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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깎인 임금만큼 업무량 줄여야"…'인건비 줄이기'용 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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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임금피크제’ 가이드라인… 혼란·갈등 불가피

도입 목적 정당성·삭감 정도 등

효력 여부 대한 판단기준 제시

불충족 기업, 정년 연장 등 전망

임금채권 소멸 시효 퇴직 후 3년

퇴직자도 임금 반환 소송 나설 듯

세계일보

서울 서초구 대법원 모습.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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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26일 “합리적 이유가 없는 임금피크제는 무효”라는 판단을 내리면서 산업현장에서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혼란과 갈등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이 임금피크제의 효력 여부에 대한 ‘판단 기준’을 제시했지만, 임금피크제의 ‘적정 수준’은 개별 사업장마다 다르다고 판시해서다. 각 회사의 임금피크제 위법 여부를 확인하려는 근로자들의 소송이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고령화 추세 속에서 고용 안정을 위해 정년을 보장하는 대신 임금을 삭감하자는 취지로 2000년대에 도입된 임금피크제의 근간이 무너질 수 있다는 전망과 함께 ‘올바른 임금피크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날 대법원이 제시한 임금피크제 효력 기준은 △도입 목적의 정당성 및 타당성 △실질적 임금삭감 정도 및 기간 △임금삭감에 준하는 업무량 감소 여부 △감액된 재원이 본래 목적으로 사용됐는지 여부 등 4가지로 나뉜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에서의 임금피크제는 정년이 고정된 채 업무량 감소 등도 없이 임금만 삭감해 무효 판결이 나온 것”이라며 “타 회사의 임금피크제에 대한 판단은 별도의 종합적인 고려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법조계에선 현재 임금피크제 대상 근로자는 물론이고 퇴직자도 임금 청구 소송에 나설 것으로 예상한다. 임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임금 채권의 소멸시효는 퇴직 후 3년까지다. 퇴직한 지 3년이 안 된 퇴직자들은 이번 판결을 참고해 과거 재직 중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삭감된 임금을 반환하라는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이미 1심이나 2심에 계류 중인 관련 소송들에서도 근로자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커졌다.

임금 채권이 소멸했더라도 회사로부터 임금에 준하는 합의금을 받아내는 소송도 이어질 수 있다. 근로기준법상 회사의 위법행위에 대한 공소시효는 5년이다. 회사를 떠난 지 3년이 지났지만 5년은 안 된 퇴직자는 임금피크제 무효를 주장하며 노동청에 전 회사를 신고할 수 있다. 이 경우 회사는 사법 조치를 피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퇴직자와 합의에 나서고, 퇴직자는 삭감된 임금 일부를 합의금으로 받은 뒤 신고를 취하해주는 일종의 ‘거래’가 이뤄질 수 있다.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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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송은 대기업에서 더 빈번하게 일어날 전망이다. 고용노동부의 ‘2021년 6월 말 기준 사업체노동력조사 부가조사결과’에 따르면 정년제를 운용 중인 34만7422개 업체 중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곳은 전체의 22.0%인 7만6507곳이다. 규모가 ‘300인 이상’인 사업체 경우는 총 3265곳의 절반 이상(53.6%)인 1750곳이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공공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 제기도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임금피크제는 박근혜정부에서 노동자의 정년을 60세 이상으로 늘리는 ‘60세 정년’ 의무화에 발맞춰 2015년 말 모든 공공기관에 도입해서다.

일선 기업에선 대법원이 제시한 기준에 따라 부랴부랴 임금피크제 내용 수정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임금피크제 적용자의 업무강도를 낮춰주거나, 정년을 연장하는 식이 될 전망이다. 익명을 요구한 노무사는 “기업 인사 평가를 하다 보면 나이만을 기준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회사가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장에선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커질 것을 대비해 정부 등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용노동부 또는 노사정 합의체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대법원 판단 기준에 맞춰 올바른 임금피크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석열정부가 국정과제로 선언한 공공기관 직무급제 추진 또한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종혁 한국공인노무사회 부회장은 “임금피크제가 사회 고령화로 연공급 임금 체계를 유지하면 노동 생산성이 떨어지니 이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됐는데, 소송이 잇따르면 임금피크제 제도 자체가 흔들리게 될 것”이라며 “현장에서 임금피크제가 점점 축소되고 연공급제가 한계에 부딪히면 직무급제로의 전환 논의가 본격화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이동수 기자 d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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