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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도서관 窓으로 들어온 새벽… 예술은 기어이 낮은 자리까지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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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도서관에서 하룻밤]

③신미나 시인이 밤 지샌 국내 첫 미술전문도서관

자정 가까운 시각, 원형 조명이 켜진 의정부미술도서관은 우주선처럼 환했다. 아무런 정보 없이 외관만 본다면, 현대적 갤러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의정부미술도서관’은 명칭 그대로 미술관과 도서관이 결합된 색다른 공간이었다. 미술관과 도서관. 서로 다른 두 공간이 한자리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 시를 쓰고, 시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나의 작업과도 연결되었으므로 호기심이 일었다.

미술도서관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을 때, 나는 오래전부터 쥐고 있던 질문을 되새겼다. 서로 다른 영역의 예술이 만나는 지점은 어디일까. 한 분야의 예술이 고도로 전문화할 때, 종종 발생하는 대중성의 결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명쾌한 답을 찾고 싶었다.

문을 열자 중앙의 나선형 계단이 먼저 눈에 띄었다. 3층까지 올라가자 살짝 숨이 찼다. 난간에서 내려다보니 전체 구조가 한눈에 들어왔다. 천장은 높았고 책장은 낮았다. 바람개비 날개가 회전해서 바람을 일으키듯이, 책장이 방사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책장을 높이 세우고 조용히 독서하는 여느 도서관과 분위기가 달랐다. 계단을 중심으로 모든 공간이 유기적으로 통했다. 누구나 쉽게 드나들고, 직관적으로 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이곳은 ‘광장’이나 다름없었다.

나에게 각인된 최초의 ‘광장’은 학교 운동장이었다. 땅바닥에 돌멩이로 그림을 그릴 때는 스케치북이 되었고, 느티나무 아래서 책을 읽으면 도서관이 되었다. 운동장에 이젤을 펼쳐 시화를 전시할 때는 야외 미술관으로 바뀌었고, 운동회가 시작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드는 체육관이 되었다. 운동장은 전 세대가 모이는 공동체 마당이었다.

조선일보

신미나 시인이 직접 그린 미술도서관 풍경. /신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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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아닌 과거 얘기냐고, 누군가는 핀잔을 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겉만 다를 뿐, ‘의정부미술도서관’의 넓은 로비는 운동장이나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오갈 수 있고, 손쉽게 예술 작품을 접하며, 예술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 과거의 ‘광장’이 현재에 이르러 거듭났으니, 이를 새로운 광장의 현현이라 부를까. 둥글게 뚫린 천장을 보니 막혔던 생각에 천천히 물꼬가 트였다.

나는 도서관 안쪽에 마련된 백영수 화백의 자료를 읽었다. 흰 장갑을 끼고 데이비드 호크니의 빅 북을 넘겼다. 마크 로스코와 박서보, 우키요에와 한국의 민화를 나란히 두고 보다가, 케테 콜비츠가 꽂힌 서가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나는 목적을 갖고 작품을 만든다. 구제받을 길 없는 약자들, 상담도 변호도 받을 수 없는 자들,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위해 한 가닥의 책임과 역할을 담당하려 한다.”

콜비츠가 전쟁 연작을 공개하면서 한 말을 떠올렸다. 전염병으로 발목이 묶인 요즘, 각자의 거리에서 일상을 지탱하는 이들을 어떻게 ‘광장’으로 불러낼 수 있을까. 혼자이면서, 동시에 여럿을 잇는 방법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

조선일보

격자무늬 유리창 한 칸은 원고지 한 칸으로 겹쳐 보였다. 신미나 시인은 수첩을 꺼내서 이렇게 적었다. ‘당신이 여기 온다면 볕이 깊게 드는 날이나, 저녁 어스름이 깔릴 무렵이 좋겠습니다. 태양의 입사각에 따라서 시시각각 변하는 그림자의 그리드를 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언젠가 이 곳에서, 당신의 영혼을 조용히 흔드는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이미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쳤다. 콜비츠의 판화는 단순하리만치 정직했다. 예술을 높은 선반 위에 올려두지 않고, 삶의 낮은 자리로 데려와 깊숙이 끌어안았다.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증언하는 삶. 즉, 삶 자체가 예술의 내용이었고 형식이었다.

콜비츠의 책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머릿속 안개가 조금씩 걷혔다. 어느새 격자무늬 유리창에 여명이 스며들었다. 칸칸이 남청색 빛이 들어찼다. 그때 느꼈다. 예술은 빛과 같음을. 빛은 누구에게나 공평히 빛나고, 단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 만인의 것이다. 빛은 잡을 수 없지만 유리창을 투과하고, 만질 수 없지만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높은 곳에서는 찬란히 빛나지만 기어이 낮은 자리까지 스며든다.

예술에 정해진 답은 없다. 단지 예술을 희구하는 저마다의 방법이 있을 뿐이다. 나는 태양의 입사각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그림자의 그리드를 보았다. 이 공간의 또 다른 주인이 빛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신미나 시인

[의정부미술도서관은?]

의정부 민락동에 지난 2019년 문을 연 ‘의정부미술도서관’은 미술관을 품은 도서관을 표방하는 국내 최초의 미술 전문 공공 도서관이다. 장서의 40%를 예술 관련 도서로 구성했다.

1층엔 미술 전문 서적과 잡지가 놓인 서가와 미술관, 2층엔 일반 서가, 3층엔 작가를 위한 창작 공간과 문화 예술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공간이 원형 계단을 통해 연결돼 있다. 전면 유리창으로 외부 풍경을 내부로 들였고, 서가 높이를 성인 키보다 낮춰 쾌적한 느낌을 준다.

이달 방탄소년단 리더 RM이 1층에서 책 읽는 모습이 공개돼 화제가 됐다. 도서관 소식과 전시 일정을 알리는 소셜미디어 계정을 팔로 하는 사람 수가 5300여 명에 이른다. /이기문 기자

☞신미나 시인은

1978년생. 웹툰 그리는 시인. 시를 쓸 때는 ‘신미나’, 그림을 그릴 때는 ‘싱고’란 이름을 쓴다. 2007년 등단해 시집 ‘싱고,라고 불렀다’, 시와 웹툰을 엮은 책 ‘詩누이’ ‘서릿길을 셔벗셔벗’ 등을 펴냈다.

[신미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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