도 이곳에 나와 발전모습을 지켜보았다.



■불태운 시신을 연못에 던지고 다시 소나무숲에…

그렇습니다. 이 향원정 복원을 두고 분위기 운운하면서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닙니다. 왕과 왕비의 휴식공간으로 조성됐고, 그에 따라 연못과 정자, 다리까지 제작되었지만 어떻습니까. 그것도 모자라 궁궐을 훤히 밝혀줄 전등까지 매달았지만 어떻게 됐습니까.

1895년 10월 8일 새벽 천인공노할 사건이 벌어지죠.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1846~1926)의 지휘아래 서울 주둔의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공사관원, 영사경찰, 신문기자, 낭인배 등이 한통속이 되어 명성황후를 무참하게 시해하죠.

시해의 현장은 차마 눈뜨고, 귀담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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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당시 경성 영사였던 우치다 우치다 사다쓰치(內田定槌)의 보고서에 그린 명성황후 시해 개념도. “왕비의 시신을 궁궐내 우물속으로 던졌다가 진상이 드러날까봐 건청궁 옆 녹산에서 불에 태웠으며, 그것도 꺼림칙해서 다시 연못(향원지)에 던졌다. 그러나 연못이 깊지 않아서 다음날 시신을 끌어내 녹산의 소나무 숲에 묻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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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경복궁 시위부대장의 신분이었던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러시아인·1860~1921)은 명성황후가 기거하고 있던 곤녕합 동행각에서 그 천인공노할 사건을 목격하게 되는데요.

사바틴은 “자객 20~25명이 건청궁의 각 방을 샅샅이 뒤지면서 명성황후를 찾았다”면서 “그 과정에서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고 밖으로 질질 끌며 왕비의 소재를 추궁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또 당시 영국 영사 월터 힐리어(1849~1927)의 증언은 더 끔찍합니다.

“뜰 아래 달아났던 왕후가 붙잡혀 쓰러졌고…살해범들은 왕후의 가슴을 짓밟으며 몇차례나 거듭 칼로 짤렀다. 그들은 실수가 없도록 확실히 해치우기 위해 왕후와 용모가 비슷한 몇몇 궁녀들까지 함께 살해했다. 그 때 왕후의 의녀가 손수건으로 왕후의 얼굴을 가려 주었다.”

잔인무도한 일인들은 왕후의 시신마저 무참히 훼손했습니다. 경성 영사였던 우치다 사다쓰치(內田定槌)의 회고를 들어봅시다.

“사건 관계자에게 들은 바로는 왕비의 시신은 궁궐 내의 우물 속으로 던져졌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곧바로 죄의 흔적이 발견될까봐 사체를 끌어내어 궁궐 내의 소나무 숲에서 석유를 뿌리고 태웠다. 그것도 꺼림칙해서 이번에는 연못(향원지) 속으로 던져버렸지만 깊지 않아서 다음날 다시 꺼내어 소나무 숲에다 묻었다.”

당시 조선을 방문중이던 영국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1831~1904)의 회고를 보면 “영리하고 야망이 있으며 음모적이고 매력있고 아름다웠던 왕비가 자객들의 손에 죽어갔다”면서 “일본인들은 왕비를 널빤지에 올려놓고 비단으로 싸서 근처 녹원(사슴공원)의 소나무 숲으로 끌고가 불태웠다”(<조선과 그 이웃나라>·1897년)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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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원정 연못은 명성황후의 재가 뿌려진 곳일 수 있다. 건청궁 바로 옆에 있는 녹산의 소나무 숲은 무자비하게 희생된 명성황후의 시신이 불태워진 비극적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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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교사의 교훈

저는 며칠전 향원정을 둘러보았습니다. 울긋불긋한 단풍이 졌지만 풍취는 더할 나위없었습니다.

하지만 향원정의 정취에만 빠져있을 수 없었습니다. 무참하게 서거한 명성왕후의 재가 뿌려진 곳일 수도 있으니까요.

이내 명성황후와, 왕후를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궁녀들의 비명이 서려있는 건청궁 장안당·곤녕합·옥호루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곤 시신을 불태웠다는 ‘녹산의 소나무 숲’도 돌아보았습니다. 잔인무도한 일본인들의 기운이 서려있는 듯 섬뜩했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분도 있겠네요. 고즈넉한 궁궐의 분위기 좀 만끽하고 싶은데 골치아프고 가슴저린 이야기를 굳이 꺼낼게 무엇이냐고 하실 분들도 있겠죠. 그럴만도 합니다. 그러나 늘 좋은 역사만 배울 수는 없습니다.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될, 아니 결코 잊지말아야 할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고자 합니다. 제가 주말에 향원정·건청궁을 다녀온 이유입니다.
(이 기사를 쓰는데 정현정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주무관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역사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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