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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벚꽃필때 靑서 태어났다…이승만이 '김경숙' 이름 준 아기 정체 [청와대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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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백과사전 4]







▶청와대 백과사전 1- 걸어서 한바퀴(시설물과 등산로)

▶청와대 백과사전 2- 알고 걷는 재미(자연유산 문화유산)



▶청와대 백과사전3-서울 타임캡슐 인근 동네 한바퀴



▶청와대 백과사전 4-전면개방까지83년

▶청와대 백과사전 5-보이지 않는 물길

▶청와대 백과사전 6-풍수 이야기

청와대들 둘러본 이들의 반응은 ‘우와’파와 ‘애걔’파로 나뉜다. 전자는 생각보다 크고 호화롭다는 쪽이고, 후자는 소문과 달리 별거 아니라는 쪽이다.

금단의 땅, 구중궁궐, 철옹성…. 쉽게 접근할 수 없던 청와대를 두고 하던 말들이다. 철옹성은 쇠로 만든 항아리처럼 방비가 튼튼한 성을 말한다. 평안북도 영변에 고구려 때부터 실제 있는 성이다. 근처에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으로 익숙한 약산이 있다. 공교롭게도 철옹성 바로 아래 영변 핵시설이 있다. 막상 문을 열고 보니 청와대는 금칠한 아방궁도 철옹성도 아니다. 신경 써서 관리한 큼지막한 정원이랄까.

청와대 개방은 역대 대통령들의 단골 이벤트였다. 여기에는 패턴이 있다. 국민과 터놓고 소통하겠다 → 소통하겠다 → 하겠다 → (…) → (……). 정권 후반기로 갈수록 권력자들은 대중 앞에 나서는 빈도가 줄어든다. 그러면서도 청와대는 조금씩 개방 폭을 넓혀왔다. 지난 정부 때는 핵심시설을 제외하고는 다 둘러볼 수 있었다. 마지막 남았던 공간도 곧 모두 공개한다.

청와대가 그간 어떤 순서로 문을 열어왔는지 살펴본다.

중앙일보

1955년. ″어린이 여러분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인재가 돼야합니다″ 경무대에서 어린이들을 만나는 이승만 대통령. 탁자 위에 선물이 쌓여있다. [국가기록원 기록물 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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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 코스, 이승만

경내 개방은 초대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있었다. 한국전쟁 뒤의 혼란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서였다. 1957년부터 날짜를 정해 경무대(景武臺 청와대 옛 이름) 바로 앞까지 공개했다. 이 해에 만삭의 임산부가 벚꽃 구경을 하다가 안뜰에서 아기를 낳았다. 소식을 들은 이 대통령은 경무대의 첫 글자를 따서 김경숙(金景淑)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경무대동이’라는 별명을 얻은 아이는 이듬해 1월 경무대 초청을 받고 대통령 부부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1988년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수소문 끝에 세무공무원이 된 경숙 씨를 30년 만에 만났다. 지방에서 서울로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경무대를 구경하기도 했다.

중앙일보

청와대에서 시민들을 만나는 윤보선 대통령. 1961년 4월 15일자 경향신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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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에서 청와대로, 윤보선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고 8월에 윤보선 대통령이 취임했다. 12월 30일 경무대는 청와대로 이름을 바꿨다. 다음 해 4월 15일 윤보선은 청와대 문을 열고 상춘객들을 만난다. 그때 경향신문 기사 내용이 다음과 같다.

『허허! 요즈음은 내 집이 한결 사람 사는 맛이 나는구료-』 十四일 평민대통령 해위(海葦)선생은 골덴복에 스틱을 짚은 채 청와대를 찾아든 상춘객들과 환담을 하고 있었다. 지난날 줄지어 질서정연(?)히 경무대를 구경하던 긴장된 시민의 모습은 볼 수 없었고 환해진 얼굴로 마음껏 대통령 관저일대를 구경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이날 하루에도 청와대를 찾는 시민은 무려 四만 여명이나 된다고…



한 달 뒤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광화문 문루 네 곳에 벙커, 박정희

박정희 대통령도 집권 초반에는 제한적이나마 청와대를 열었다. 어린이날이면 아이들을 만나 공책과 연필을 나눠주고 방문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1966년에는 4월 1일부터 27일까지 개방했다. 첫날 1만여 명이 방문했다. 1967년 4월 22일에는 4만3000여명이 방문했다. 대부분 시골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습격했다. 이때부터 청와대는 외부에 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다. 1974년 광복절에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 총에 피살된 뒤 통제는 더 심해졌다. 청와대 주변 도로를 전면 차단하고 인왕산과 북악산 등산로도 막았다. 이해 12월 11일 콘크리트로 만든 광화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 귀퉁이에는 방어시설인 벙커를 설치했다. 인근 주민들은 재산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생활도 제한받았다.

1년도 못 채운 최규하



최규하 대통령은 1979년 12.12쿠데타 뒤부터 1980년 8월까지 청와대에 머물렀다. 권한대행 기간을 포함해 10개월 정도다. 취임 초에는 관저를 수리하느라 총리 관저에서 79일간 청와대 집무실로 출퇴근했다. 극도로 혼란한 정국이었으니 청와대를 개방할 여유도 없었다.

중앙일보

1983년 10월 버마 아웅산 테러 직후 현장을 조사하는 한국과 버마 합동조사단.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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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걸어 잠근 전두환



전두환 대통령은 취임식 날 골라 뽑은 시민들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취임 초인 1980년 말에는 효자동과 팔판동 일대 통행을 일부 허용했다. 1983년 10월 미얀마 아웅산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난 뒤 일대는 다시 전면통제로 돌아갔다. 그 뒤로는 특별한 날에나 청와대 문을 열었다. 1984년에 경내 첫 전통 한옥인 상춘재를 짓고도 준공식을 하지 않았다.

중앙일보

1988년. 청와대를 방문한 시민들. 뒤로 인왕산이 보인다. [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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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 총재도 참석한 본관 준공식, 노태우



노태우 대통령은 선거공약으로 청와대 개방을 내세웠다. 취임 뒤 1988년 3월 1일 충북 음성에서 온 나환자 300여 명 등 959명을 영빈관으로 초청했다. 다음 해는 2월 24일부터 5일간 전국에서 온 5000여 명이 경내를 관람했다. 노 대통령 때 청와대 본관을 지었다. 준공식에는 당시 김대중 신민당 총재도 참석했다. 준공 다음 날 첫 공식행사에는 회사원 택시기사 주부 등 ‘보통사람’을 초청했다. 하지만 상시 개방이 아닌 상징적인 행사였고 개방은 점차 흐지부지됐다.

중앙일보

1993년 5월 5일. 청와대는 어버이날을 맞아 어르신 203명을 초청했다. 몸이 불편해 직원의 등에 업혀 입장하는 노인을 맞는 김영삼 대통령 내외.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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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끈하게 풀었다, 김영삼



1993년 2월 25일 정오, 청와대 앞길을 가로막고 있던 바리케이드가 사라졌다. 낮에는 승용차와 관광버스가 이 길로 다니게 됐다. 효자로는 오전 6시부터 자정까지, 팔판로는 24시간 내내 화물차를 빼고 모든 차의 통행을 허용했다. 민간인에게 청와대 앞길 개방은 1·21사태 뒤 처음이었다. 개방 초에는 구경꾼이 몰려 주말마다 일대에 교통 혼잡이 빚어졌다. 인왕산 등산로도 일반인에게 열었다. 주변 환경도 바뀌기 시작했다. 중앙일보는 당시 분위기를 아래와 같이 전했다. (1993년 2월 28일 19면)

청와대일대 땅값 “들먹”/옥인·효자동 등 “도심 최고주거지역” 눈독/고도제한 완화 소문도 가세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과거 25년 동안 일반인 출입을 통제했던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 등산로가 25일부터 개방됨에 따라 옥인동·누상동·효자동·팔판동 등 서울중심지 10여개 동 일대의 부동산경기가 꿈틀거리고 있다.

특히 서울시가 이 지역의 개방에 따라 효자로·삼청동길을 중심으로 한 청와대·경복궁주변 6천필지 35만여평에 대한 고도제한을 현재의 10∼15m에서 12∼20m로 완화할 계획으로 알려져 땅값 부추김을 자극하고 있다.


◇거래문의 급증=26일 이지역 일대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통제조치가 풀린 25일 이후 부동산중개업소 등에는 시세와 매물종류 등을 문의하는 전화가 하루 최고 20통씩 걸려오고 있으며 부동산업소를 직접 찾는 사람들도 부쩍 늘고 있다는 것이다.특히 풍치지구로 지정된 인왕산 입구지역이 올 상반기 중 해제될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아 본격 이사철이 되면 매물 등을 찾는 발길이 잦아질 전망.

◇부동산 가격=인왕산 자락을 끼고 있는 청운동 청운아파트(5백76가구) 11평형은 한달 전까지만 해도 5천만 원에 거래됐으나 최근 들어 7천만∼8천만 원을 호가하고 있다.지난해 말까지 1억 원 선에서 거래됐던 옥인동 옥인아파트(3백여 가구) 18평형도 1억2천만원선으로 올랐고 앞으로 값이 더욱 오를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매물은 자취를 감춘 실정이다.


◇개발전망=69년에 건축된 5층 규모의 청운아파트주민들이 재건축을 추진하고 있으며 청운동 56일대 노후불량주택 50여 가구 주민들도 재개발을 요구하고 있어 고도제한규정이 완화될 경우 도심과 가까운 최적의 주택지로 개발될 전망이다.이밖에도 서울시는 신교동 12일대 2천 평과 누상동 166일대 2만여 평을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이미 지정했으며 옥인동 47일대 3만여 평도 지구지정을 추진 중이어서 주민들은 개발기대에 부풀어 있다.〈정형모·이훈범기자〉



날짜만 바꾸면 2022년 현재 상황과 흡사하다.

중앙일보

2001년 11월 22일. 공개한 칠궁을 둘러보는 용인 용마초등학교 학생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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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 관람객 20만 명, 김대중



김대중 대통령 때는 개방구역과 대상이 더 늘어났다. 단체만 가능하던 관람을 취임 첫해인 1998년에 개인과 외국인에게까지 허용했다. 이 해에 관람객이 20만 명을 넘었다. 2001년 11월에는 칠궁도 열었다.

중앙일보

2007년 4월5일. 노무현 대통령 내외가 서울 성곽을 따라 숙정문을 거쳐 와룡공원에 이르는 새 개방구간을 유홍준 문화재청장과 둘러보고 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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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산과 신무문까지, 노무현



노무현 대통령 때는 본관을 경유해 녹지원까지 둘러볼 수 있게 됐다. 2004년 10월 19일에는 경회루도 개방했다. 이때까지 경회루는 2층에서 청와대가 보인다는 이유로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었다. 2006년 9월엔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을 열었다. 1·21사태 뒤 38년 만이었다. 다음 해 4월에는 숙정문이 있는 백악산 성곽로를 열었다. 청와대 주변 등산로 개방은 처음이었다. 노 대통령은 “혼자 보기가 좀 미안한 것 같더라"고 소회를 밝혔다.

중앙일보

2009년 8월1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광복절 행사를 마친 뒤 8000번 버스를 타고 청와대 앞에서 내리는 이명박 대통령.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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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8000번 버스, 이명박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은 분수대 앞에 관광홍보관인 청와대 사랑채를 열었다. 8000번 버스도 다니기 시작했다. 청와대 앞길을 다니는 시내버스는 처음이었다. 분수대 앞~국립민속박물관~경복궁~안국동~조계사~종각역~을지로 입구~롯데백화점~북창동~숭례문~서울역 순환코스를 운행했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만 허용하던 청와대 관람을 매주 토요일로 확대했다. 8000번 버스는 4년 8개월 만에 없어졌다. 20억 원에 달하는 누적 적자 때문이었다. 노선을 두 차례 바꿨지만 늘지 않았다. 당시 시내버스 한 대당 평균 승객은 하루 700여명인데 이 버스는 100명이 안 됐다.

다시 구중궁궐, 박근혜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대중과 거의 만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간 진행해온 개방을 되돌리지는 않았다. 탄핵 뒤 치러진 대선에서 집무실 이전이 공약이 다시 등장했다.

중앙일보

청와대를 방문한 시민들에게 인사하는 문재인 대통령.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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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산을 다 풀었다, 문재인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취임 다음 달인 6월 26일부터 청와대 앞길을 완전히 개방했다. 이때부터 검문 없이 밤에도 다닐 수 있게 됐다. 2020년 11월 1일에는 북악산 북측 등산로를, 퇴임 직전에는 남측 면까지 열었다. 이로써 백악산은 54년 만에 막힘없이 다니게 됐다.

중앙일보

청와대와 경복궁 일대는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해왔을까.

고려시대부터 서울 천도를 꿈꿨다



고려는 수도 개경 바깥에 삼경(三京)과 삼소(三蘇) 두었다. 풍수지리와 도참사상의 영향이다. 문종 때는(1067년) 지금의 서울 일대인 양주 이름을 남경(南京)으로 바꿨다. 이듬해 신궁(新宮)을 지었는데 지금의 청와대 자리로 추정한다. 그 뒤 여러 왕이 이용하던 왕궁은 인종 때(1128년) 불이 난 뒤 온전히 복구되지 않았다. 1232년 몽골군이 침입하자 고종은 강화로 천도했다. 공민왕은 고려를 다시 일으키려 남경 천도를 꿈꿨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우왕과 공양왕 때도 천도를 추진했지만 고려는 이미 기울어가는 나라였다.

중앙일보

겸재 정선 그림 '경복궁'. 1754년(영조 30)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50여 년이 지난 뒤에도 복구를 못한 경복궁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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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한옥 두 채가 전남 영광에 간 이유

조선 시대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神武門)밖에는 회맹단이 있었다. 지금의 청와대 자리다. 회맹(會盟)은 왕이 천지신명 앞에서 맹세하고 논공행상을 행하는 의식이다.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다. 고종 때 중건하기까지 270여 년간 폐허로 있었다. 청와대 일대도 마찬가지다. 그때 왕들은 주로 창덕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경복궁은 중건 뒤 1896년까지 34년간 다시 제1궁 역할을 했다. 다시 전각들이 들어차며 궁 안이 비좁아지자 청와대 지역에 후원을 만들며 부속 건물들을 지었다. 융문당과 융무당을 만들고 일대를 경무대(景武臺. 융문당 후문이 경무문)라고 이름을 붙였다. 융문당은 과거 시험장이고 융무당은 군대를 사열하거나 훈련을 참관하는 곳이다. 지금의 상춘재와 녹지원이 일대다. 이들을 포함해 오운각, 옥련정 등 모두 488칸의 건물이 있었단다. 1905년에는 옥련정 가까운 곳에 연회장용으로 침류각을 지었다.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이들 건물 상당수가 사라졌다.

융문당과 융무당은 1928년에 해체해 진언종(일본 불교 종파) 사찰인 용광사(한강대교 근처)로 이전했다. 용광사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 사망자들 납골당이었다. 광복 뒤 1946년에는 원불교가 이를 인수해 서울교당으로 썼다. 2006년에는 두 채 모두 전남 영광 원불교 영산성지로 옮겼다.

중앙일보

융문당과 융무당. [문화재청 '사진으로 보는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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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는 총독관사



1896년 아관파천 때 고종은 경운궁으로 처소를 옮겼다. 그 뒤 경복궁의 많은 전각을 허물어 경운궁 증축 자재로 썼다. 일제는 경복궁 자리에서 조선물산공진회 열었다. 조선과 일본의 문물을 전시해 선진 일본을 자랑하려는 목적이었다. 행사용 가건물 지을 터를 닦느라 궁내 전각들이 다시 헐려 나갔다. 청와대 일대의 전각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제는 1926년 10월 경복궁 안에 새 총독부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은 광복 뒤 중앙청,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다가 1996년 김영삼 정부 때 철거했다.

1939년, 일제는 공원으로 남아있던 경복궁 북쪽에 조선 총독관사를 지었다. 관사 이름은 고종 때부터 일대를 부르던 경무대를 가져다 붙였다. 구역의 이름이 건물 이름이 된 셈이다.

광화문 1번지, 세종로 1번지, 청와대



1945년 일제 패망 뒤 경무대는 미군정 책임관 하지 중장의 거처가 됐다. 뒤이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집무실 겸 관저가 됐다. 1960년 4·19혁명 뒤 윤보선 대통령은 경무대 이름을 청와대로 바꿨다. 영어 명칭인 ‘Blue House’였으나 현재는 ‘Cheong Wa Dae’다. 청와대 주소는 광복 뒤 세종로 1번지가 됐다. 일제강점기에는 광화문 1번지였다.

중앙일보

12.12 쿠데타 지휘처였던 경복궁 30경비단 본부건물. 지금은 사라졌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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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하나 : 경복궁 주둔 부대, 30경비단



1961년 5.16쿠데타 때 두 개의 부대가 서울로 진입했다. 30사단과 33사단 병력 일부다. 그 뒤 이들은 복귀하지 않고 청와대 주변에 눌러앉았다. 30대대와 33대대라고 불리다가 30경비단과 33경비단이 됐다.

특히 30경비단은 경복궁 북쪽(지금의 태원전 자리)에 주둔한 대통령 최근접 경호부대였다. 태원전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자리였다. 1915년 일제가 조선물산공진회를 열기 위해 허물었다. 그 뒤로 조선총독부와 총독관저를 경호하는 일본군 부대가 주둔했다. 30단 병사들은 새벽마다 웃통을 벗고 경복궁 안을 구보하며 군가를 불렀다. 차지철 경호실장 때는 병력을 연대 규모로 늘려 청와대 3중 경계망을 운영했다. 전차 장갑차 등으로 중무장을 했고 시위 진압이 주요 임무 중의 하나였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나 ‘효자동 이발사’에 등장하는 탱크부대가 30경비단 소속이다.

역대 30경비단장들은 대통령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손영길·전두환·이종구·장세동·안현태·이현우 등이 거쳐 갔다. 1979년 12·12 쿠데타 때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30단장 장세동, 33단장 김진영 등 신군부 핵심들이 장세동 방에 모여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체포를 모의했다. 직속 상관인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배반한 하극상이었다. 1996년 김영삼 정부는 두 부대를 제1경비단으로 통합했다. 2006년 30경비단 주둔지에는 다시 태원전이 들어섰다.

안충기 기자 newnew9@joongang.co.kr

(취재에 도움 주신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지원활용부장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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