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러시아가 독립을 인정한 돈바스 지역 친러 세력에 대한 제재 내용을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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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21일(현지시간) ‘평화 유지’ 명목으로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 병력 진입을 명령했다. 한국에서 7000km 이상 떨어져 있지만, 우크라이나에서 고조되는 전운은 한반도 안보에 큰 질문을 던진다. ‘바이든의 미국’이 동맹과 우방을 지키려는 의지는 어느 정도인지, 한국은 이 과정에서 동맹의 ‘진화’를 위해 어떤 협력을 할 수 있는지다. 한국 차기 정부의 한‧미 동맹 운용 시작점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중심으로 좌표가 찍힐 수도 있다.
1991년 수교한 미국과 우크라이나 간 관계는 ‘전략적 파트너십에 대한 헌장’에 기반을 둔다. 동맹은 아니지만, 미국은 대러 견제를 위한 핵심적 우방국인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 보전에 대해 ‘흔들림 없는’(unwavering) 지지를 수차례 표명해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이날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친러시아 분리주의자 세력인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의 독립을 승인한 데 대해 미국이 즉각 제재 등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친러 분리주의 공화국인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의 독립을 승인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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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건은 대응의 수위와 범위다. 러시아가 군사 행동의 의도를 명확히 한 이상 향후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어떻게 대응할 지가 우방에 대한 미국의 방위 의지를 입증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방국인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침공당하는데 미국이 실효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동맹국인 한국이 위협에 처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미 동맹의 기본이 되는 상호방위조약은 한쪽이 무력공격을 당할 경우 다른 한쪽도 자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대처하게 돼 있다. 미국은 이를 ‘철통 같은(ironclad) 방위 공약’으로 표현해 왔는데, 우크라이나 사태는 이런 공약을 미국이 어떻게 실제 행동에 옮길 것인지 가늠할 수 있는 간접적 시험대가 될 수 있는 셈이다.
상호방위조약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동맹은 양쪽 모두에 의무를 부과한다. 동맹을 제대로 지키려면 한국 역시 미국의 안보 우려 해소를 위해 할 역할이 있다는 뜻이다.
한국 역시 군사안보를 넘어서는 글로벌 동맹 관계로 확대하는 데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모양새를 취해왔다. 지난해 5월 문재인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은 정상회담 뒤 채택한 공동성명에서 “한국과 미국은 규범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저해, 불안정 또는 위협하는 모든 행위를 반대한다”며 “우리는 한‧미 동맹이 국제적 역할을 확대함으로써 중대한 도전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할 것임을 인식한다”고 선언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방위공약 의지를 알 수 있는 시험대인 동시에 한국 역시 새로운 동맹의 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돼 있는지 가늠하는 리트머스지가 될 수도 있는 셈이다.
구체적으로 미국은 이미 한국에 대러 제재 동참을 요청해놓은 상태다. 기존 대러 금융 제재의 빈틈을 메우는 동시에 반도체와 전자·정보통신, 센서, 레이저, 항법 및 항공우주 분야 핵심 제품 등의 대러 수출 금지 등이 주요 내용이 될 전망이다.
22일 오전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 뉴스 속보를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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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남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는 “러시아는 중요한 에너지 자원의 공급처이며, 유라시아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국가”라며 “미국 주도의 제재 동참 시 우리 기업들의 경쟁력 약화도 우려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해 기준으로 대러 수출은 전체의 1.5%, 수입은 2.8% 정도로 규모가 작다. 국내 기업의 러시아 반도체 수출액도 약 7400만 달러(약 883억원) 정도로 그리 큰 규모가 아니다. 직접적 타격은 크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고명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이 제대로 제재에 나섰을 때 입을 막대한 피해를 알기 때문에 러시아 역시 물리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면서도 전면전의 레드라인을 넘지 않기 위해 평화 유지 같은 이유까지 대며 우회 전술을 쓰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또 “이처럼 억지력을 지니는 제재의 핵심은 동맹을 총동원한 포괄적 이행에 있고, 특히 극동 지역 문제라는 측면에서 미국이 한국과 일본에 거는 기대가 크다”며 “이번에 대러 제재에 어떤 입장을 보이느냐가 동맹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래픽= 전유진 yuki@joongang.co.kr |
이번 제재 동참이 경제적 영향 못지않게 동맹 관계에 큰 정치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는 이날 “러시아의 국제법 위반을 강하게 비난한다”며 제재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차기 대선이 불과 보름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이는 결국 차기 정부의 숙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문재인 정부는 이날 신중한 입장으로 일관했다. 문 대통령은 오전 국가안보회의(NSC)를 주재하며 “미국과 서방국가들은 강력히 규탄하며, 즉각적인 제재조치를 준비하고 있다”고 국제동향만 소개했다. 정부 공식 입장 역시 “정부는 우크라이나의 긴장 고조 상황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외교부 대변인 성명) 수준이었다. 러시아의 행위에 대한 판단 자체가 빠졌다.
문 대통령은 제재에 대해서도 “미국 등 서방국가들이 러시아에 대해 강도 높은 제재조치를 취하게 되면 우리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산업통상자원부 당국자는 “수출 제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시에 24시간 내에 이뤄지는 것으로 돼 있기 때문에 실제 침공이 이뤄지는지, 그럴 경우 제재 수준은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가 먼저 결정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전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에서 열린 ‘2022년도 국가안전보장회의 및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 연석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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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국은 한‧미 동맹을 우선시하되 에너지 수급이나 물가에 미칠 영향 등 중요한 현안 등 측면에서 무엇이 국익에 우선하는지 무게중심을 잡고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동맹을 넘어 역내 안보에 대한 질문도 던진다. 중국에 가질 수 있는 함의다.
이미 구도는 바이든 대통령이 공언한 대로 미국이 ‘권위주의 세력에 의한 일방적 현상 변경 시도’를 동맹 및 우방과 함께 저지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됐다. 바이든 행정부의 대러 견제를 통해 대중 견제의 방식과 수위도 엿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미국이 이번에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미‧중 경쟁 국면에 놓인 중국으로선 미국이 대중 견제의 큰 원칙으로 외쳐온 동맹과 우방 규합이 실제로는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인식할 수 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해 미온적 대처를 한다면 대만 문제에서도 말과 달리 적극적 대응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고 분석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친러시아 분리주의자들이 선포한 자칭 도네츠크 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LPR)의 독립을 승인한 21일(현지시간) 도네츠크 중심부에서 주민들이 러시아 국기를 흔들며 독립을 기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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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을 포기한 우크라이나가 처한 상황을 지켜보는 북한의 심경도 복잡할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가 지금 겪는 위기는 핵을 내려놨기 때문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는 지난 5일 '우크라이나는 30년 전 거대한 핵무기를 포기한 걸 후회한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소련이 붕괴했을 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미국 등으로부터 국가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수천개의 핵무기를 내줬다”며 “그러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같은 리더가 급부상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고, 지금은 우크라이나 내에도 핵무기를 갖고 있던 과거가 오히려 더 나았다는 여론도 있다”고 보도했다. 전직 우크라이나 국방 당국자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과 우리의 (핵) 능력을 맞바꿨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핵을 포기해도 미국이 온전한 안전 보장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이번에 보여줄 수 있는지가 북한의 판단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셈이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김남준 기자 kim.nam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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