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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응, 네 엄마 돈으로” 독선적 루나 설계자의 예견된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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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선적인 태도로 열광적 지지자 만든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
일 터지기 전에도 후에도 무력한 한국의 규제


한겨레21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 유튜브 채널 Terra 영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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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기자님이 지적하는 부분이 왜 문제가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본질적인 내용도 아닌데.”

그는 인터뷰 내내 “이해를 잘 못하시는 것 같다”는 표현을 여러 번 썼다. 순간 ‘내가 진짜 저 사람 말을 이해 못하나’ 하는 불안감이 들 만큼.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 테라(Terra) 때문에 요즘 화제의 중심이 된 테라폼랩스(Terraform Labs PTE.LTD)의 권도형 대표 얘기다.

권 대표는 본인과 의견이 다르면 상대방의 이해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간주하는 독특한 습관이 있었다. 2020년 취재차 이뤄진 대화에서도 그랬다. 그는 테라가 코인을 판매하기에 앞서, 중요한 투자 정보를 기관투자자에겐 공개하고 일반투자자에겐 공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윤리적 문제로 지적하자 ‘잘 몰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블룸버그> 등이 지속가능성 의문 제기했지만 권 대표의 이런 태도가 성격에서 기인했는지, 계산된 대외 소통 전략의 하나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반감을 사기 쉬울 독선적인 그의 태도가 유독 테라 커뮤니티에선 강력한 리더십으로 통했다는 점이다. 코로나19 이후 전세계에 풀린 대규모 유동성 때문에 크립토(가상자산) 업계로 많은 돈이 밀려왔고, 권 대표는 이 흐름에 제대로 올라탔다. 루나 가격은 초기 판매 가격보다 100배 넘게 올랐고, 특히 탈중앙화금융(Defi·정부나 기업 등 중앙기관의 통제 없이 블록체인 기술로 제공하는 금융서비스) 분야에서는 이더리움에 이어 2위 플랫폼이 됐다. 전체 시가총액 기준으로 세계 8위 수준까지 성장했다.

2022년 5월 초 테라 플랫폼 기축통화인 스테이블코인 ‘테라USD’(UST·유에스티)의 가격이 별안간 폭락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러나 한번 떨어진 유에스티 가격은 제자리로 회복하지 못했고, 스테이블코인의 안정성을 지켜주던 알고리즘이 악순환에 접어들면서 거버넌스토큰(플랫폼에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토큰) 루나(LUNA)의 가격이 동반 폭락했다. 그 결과 불과 10여 일 만에 시가총액 80조원의 코인 플랫폼 가치가 0원을 향해 수렴하기 시작했다. 테라가 시장에 촉발한 충격으로 비트코인 가격도 5월12일 연저점을 기록했다.

테라 생태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유에스티의 인기가 올라가는 것이다. 유에스티를 원하는 사람이 늘어나서 이 코인의 발행량이 많아지면 루나 가격도 자연스럽게 상승 압력을 받도록 설계됐다. 반대로 유에스티의 인기가 떨어지면 루나 가격도 하락 압력을 받는다.

가장 안 좋은 상황은 유에스티 인기가 너무 낮아져서 발행량도 하락하고 코인 가격까지 정해진 가격(개당 1달러)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악순환으로 루나 가격이 폭락한다. 루나 가격이 지나치게 낮아지면 전체 유에스티의 시가총액보다 루나의 시가총액이 낮아지는데, 이 시점이 지나면 논리상 유에스티 가격이 회복되기 어렵다.

만약 누군가 대량의 유에스티를 일시에 시장가에 매도하는 방법으로 유에스티 가격을 떨어뜨리고, 사람들의 믿음이 무너질 때까지 일정 시간 그 상태를 유지한다면 테라는 스스로 무너지는 구조라는 얘기다. 그리고 테라는 현실에서 이 시나리오대로 무너졌다.

연이율 20% 예치 상품을 제공하는 앵커프로토콜의 인기로 테라 생태계가 빠르게 성장한 최근 1년간, 글로벌 가상자산 업계에선 이런 구조적 위험에 대한 문제제기가 잇달았다. 유에스티 인기가 20% 고정이자 지급에서 나오는데, 이렇게 이자를 계속 주기 어렵지 않냐는 취지였다. 이자를 주지 않으면 유에스티 수요가 빠르게 줄어들고, 그렇게 수급이 불안정한 와중에 대량 매도가 발생하면 테라 생태계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 업계뿐만 아니라 <블룸버그> 등 유명 경제지에서도 그 지속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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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이 2022년 5월23일 주최한 ‘루나·테라 사태 원인과 대책’ 긴급간담회 모습. 국회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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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처벌 위해 기망행위 확인할 수 있을까 권 대표는 이런 지적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2021년 7월 영국 경제학자 프랜시스 코폴라가 트위터를 통해 대규모 매도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 모델이 실패할 수 있다고 지적하자, 그는 “나는 가난한 사람과 토론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2022년 1월 말, 한 벤처캐피털 대표가 “3억달러에 달하는 이자를 어떻게 마련할 것이냐”고 묻자, 그가 “응, 네 엄마에게서”(Your mom, obviously)라고 대답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테라 사태는 미리 대처했다면 막을 수 있었던 인재에 가깝다. 가상자산 업계에서 이번 사태의 원인이 권 대표에게 있다고 지적하는 목소리가 다발적으로 나오는 이유다. 뒤늦게 생태계 방어를 위해 ‘루나파운데이션가드’(LFG)라는 비영리단체를 조직하고 방어용 자금 33억달러를 쌓았지만, 시총 규모가 180억달러에 이르는 유에스티 가격을 방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물량이었다. 사실상 권 대표가 테라 프로젝트를 이끄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현실 파악과 위기 대처가 늦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테라폼랩스와 권 대표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투자자들의 고소·고발이 진행 중이다. 금융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루나 투자자 규모가 국내에만 28만 명에 이른다. 코인 가치가 사실상 0이 됨으로써 이 중 대부분이 손해를 봤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2년4개월 만에 부활시킨 서울남부지검 금융·증권범죄합동수사단이 테라와 권 대표의 수사를 맡는다.

상황이 이렇자 언론 등 직접 투자 손해를 보지 않은 이들도 권 대표를 형사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는 분위기다. 그가 현실적으로 계속적인 지급이 어려운데도 사기성 짙은 연 20% 이자를 앞세워 코인 투자를 유도했다는 것이다. 인허가를 받은 금융기관이 아니면서 이자를 약정하고 돈을 모았다는 측면에서 유사수신 혐의도 거론된다.

그러나 정작 법적 처벌이 가능할지는 불투명하다. 법조계 의견도 엇갈린다. 사기로 처벌하려면 테라 쪽 기망행위를 확인해야 하는데, 지금 드러난 사실만으로는 확언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유사수신의 경우에도 실제 돈이 아니라 암호화폐를 모으고 암호화폐로 이자를 지급했다는 점 때문에 법망을 피해갈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적잖다. 세계적 추세에 맞게 암호화폐와 가상자산에 대한 법과 규제를 현실화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하다못해 암호화폐 거래소에 적용하는 제대로 된 공시 규제 하나만 있었더라도 상당히 많은 투자자 손해를 막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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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의 몰락을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빗대 풍자한 사진. 트위터 lunamemes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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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주도 디지털통화 탄생? 약간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가상자산 업계 종사자로서 테라 사태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점은 생각보다 피해 여파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2022년 5월25일 네이버 시가총액이 약 44조원인데, 지난 2주 동안 증발된 루나 시가총액만 우리돈으로 약 57조원이 넘는다. 액수로 봤을 때 네이버보다 큰 기업 하나가 증발한 셈인데 그런 기업이 무너진 것에 비하면 사회적 파장이 상당히 제한적인 것 같다. 디지털자산을 다루는 이 업계가 아직 우리 실생활과 충분히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 점점 실생활과 디지털자산이 밀접하게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우선 비교적 안전한 예치금 방식의 스테이블코인이 미국의 규제 안쪽으로 포섭될 가능성이 있다. 5월10일 유에스티 가격이 개당 1달러에서 0.6달러 선까지 폭락하자, 재닛 옐런 미 재무부 장관은 ‘2022년 말까지 스테이블코인 규제가 필요하다’고 의회에 법 제정을 촉구하는 발언을 내놨다. 루나 사태와 유에스티 폭락으로 금전적 손해를 본 미국인이 적잖을 것이고, 미국 정부가 금융소비자 보호 차원에서 규제를 마련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금까지 나온 안들을 종합하면 이 분야 전반에 예금·보험 등 은행에 준하는 규제를 도입하고 이를 통해 민간 스테이블코인 유통량을 간접적으로 조정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일시적으로 시장이 위축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디지털자산 확산 속도가 더욱 빨라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아예 미국이 직접 국가 주도의 디지털통화(CBDC)를 만드는 방안도 논의된다. 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2022년 1월 ‘화폐와 지급결제: 디지털 전환 시대의 미국 달러’라는 보고서를 내고 디지털통화 도입에 공식적인 의견 수렴을 시작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3월 관계 부처들에 디지털자산 전반에 대해 규제·정책 방향을 신속하게 연구하라는 내용의 행정명령을 내렸다. 테라 사태와 관련해서도 레이얼 브레이너드 연준 부의장은 5월25일(현지시각) 미 하원 금융청문회 증언에서 “CBDC 발행이 금융시스템 안정성을 보장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미국 정부가 CBDC에 관망적 태도를 보여왔던 것에 비하면 이런 속도는 이례적이다. 지금까지 나온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입장이 바뀐 데는 중국의 디지털위안화 도입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미 중국이 자체 CBDC를 도입한 마당에, 더 설득력 있는 디지털통화를 만들어 대응하지 않으면 미래 금융시장에서 달러화의 국제적 위상을 잃을 수 있다는 취지다. 바꿔 말하면, 앞으로 금융시장은 디지털 중심으로 재편되고, 미국과 중국이 그 시장의 패권을 놓고 격돌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제2의 테라 사태는 이번처럼 단출하지 않을 것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한국 사회가 권도형 대표 식의 경영을 견제하는 적절한 규제책을 찾아내지 못하면, 앞으로도 제2의 테라 사태는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 디지털자산이 실제 생활과 결합하는 속도를 보면, 그때의 피해는 이번처럼 단출하지 않을 것이다. 이게 테라 사태가 한국 사회에 남긴 진짜 신호다.

김동환 블리츠랩스 이사·전 <코인데스크코리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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