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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노모 살인한 아들, 구더기는 알고 있다”…경찰, 국내 최초 법곤충감정실 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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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신문

2021년 7월16일 경찰은 아들이 “80대 노모가 사망했다”고 신고한 변사 사건의 수사에 나섰다. 노모의 괴사 상처에서 발견된 구더기 길이가 약 1∼1.5㎝로 사망 3일 전 산란한 것(승저증)으로 추정됐기 때문이다. 승저증은 살아 있는 동물에서 구더기가 발견되는 증상이다. 노인이나 유아를 상대로 한 방임·학대의 증거로 활용된다. 경찰 조사 결과 아들은 병든 노모를 제대로 간호하지 않고 방치해 사망에 이르게 한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아들을 존속유기치사 혐의로 검찰에 송치됐다.

2019년 6월6일 경기 오산시의 한 야산에서 백골 시신이 발견됐다. 유골 주위의 곤충 번데기들을 살펴보니 검정뺨금파리, 큰검정파리, 떠돌이쉬파리였다. 이 곤충들의 출현 시기는 매년 10월이어서 유골은 2018년 10월 이전에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됐다. 당초 경찰은 2019년 초 살인 사건이 발생했을 것으로 봤으나 법곤충감정 결과에 따라 수사 범위를 대폭 좁힌 것이다. 용의자들을 붙잡아 조사해보니 살인 사건은 2018년 9월8일 발생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곤충을 통해 사망시간을 추정하는 법곤충 감정기법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위해 17일 충남 아산시에 있는 경찰수사연수원에 법곤충감정실을 개소했다. 경찰은 법곤충감정실을 통해 변사 사건뿐 아니라 방임·학대 사건에 대한 수사 지원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사망시간은 변사 사건에서 정확한 사인을 규명하기 위한 주요 단서다. 통상 체온 하강, 시신 얼룩(시반), 시신 경직(시강), 위 내용물 소화 상태로 사망시간을 추정하는데, 오래되거나 부패한 시신의 경우 이런 방법만으로는 사망시간을 예측하기 어렵다. 법곤충감정은 곤충별로 온도에 따른 성장 속도가 일정하다는 특성을 활용해 중장기적인 사망시간을 추정한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는 주요 대학에 법곤충학 석·박사 과정이 운영될만큼 보편적인 수사기법으로 자리잡았다.

국내에서는 세월호 사건으로 도피 중 2014년 6월12일 전남 순천에서 숨진 채 발견된 유병언씨 변사 사건에 법곤충감정이 처음 적용됐다. 먼저 유씨의 시신에서 검출된 구더기의 부화 시각을 분석해 알에서 깨어난 시점을 6월4일로 추정했다. 여기에 같은 달 2일부터 4일까지 현장에 비가 내린 점을 감안해 사망시각을 6월2일로 결론내렸다. 당시 사망 시기와 원인을 두고 숱한 의혹이 제기됐는데, 법곤충감정을 통해 과학적으로 사망시간을 특정한 덕에 의혹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었다.

국내에는 별도의 법곤충감정실이 없고 전문인력도 부족하다. 한국의 계절이나 지역 특성을 반영한 법곤충 데이터가 없어 수사에 활용하는 데 한계가 많았다. 이에 경찰은 2016년부터 5년간 고려대 법의학교실의 도움을 받아 법곤충 관련 연구를 진행했고, 한국에 서식하는 주요 시식성 파리 3종의 성장데이터를 구축하는 등 조사 기반을 마련했다. 이번에 경찰수사연수원에 문을 연 법곤충감정실은 그간의 연구 성과를 현장에 적용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남구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은 “법곤충 감정기법을 통해 변사 사건 수사역량이 더욱 강화될 것으로 기대된다”며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국가의 마지막 사회적 책무인 만큼 모든 변사사건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세밀하게 살피겠다”고 말했다. 박성환 고려대 법의학교실 교수는 “법곤충 전문인력 양성과 연구 활성화를 통해 우리나라 법곤충 분야가 더욱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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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충남 아산시에 위치한 경찰수사연구원에 차려진 법곤충감정실. 경찰청 제공


구교형 기자 wassup0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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