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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모던 경성]보성전문교수 김광진, 시인 노천명, 가수왕 왕수복의 삼각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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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스캔들 소재 삼은 유진오 소설 ‘이혼’발표에 모윤숙, 최정희 등 여성작가 항의방문

조선일보

보성전문교수이자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던 김광진은 시인 노천명과 결혼직전까지 간 연애 스캔들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는 본부인이 있었다. 김광진은 해방 이후 스타가수 출신 왕수복과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왼쪽은 노천명, 오른쪽은 왕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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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진씨는 금년 삼십세의 독학자(篤學者)다. 키가 보통 키보다 조금 크고 몸이 후리후리한 것이 강하고 얼굴빛이 햇볕에 탄 것 같은 건강색을 띄고 있다.’(‘교수·강사타령’7 보성전문편 상과교수 김광진씨’, 조선일보 1933년5월11일)

정규 대학 교육을 받은 연구자들이 배출되기 시작한 1930년대, 보성전문(고려대전신) 교수들을 소개하는 연재기사가 신문에 났다. 메이지대 법학부 출신 최태영, 경성제대 법학부 출신 유진오 같은 신진 법학자들과 함께 나란히 소개된 이는 경제학자 김광진이었다. 1928년 도쿄상과대(히토쓰바시大) 상학부를 졸업한 김광진(1903~1981)은 같은해 경성제대 법문학부 부수(副手)를 거쳐 이듬해 조수(助手)로 임용된 엘리트였다. 경성제대 법문학부 전체에 조선인 조수가 6명 밖에 없었을 때였다. 정식 관등(官等6)까지 받은데다, 월급(60원)도 초년 신문기자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김광진은 인촌 김성수가 보성전문을 인수한 1932년 보성전문 전임강사로 채용됐다.

◇밤새도록 연구하는 篤學者

신문은 김광진에 대해 ‘조선에서 제일 남자답게 생긴 남자’ ‘호(好)신사’라는 인물평과 함께 ‘밤이 새도록 공부를 계속하는 독학자’로 소개했다. 학생들에게 인기도 높았다고 한다. ‘학생들이 氏를 방문하면 과자를 권하고 차를 권하고 선생이 학담(學談)에 취하면 술을 권하는 친절미’까지 있다고 썼다. ‘후배를 사랑하고 지도하여 주려는 인간미가 흐른다하니 선생의 순정으로 나오는 인간적 지도ㅡ이것은 빼빼 마른 조선에서는 마른 나무에 이슬’이라고 칭찬했다. 김광진은 상업사, 상품학, 보험론 등을 가르치는데, 금융론과 미두(米豆)·취인(取引)이 특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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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상과대학을 졸업한 김광진은 1932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영입됐다. 부지런한 학자였고, 학생들에게도 인기있는 교수로 소개됐다. 조선일보 1933년5월11일자


◇경제학자 겸 신문·잡지 필자로 활약

보전(普專)이 1934년 처음 낸 ‘보전학술논집’은 경성제대에 맞선 ‘사학파’(私學派)의 학술연구로 주목받았다. 김광진은 최태영 오천석과 함께 편집인으로 참여했고, ‘이조 말기에 있어서 조선의 화폐문제’(제1호) ‘고구려사회의 생산양식-국가의 형성과정을 중심으로’(제3호)를 투고해 호평을 받았다. 대중강연과 신문·잡지 기고를 통해서도 얼굴을 알렸다. ‘세계를 진감하는 금융공황의 양상: 그 원인과 발전을 논술함’1~3(1933년4월26일~28일), ‘자본주의 경제의 재건운동, 국제경제회의豫診’1~4(1933년6월9일~11일, 13일) ‘전쟁경제와 비상생활, 예상되는 장래전쟁 그 영향을 중심으로’1~2(1934년1월1일) ‘팽창일본경제의 정체’1~10(1934년10월4일~7일, 9일~14일) ‘블록경제의 동향, 자유무역주의 해체와 국민주의의 강화’상, 하(1935년1월1일~2일) ‘조선역사학연구의 전진을 위하여’(1937년1월3일·이상 조선일보) 등 깊이 있는 분석기사를 기고했다.

김광진은 대중강연에도 자주 나섰다. 평양상공협회 주최, 조선일보 평양지국 후원으로 열린 ‘경제문제대강연회’(1931년3월14일, 16일), 고려청년회 주최 ‘경제문제대강연회’(1933년3월18일), 보성전문학생회 주최, 조선일보 학예부 후원의 ‘初夏학술강연회’(1934년5월12일·종로중앙기독교청년회강당), 동아일보 주최 ‘하계순회강좌’(1935년7월29일~8월2일·원산, 함흥, 청진) 등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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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5월12일 오후7시 종로중앙기독교청년회강당에서 파시즘을 주제로 열린 강연회에서 '파시즘의 성립'을 주제로 강연한 김광진 보성전문학교 상과 교수. 함상훈, 신남철이 연사로 나섰다. 보성전문학생회가 주최하고 조선일보 학예부가 후원했다. 조선일보 1934년 5월12일자


◇체홉 ‘벚꽃동산’으로 만난 김광진과 노천명

이 근엄한 학자도 ‘연애의 시대’를 피해갈 수없었던 모양이다. 스물 셋 시인 겸 기자 노천명(1911~1956)과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이 만난 과정도 드라마틱하다. 일본 유학파들이 만든 신극단체 극예술연구회(이하 劇硏·극연)가 1934년 12월7일~8일 오후6시30분 경성공회당에서 올린 체호프 연극 ‘앵화원’(櫻花園·벚꽃동산)이 계기가 됐다. 극연 창립 3주년 겸 체호프 서거 30주년 기념공연이었다.

당시는 여배우들이 부족했는데 모윤숙, 노천명 같은 엘리트 신여성이 가세하면서 이 연극은 화제를 모았다. 조선중앙일보 기자였던 노천명은 라네프스카야의 딸 아냐로 무대에 섰다. 김광진이 ‘배우 노천명’을 보고 마음이 끌린 것이다. 서른 한살 김광진은 이미 결혼한 몸이었고, 스물셋 노천명은 미혼이었다. 둘은 사랑에 빠졌고, 결혼 약속까지 오갔다. 하지만 김광진이 본처와 이혼을 하려고 고향에 내려갔다가 결국 이혼을 결행하지 못한 채 유야무야됐다.

한 가지 바로잡을 것은 이어령을 비롯한 몇몇 문인들은 김광진과 노천명이 만난 ‘앵화원’ 공연을 1938년으로 썼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극연의 ‘벚꽃동산’ 공연은 1934년12월에 있었고, 이 단체는 1938년3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했다.(이어령, ‘한국작가전기연구 上’ 143쪽, 유민영, ‘한국근대연극사’ 823쪽 참조)

◇유진오 단편 ‘이혼’ 파문

이화여전 출신의 시인 노천명과 보성전문교수 김광진의 연애는 문화계의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스캔들이었다. 여기에 현민 유진오가 기름을 끼얹었다. ‘김강사와 T 교수’로 이미 유명 작가였고, 김광진과 같이 보성전문 교수였던 현민이 1939년 2월 ‘문장’창간호에 두 사람의 연애를 떠올리는 단편 ‘이혼’을 발표한 것이다.

‘윤희와의 관계도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그런 ‘오입’에 조금 털돋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든 것이 방귀가 잦으면 똥을 싼다는 격으로 이번에는 어찌어찌하다가 일이 커지고 만 것이다.’ 둘의 연애를 지저분한 관계로 묘사한 것도 모자라 ‘심각한 미움을 품은 하얀 눈을 재신에게 던졌다. 보기만해도 몸서리치는 무서운 눈이었다’처럼 노천명을 연상시키는 문장이 입길에 올랐다.

그러자 여성 문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모윤숙, 최정희, 이선희 셋이 유진오를 찾아가 항의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유진오는 소설속 주인공과 노천명은 전혀 상관없다고 부인했다. 황금찬 시인이 최정희에게 직접 들었다며 남긴 회고(‘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저편’)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효석 연인 왕수복과 결합

김광진은 1939년 보성전문을 사직하고, 고향인 평양에 돌아가 사업가로 변신했다. 1940년 1월 평안상사 전무, 같은 해10월 조선제정공업주식회사 감사에 취임했다. 못을 만드는 회사였다. 마침 ‘가수왕’ 왕수복(1917~2003)도 평양에 돌아와 있었다. 평양 기생 출신 가수 왕수복은 1935년 월간 ‘삼천리’ 가수 인기투표에서 1위를 차지할 만큼 유명한 스타였다. 왕수복은 1936년 도쿄음악학교에 건너가 성악을 배우면서 이탈리아 유학까지 꿈꿨다. 하지만 행동에 옮기진 못했다.

그러던 왕수복이 고향에 다니러왔다가 ‘메밀꽃 필 무렵’을 쓴 이효석을 만나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숭실전문·대동공전에서 가르치던 이효석은 1940년 아내와 사별하고 막내아들까지 잃으면서 방황하던 때였다. 이효석이 1942년 5월 숨을 거둘 때까지 왕수복은 그의 곁을 지켰다. 그런 왕수복이 열네살 연상인 김광진을 만나 가정을 꾸린 것이다.

◇김일성대학 창립 주역

해방 후 김광진은 김일성대종합대학 창설 주역으로 변신한다. 홍종욱 서울대교수에 따르면, 1945년8월17일 김광진은 조만식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 결성에 참여했다. 같은달 27일 소련군 지시로 건준은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와 합작, 평남 인민정치위원회로 재편됐다. 당시 민족계열과 공산계열이 16명씩 균형을 맞춰 구성했는데, 김광진은 민족계열로 참여해 상공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김광진은 당시 조선공산당원이었다는 증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세력균형을 깨기 위한 공작에 참여한 것이다.

김광진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가르칠 교원을 유치하기 위해 1946년1월 서울에 내려와 도쿄상과대학 3년 선배인 백남운을 만나 지식인의 월북 공작을 의논했다고 한다. 이어 1947년 1월 김일성종합대학 법학부 부장을 맡았다. 김광진의 임명일은 1946년8월1일로 전 교원중 가장 빠른 것으로 보아 김일성대학설립에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음을 짐작할 수있다.

조선일보

1965년 5월10일 판문점에 김광진 왕수복 부부가 나타났다. 왕수복은 가수 이난영의 동년배라고 소개하고 같은 시기 활동한 전옥 등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김광진도 평양고보 동기생인 홍종인과 보성전문 동료교수였던 유진오와 친구라고 소개했다. 조선일보 1965년5월11일자


◇애국열사릉에 합장된 김광진과 왕수복

이후 과학원 후보원사, 원사로 승진하면서 고대에서 식민지시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와 분야를 다룬 논문을 발표하면서 북한 역사학계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다산 정약용의 사회·경제사상’같은 논문을 쓰면서 정약용 연구에도 가세했다. 정치적으로는 조국평화통일위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김일성 훈장까지 받았다. 1981년 세상을 뜨자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왕수복은 결혼 직후 주부로 살다가 가수로 복귀했다.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타쉬켄트 등으로 해외공연을 다니면서 공훈배우가 됐다. 여든이던 1997년에도 민요독창회를 열 정도로 정정했다. 2003년 세상을 뜬 왕수복은 이듬해 애국열사릉에 잠든 남편 김광진과 합장됐다.

◇참고자료

유진오, ‘이혼’, ‘문장’창간호,1939.2

홍종욱, ‘보성전문학교에서 김일성종합대학으로-식민지 지식인 김광진의 생애와 경제사연구’, 역사학보 2016,12

이어령, 한국작가전기연구 上, 동화출판공사, 1975

박봉우, ‘고독과 생활한 여류시인 노천명’, 여원 1959년,8

황금찬,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저편, 신지성, 2000

유민영, 한국근대연극사, 단국대출판부, 1996

신현규, 평양기생 왕수복, 경덕출판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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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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