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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양정무의 그림세상] 세뱃돈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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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지금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미술은 무엇일까. 갑자기 주변에서 미술작품을 찾아내라니 황당할 수 있겠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쉽다. 바로 지갑 속 돈이다.

이 답변이 의아하게 들린다면 지갑을 열어 지폐 한 장을 꺼내보면 된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발행되는 지폐는 총 4종류인데 모든 지폐마다 미술작품이 한두 개 이상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전 국민이 쓰는 화폐에 들어가는 그림이니 선택된 작품의 수준도 높아 한번 그 의미를 짚어보려 한다.



오만원권 신사임당 그림

만원권의 ‘일월오봉도’

천원권 속 ‘계상정거도’

예술이 있는 설날 맞기를

돈에 들어간 미술 중 최고의 작가는 신사임당이다. 오만원권에는 그가 수묵으로 그린 포도 그림이 당당히 들어가 있고, 오천원권에도 수박과 맨드라미 그림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돈에 신사임당 그림이 너무 많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우선 그 작품성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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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원권 뒷면에 있는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냇가에 조용히 머문다는 뜻처럼 보는 이에게 평화로운 마음을 선사한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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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원의 앞면 정중앙에 자리한 포도 그림의 경우 먹의 농담으로 초여름 잘 익어가는 포도송이를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주렁주렁 매달린 포도 열매는 동서고금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기 때문에 돈의 이미지와도 잘 어울린다.

사실 이러한 번영과 성공의 상징성은 오천원권에 들어간 신사임당의 그림에도 담겨 있다. 수박도 씨앗이 많은 과일로 다산과 풍요의 메시지를 갖고 있고, 맨드라미는 꽃의 모양이 닭의 볏 같다고 해서 실제로 벼슬, 즉 관운을 기원하기도 한다. 멋진 그림들이 이렇게 좋은 메시지까지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돈이 더 사랑스러워 보일 것이다.

지금 돈에서 가장 파격적인 그림을 뽑아 보라면 오만원권 뒷면에 자리한 매화 그림일 것이다. 그림 자체를 세로 방향으로 돌려놓아 발행 초기에 논쟁이 일었던 디자인이다. 여전히 이 디자인은 낯설지만 원래 이 그림이 긴 족자에 그려진 그림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납득이 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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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과 어몽룡의 그림이 들어간 오만원권 앞뒷면.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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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지폐를 세워놓고 조선 중기의 화가 어몽룡이 그린 매화를 보면 굵은 고목에서 새로운 가지들이 위로 솟아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화 자체가 추운 겨울을 뚫고 피는 꽃으로 고난의 극복을 보여주는데, 이 매화들은 죽어가는 고목에서 새로운 생명을 뿜어내고 있다. 게다가 이 매화 뒤로 탄은 이정이 그린 대나무까지 엷게 자리하고 있다. 강인한 매화에 그야말로 대쪽 같은 대나무까지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오만원권 뒷면에는 의지가 투철한 그림들이 버티고 있다.

오만원권에 밀려 옛날보다는 권위가 약해졌지만 세종대왕이 자리한 만원권에는 군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가 자리하고 있다. 해와 달, 그리고 다섯 봉우리를 그린 일월오봉도는 원래 왕이 앉는 용상 뒤에 자리했는데, 만원권에서도 세종대왕의 용안을 배경으로 좌우로 멋지게 펼쳐져 있다.

우리나라의 지폐 속 그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라면 단연코 천원권 속 그림이다. 지금 지갑에 천원이 있다면 그 뒷면을 보자. 지폐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그림이 바로 겸재 정선이 71세에 그린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라는 그림이다. 냇가에 조용히 머문다는 의미의 제목이 주는 느낌도 좋고, 시원하게 펼쳐진 산과 강의 느낌도 아주 좋다. 소나무 숲에 자리한 소박한 집이 주는 편안함과 그 속에 책을 읽는 사람의 모습까지 평화로움 그 자체다. 이 그림을 그린 겸재 정선은 원조 국민화가라고 할 만큼 살아 있을 때부터 그림 주문이 늘 산더미처럼 밀려들어 항상 바빴던 화가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의 그림은 이렇게 천하태평이다.

돈 속에 들어간 그림 이야기를 설 명절을 며칠 앞으로 두고 하니 더 신이 나는 것 같다. 지금은 일 년 중 신권을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때로 어느 때보다 말끔한 새 지폐 속에서 미술작품을 잘 감상할 수 있다. 아쉽게도 코로나 속에서 가족모임이 제한되면서 세뱃돈도 비대면 송금으로 대체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세뱃돈은 손에 잡히는 빳빳한 지폐여야 제맛일 것이다. 세뱃돈과 덕담이 오고 갈 때 돈 속에 들어간 그림 이야기를 잠깐 꺼내보는 건 어떨까.

사실 돈이 이렇게 우아한 미술의 옷을 입을 것은 치열한 돈을 좇는 경쟁 속에도 잠시라도 삶의 의미를 뒤돌아보는 여유를 가져보라는 뜻일 것이다. 다가오는 명절엔 잠깐이라도 성찰의 시간을 가져봤으면 하는 바람이며, 무엇보다 올 새해 덕담이 좀 더 예술적으로 승화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써본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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