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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치킨뼈 화석, 플라스틱 화석’ 나올 지구…12m 쓰레기 지층 파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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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쓰레기매립지였던 산 파보니

라면 수프, 아이스크림 비닐 포장 등

부패되지 않은 플라스틱 쓰레기 나와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 등

국내 최초 쓰레기매립장 시추

인간 활동이 자연 운동 바꿔

“매립장도 지층 될 수 있다”


한겨레

한국과학기술원 인류세연구센터와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경기 평택 도일동의 한 야산에서 벌인 쓰레기매립장 시추조사에서 남욱현 지질자원연구원 선임연구원이 시추된 토양층을 들어 보이고 있다. 오른쪽에 부패하지 않은 플라스틱 비닐더미가 보인다. 평택/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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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룽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들어서자, 늦봄의 더위는 사라졌다. 초등학생 키만 한 은행나무에는 어린잎이 돋아나 있었고, 산딸기 꽃은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고 있었다. 24일 찾은 경기 평택시 도일동의 한 야산은 5월의 초록빛으로 가득했다.

녹음이 우거진 산에서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인류세연구센터와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연구팀은 시추 기계에 지름 5㎝ 정도의 기다란 철봉을 끼워 땅을 뚫었다. 한 번에 1m씩 뚫어 시료(흙)를 빼낸 뒤, 다시 1m짜리 철봉을 추가해 끼우는 식으로 땅속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작업 초반에 출토된 것은 적황색 흙뿐이었다. 시추봉이 지하 4m 지점에 이르자 ‘스크류바’라고 적힌 아이스크림 포장지가 나왔다. 땅을 더 파고 내려가자 다양한 색깔의 비닐과 옷가지, 비료 봉투, 스티로폼 등이 줄줄이 딸려 나왔다. 모두 플라스틱이었다.

땅속 12.5m 지점에서는 ‘이백냥’이라고 적힌 라면 수프 봉지가 나왔다. 이백냥은 1986년 농심이 ‘신라면’을 출시하자, 이듬해 경쟁업체인 삼양에서 출시한 매운맛 라면이었다. 당시 신라면과 같은 200원이었는데, 신라면만큼 인기를 끌지못하고 단종됐다. 지하 12m 지층은 적어도 1987년 이후에 쌓인 것으로, 쓰레기가 묻힌 지층은 인류 활동의 연대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한민 지질자원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초반에 나온 적황색 흙은 쓰레기를 매립하고 난 뒤, 인위적으로 흙을 덮은 복토층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플라스틱이 아닌 쓰레기는 한 정당이 창당됐다는 뉴스가 실린 신문조각뿐이었다. 습도와 토양 성분에 따라서 종이가 부패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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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도일동의 옛 쓰레기매립장에서 토양과 함께 시추돼서 나온 아이스크림 비닐 포장지. 평택/남종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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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쓰레기를 묻은 것은 1980년대로 추정된다. 공식적으로 시작된 건 1987년이다. 평택시 자원순환과 관계자는 “1987년부터 송탄시(옛 평택시 일부) 차원에서 매립을 시작해 1992년까지 총 26만톤을 묻었다”며 “현재 주변환경영향평가 결과 안정화 기준을 만족해서 사후관리는 끝난 상태”라고 말했다. 쓰레기 매립지가 흙으로 덮인 뒤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숲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하지만 땅속은 여전히 썩지 않은 쓰레기로 가득했다.

쓰레기매립장도 20세기 중반 이후 세계 확산


지질학자들은 지금 인류가 사는 시대를 ‘신생대 제4기 홀로세’로 규정하고 있다. 약 1만년 전부터 지금까지의 지질시대가 홀로세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현재 인류가 사는 시대를 새로운 지질시대인 ‘인류세’로 정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노벨화학상을 받은 네덜란드 화학자 파울 크뤼천이 대표적이다. 2010년대 중반부터 국제지질학연맹은 인류세를 등재할지 검토하고 있으며, 연맹 산하 실무 연구그룹은 1950년대가 인류세의 시점에 해당한다고 보고했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는 플라스틱 등 자연이 아닌 인류가 만든 물질이 널리 퍼지고 온실가스가 급증한 ‘소비자본주의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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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도일동의 옛 쓰레기매립장에서 토양과 함께 시추돼서 나온 라면 수프 비닐 포장지. 평택/남종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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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의 지표 화석 후보로는 플라스틱이 거론된다. 플라스틱은 현 인류가 만든 물질이면서 땅속에서 썩지 않고 오래 남는다. 이날 발견된 스티로폼도 미국의 화학업체 다우케미칼이 1940년대 발명한 물질로, 20세기 중후반 단열재, 포장재로 인류의 일상에 들어왔다. 그 어느 것도 자연적으로 존재한 적 없던 물질이다.

남욱현 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현대적인 개념의 위생 쓰레기매립장은 1950년대 전 세계로 확산해 분포하기 시작했다”며 “과거에는 퇴적물 운반과 퇴적이 자연의 힘으로 이뤄졌으나, 지금은 95% 정도가 사람에 의해 이뤄진다”고 말했다. 그는 현대의 쓰레기매립장이 지질학에서 논의되는 ‘지층’으로 인정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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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도일동의 옛 쓰레기매립장에서 토양과 함께 시추돼서 나온 물질들. 대다수는 부패해 없어지고 아이스크림과 라면 수프 봉지 등 플라스틱 물질만 남았다. 부패하지 않고 남은 신문조각도 볼 수 있었다. 평택/남종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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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뼈도 인류세의 지표 화석 후보로 꼽힌다. 지난해 국내에서 도축된 닭은 10억3564만 마리다. 국내 치킨 전문점 수는 2013년 3만6천곳을 넘어서면서, 전 세계 맥도날드 매장 수(3만5429곳)를 앞지른 지 오래다. 고생대 삼엽충과 중생대 암모나이트처럼 후대가 플라스틱과 닭뼈를 인류세의 지표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시추에서 닭뼈는 발견되지 않았다. 닭이 일상 속으로 들어와 한국이 ‘치킨민국’이 된 것은 200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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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도일동의 옛 쓰레기매립장은 겉보기에는 야트막한 야산과 숲처럼 보였다. 먼 미래에 쓰레기를 품은 지구의 모습도 이러할 것이다. 평택/남종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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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으로 전시 계획


이날 쓰레기매립장 시추는 저녁이 되어서야 끝났다. 16.6m를 파고 들어가자 쓰레기가 사라지고 회색 토양이 나타났다. 원래 있던 기반암이 화학적으로 풍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민 연구원은 말했다. 박범순 인류세연구센터장은 “현대 문명의 산물인 쓰레기가 지층의 일부를 형성하는 모습을 관찰하며, 인간이 지질에 미친 영향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두 기관 연구팀은 앞으로 옛 쓰레기매립장을 시추해 이를 인류세의 대표 지층으로 학계에 제안하고, 시추한 내용물을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평택/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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