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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경향의 눈] 도박판 대선의 ‘타짜’ 후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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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선거는 자주 스포츠 게임에 비유된다. 승패를 놓고 다투는 게임이나, 당선을 놓고 경쟁하는 선거의 본질은 다르지 않아서다. 스포츠 게임은 운동능력에 좌우되고, 선거의 영역에선 정치적 수싸움이 결과를 좌우한다. 스포츠가 정통파의 영역이라면 선거는 기교파의 세계라고나 할까. 선수 데이터가 축적된 스포츠 게임은 가끔 이변을 연출하지만 대개 예측 가능한 결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선거도 후보나 정당의 언행과 이념성향, 지지층 등을 기반으로 한 전망이 대체로 맞아떨어졌다. 데이터에 의존하는 현대 스포츠가 과학인 것처럼 선거도 과학의 영역이다. 그러나 이번 대선은 돌연변이다. ‘역대급 비호감’이라는 것 빼놓고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데이터는 부실하거나 부족하고, 구도는 어지럽다.

경향신문

이용욱 논설위원


무엇보다 두 대선 후보의 정체를 모르겠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언행만 보면 철학과 인간 됨됨이에 대한 판단이 불가능하다. 이 후보는 현안에 대해 과거와 다른 소리를 하고, 불리하면 말을 바꾼다. 탈원전 정책을 지지하다 감원전을 이야기하고, 국토보유세 도입 등 보유세 강화를 주장하다 공시가격 현실화 등 속도 조절을 주장했다. 전두환 비석을 밟더니 ‘전두환의 경제성과는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최근 이 후보 발언들을 종합해보면 지금은 없어진 ‘바른정당’ 후보라 해도 될 거 같다.

윤 후보도 종잡을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출마했다더니, “보수도 진보도 아닌 실사구시·실용주의 정치”를 주장한다. ‘주 120시간 노동’을 말했다가 타임오프제와 노동이사제에 찬성한다고 했다. 앞뒤가 달랐던 발언들은 셀 수 없을 정도다. 다만 이 후보의 말바꾸기가 계산된 것이라면 윤 후보의 말바꾸기는 본인도 의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관된 것이 있기는 하다. 곤란한 상황에서 나오는 말버릇이다. ‘아이참 거.’

더구나 두 사람의 공약들은 갈수록 닮아간다. 대대적 주택공급, 재건축 용적률 완화, 부동산 감세, 병사 월급 200만원. 2030과 중도에 대한 경쟁적 구애가 원인이라지만, 두 사람 공히 철학이 없다보니 이런 상황이 만들어졌다고 본다. 내용이 없으니 화려한 말로 치장하려는 행태도 닮았다. 이재명의 소확행, 윤석열의 심쿵약속. 성마른 이미지의 이 후보와 꼰대 스타일인 윤 후보에게 이런 네이밍은 어색하다.

두 사람의 부실은 기본 판을 뒤흔들었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회생하면서 ‘이재명 대 윤석열’ 양자구도는 안 후보가 포함된 3자 구도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그래도 안철수가 셋 중 제일 멀쩡하다’고 하면서 5% 안팎이던 안 후보 지지율이 10~15% 사이로 뛰어올랐다. 안 후보 지지율이 어떻게 될지, 야권 후보 단일화가 누구로 이뤄질지에 따라 판이 출렁댈 것이다. 이래저래 시야가 흐릿하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점에서 선거판은 도박판을 닮아간다. 두 후보가 성사 가능성이 희박한 포퓰리즘 공약들을 경쟁적으로 내놓는 것은 ‘한번만 크게 터지면 신세 고친다’는 타짜의 심보에 다름 아니다. 도박판의 현란한 속임수를 연상시키는 네거티브가 유난히 두드러지는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 한쪽에선 “네거티브 중단한다니까 진짜 중단하는 줄 알더라”고 하고, 다른 쪽에선 “제가 바봅니까”라고 삿대질하는 등 도박판 같은 풍경도 연출된다. 그런데, 도박영화들을 보면 속임수를 쓴 타짜의 손목은 으스러지거나, 심하면 잘린다. 도박판 룰을 적용한다면 네거티브의 최전선에 선 정치인들 중 멀쩡한 손목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도박판에서 기대할 것은 운밖에 없다. 대선판 초유의 무속 논란은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천공, 건진, 무정 등 윤 후보와 얽힌 무속인들의 이름이 선거판을 어지럽히고 있다. 김건희씨는 도사와 이야기하기를 즐기며 윤 후보와 자신이 영적인 끼로 연결됐다고 했다. 윤 후보가 무속인에 휘둘린다는 비판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무속까지는 아니지만, 민주당도 요행수를 바란다. 독선과 오만, 내로남불로 국민을 배신하고도, 수구보수를 찍을 수 없는 국민들이 결국 자신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막연하게 기대한다.

앞날은 더 암울하다. 둘의 정체를 모르니, 둘 중 누가 되든 어떤 나라가 만들어질지 도무지 그려지지 않는다. 대선까지 40여일 남았다. 그동안 둘의 생각을 알 만한 일말의 단서라도 잡히길 기대한다. 도박판에 전 재산을 거는 타짜의 심정으로 투표장에 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이용욱 논설위원 woo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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