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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0 (토)

이천쌀집 300%, 수원갈비집 200%…요즘 성과급 받고도 화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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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대학, 학과를 나왔는데 돈 받는 건 천지차이죠. 일단 회사가 성장산업이 아니니 크게 바랄 수도 없구요. 첫 직장을 잘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국내 유통기업에 다니는 A(38)씨는 “대학 동기들은 기본이 한 장(1000만원)인 것 같은데 상대적 박탈감이 너무 크다”며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다. 연초 성과급 시즌을 맞아 직장가가 술렁이고 있다. 1년 전 SK하이닉스가 지핀 성과급 논란 이후 맞는 첫 지급철인 데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충분한 ‘보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그 어느 때보다 민감한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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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기업 임금체계 유형.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달아오르는 성과급 경쟁



성과급은 기업이나 부서가 경영목표를 달성했을 때 직원에게 현금·주식 등으로 지급하는 보수다. 국내에선 1998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근무연수에 따라 임금이 오르는 연공제(호봉제)에 한계를 느낀 기업들이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2000년 삼성전자가 처음 지급했다. 통상 12~2월 나오는 성과급은 직장인에게 선물, 말 그대로 보너스였다. 주면 좋고 안 주면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이 강했고 불만이 있어도 드러내지 않는 문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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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1일 경기 이천 SK하이닉스 본사의 M16 준공식에 화상 연결 방식으로 참여한 최태원 SK그룹 회장(가운데). [사진 SK하이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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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난해 1월 SK하이닉스의 4년차 직원이 전체 임직원에게 e메일을 보내 성과급 규모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직원들은 사내·외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제대로 된 보상’을 요구하고, 기업들은 앞다퉈 성과급을 높이고 산정 기준을 공개하며 직원 달래기에 나서고 있다. 성과급이 양지로 드러나며 직장을 비교하는 기준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특히 지난해 실적이 좋았던 업계를 중심으로 성과급 경쟁과 신경전이 치열하다. 반도체 업계의 경우 지난해 12월24일 삼성전자가 한 달 기본급의 200%를 특별보너스로 지급한다고 발표하자 1주일 뒤 SK하이닉스는 기본급의 300%를 특별성과급으로 주겠다고 응수했다. 그러자 최근 삼성전자 경계현 DS(반도체)부문 대표는 사내 간담회에서 “추가 보상 지급을 고민 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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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기업 성과급.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지난해 역대급 실적을 거둔 은행권도 마찬가지다. 신한·KB국민·하나·우리 등 4대 은행들은 모두 기본급의 300%에 현금 80만~100만원을 더한 수준의 성과급을 지급했다.

이런 발표가 날 때마다 직장가는 ‘돈 얘기’로 들썩였다. 'SK하이닉스 부장급은 성과급으로만 1200만원을 받는다' '은행 차장급은 최소 700만~800만원이다' '삼성전자 과장급은 성과급이 4000만원이 넘는다' 등 기본급과 성과급 비율로 계산한 액수들이 거침없이 공유되고 있다.



격차 벌어지며 직원도 기업도 ‘고민’



성과급은 정당한 보상 문화의 마중물 역할을 하는 동시에 실시간 비교의 대상이 돼 근로의욕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10년차 직장인 김모씨는 최근 기본급의 100%인 약 300만원을 성과급으로 받았다. 적지 않은 액수지만 "직장인 커뮤니티인 블라인드 등에 올라온 게시물을 읽다보면 일할 맛이 안 난다"고 했다. 그는 “회사가 반도체나 바이오 같이 뜨는 산업이 아니니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 건 이해하겠지만 같은 연차에 3~5배 차이가 나니 이게 뭔가 싶다. 대표·임원들도 다 외부출신으로 오는 마당에 공채가 잘 된다는 보장도 없고 스타트업을 포함해 계속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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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성과급 관련 게시물. [블라인드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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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기업대로 고민이 깊어졌다. 구성원의 절반을 넘어선 20·30대 MZ세대를 중심으로 성과급을 높이고 산정 기준 등을 공개하라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모레퍼시픽의 경우 부진한 실적에도 불구하고 성과급을 지급하기 위해 지난 12월 자사주를 약 11만주 사들였다.



영업이익 나면 무조건 준다?



무엇보다 인재 유출을 막기 위해선 최소한 동종업계의 경쟁사와 비슷한 수준의 성과급을 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메모리 반도체 업계에서 ‘수원갈비집(삼성전자)’과 ‘이천쌀집(SK하이닉스)’의 인재 확보 경쟁과 신경전이 유명하다.

국내 대기업 인사팀 관계자는 “성과급은 이익이 났다고 무조건 주는 게 아니라 영업이익에서 세금과 채권자·주주의 몫을 제외한 재원인데 요즘 직원들은 성과급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며 “성과급을 연말뿐 아니라 연초에 주는 건 꼭 성과가 좋아서가 아니라 앞으로 잘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긴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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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위해 현재 포기 안 해”



전문가들은 성과급 문화가 부상한 가장 큰 원인으로 평생직장의 종식을 꼽는다. 기업의 성과평가 분야 전문가로 『공정한 보상』을 쓴 신재용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요즘 직원들은 조직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살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종신고용과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진 가운데 “미래(기업성장) 때문에 현재(성과급)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실제 정보기술(IT) 플랫폼 기업에 다니는 박모(33)씨는 “회사가 나를 책임질 것도 아니고 지금 받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빨리 많이 챙기는 게 당연하다”며 “무조건 선배라고 많이 받았던 연공제에 비하면 훨씬 건강한 문화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업계 전반에 ESG(환경·사회적책임·지배구조개선) 경영이 자리잡으면서 직원의 만족도가 중요 기업평가지표가 된 것도 성과급 경쟁을 가속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한국경제연구원 김용춘 고용노동정책팀장은 “성과급은 근로자에겐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동기부여가 되고 기업엔 경영상황에 따라 인건비를 조정할 수 있는 기능을 한다”며 “회사의 이익과 근로자의 목표가 일치되도록 만드는 수단인 만큼 직급 파괴 등 성과·능력주의와 맞물려 점점 확산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재용 교수는 “기업이 당장 충분한 경제적 보상을 할 수 없다면 실력있는 상사의 멘토링과 우수한 교육 프로그램, 도전적인 역할과 프로젝트 부여 등 직장에서 자기계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직원들이 돈을 적게 받아도 열심히 일하는 상황을 ‘납득’할 수 있게 하고 이 일을 통해 ‘몸값’을 높일 수 있다는 희망 사다리를 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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