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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서정일의 보이스 오버] 커다랗고 사악한 아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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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영화 <체인징 레인스>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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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가 빈번한 미국 사회이다 보니 할리우드 영화의 배경으로 법정은 친숙하다. 죄와 벌은 성찰을 자극하는 주제이자 갈등의 진폭이 커 드라마적 장점이 있다. 클라이맥스에 배치된 주인공 변호사의 현란한 변론 기술에 탄복하고 설득된다. 법률을 능란하게 다루며 상대의 인간적 허점과 치부를 논리정연하게 까발리는 한편 의뢰인의 인간적 약점과 환부를 감정적으로 호소한다. 어느새 영화 속 배심원과 함께 무죄를 선고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경향신문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영화 <체인징 레인스>의 주인공 게빈 배넥(벤 애플렉)은 유명 로펌 ‘아넬, 델라노 앤 스트라우스’의 신수 훤하고 장래 환한 파트너 변호사다. 델라노는 배넥의 장인이자 로펌의 네임 파트너로 수백만달러가 걸린 송사를 해치울 사위에게 멋진 요트를 선물로 주겠다며 격려한다. 앞날의 순풍에 들뜬 배넥은 법정으로 가던 중 차선 변경을 하다 흑인(새뮤얼 잭슨)이 몰던 차와 접촉사고를 낸다. 배넥은 급한 마음에 사고 수습 절차를 무시하고 절박하게 무언가를 요청하는 상대 흑인에게 백지수표를 끊어주며 사고 현장을 떠난다. 배넥에게 흑인의 절박함은 백지수표 한 장이면 해결될 사소함이었다.

법정에 도착해 의기양양하게 승소에 결정적 증거가 될 서류를 꺼내려는 순간 배넥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서류를 사고 현장에 놓고 온 것이다. 게다가 상대 운전자의 신원 정보를 알 수 없다. 배넥은 서류를 되찾기 위해 저열하고 악랄한 방법을 동원하고 또 상대의 역습을 받아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긴다. 베넥은 쓰라린 자기 전락 과정 속에서 세상의 진짜 법칙에 감전되며 이윤과 윤리를 구별하게 된다.

<체인징 레인스>는 할리우드 웰메이드의 정석이다. 주인공이 갈등 끝에 각성하게 되는 과정 설계에 정성을 들인 수작이다. 베넥의 장인은 악덕 기업인이 설립한 재단의 수익금 일부를 로펌의 두 대표인 자신과 파트너의 몫으로 할당받을 수 있게 계약서를 만들었다. 문제는 계약 주체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사인을 받아 수백만달러를 착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리적 갈등에 혼란스러워하는 주인공에게 장인은 이익을 추구하라고 다그치는 대신 현실은 원래 투명하지 않은 것이라며 차분히 훈계한다. 재단을 세운 기업 총수의 반인륜적 사업 방식을 폭로하고 외관상 공익을 위한 재단 같지만 본질은 세금 감면이 목적이었다고 알려준다. 나쁜 놈이 부도덕하게 벌어들인 거액 중 일부를 받아낸 것이 커다란 잘못인지 잘 모르겠다고 항변한다. ‘도둑놈의 돈은 훔쳐도 된다’는 당당하고 참신한 궤변에 잠시 설득될 뻔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배넥의 아름다운 아내가 내린 법에 대한 정의였다. 그녀에 의하면 법이란 시대의 관점과 주관적 관점이 교차하고 시비하는 커다랗고 사악한 아우성이다. 로펌을 세운 사람도 로펌 안에서 안락하고 화려한 생활을 누리는 우리 모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안다고 확언한다. 그녀의 세계관이 어디에서나 통용되는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에선 맞는 것 같다.

윤석열 정부 내각 구성원의 면면과 임명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세상의 물정이 보인다. 전 총리로 대형 로펌의 고문이었던 한덕수씨가 우려와 곡절 끝에 다시 총리로 임명되었다. 한 총리의 전 직장 김앤장의 정계성 대표변호사는 한덕수 총리를 ‘대체하기 어려운 능력의 소유자’이자 ‘영어 구사 능력도 아주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안심이다.

차선 변경하고 앞으로 5년. ‘지식과 정보를 선진적 기법으로 결합한 성공적 법률 기업’ 김앤장에서 쉬지 않고 일한 신임 한덕수 총리와 ‘소년의 눈빛을 지킨 순수함으로 인간의 존엄을 보여주는 법의 수호자’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합심하여 법이라는 커다랗고 사악한 아우성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기를 바란다. 진심이다.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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