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예섭 기자(ghin2800@pressian.com)]
"우리의 공동체에 가해 교수의 자리는 없으며, 우리는 결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지난 16일, 서울대학교 캠퍼스 곳곳에 "권력형 성폭력·인권침해 혐의로 해임된 전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 A 교수"의 1심 무죄 판결을 규탄하는 성명 대자보가 게시됐다. 성명을 작성한 '권력형 성폭력‧인권침해 문제 해결을 위한 서울대인 공동행동'은 지난 7일과 8일 진행된 A 전교수에 대한 재판 과정을 가리켜 "피해는 분명히 실재하는데, 가해자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제자 성추행 혐의로 기소된 A 전 교수는 지난 7~8일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 재판 끝에 8일 성추행 혐의에 대한 무죄를 선고받았다. 7명의 배심원이 만장일치로 무죄를 평결했고, 재판부(형사합의29부 재판장 김승정) 또한 '피해자가 자는 사이 정수리를 만진 사실' 등 공소 건에 대해 "피해자가 불쾌감을 느낀 것은 인정"되지만 "강제추행 죄의 추행으로까지 볼 수는 없다"며 배심원 평결을 수용했다.
공동행동 측은 해당 선고에 대해 △재판부가 불쾌한 신체접촉을 인정하면서도 '성적 불쾌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한 점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다움'에 대한 공격적인 검증이 요구된 점 △교수와 학생 간의 '위계'가 제대로 고려되지 않은 점 △피해자가 거부 입장을 밝혔던 '국민참여재판'이 끝내 수용된 점 등을 문제로 제기했다. 지난 9일엔 피해자 B 씨와 피해자 대리인 임재성 변호사가 "판결을 수용할 수 없다"며 기자회견을 열었고, 14일엔 검찰이 항소장을 제출했다.
▲16일 서울대학교 관악사 사거리 앞 게시판에 부착된 공동행동 대자보 ⓒ권력형 성폭력‧인권침해 문제 해결을 위한 서울대인 공동행동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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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서울대 '학내 미투' … 2022년 돼서 '국민참여재판'
이번 판결은 2019년 피해자 B 씨의 공론화 및 고소 이후 3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B 씨는 2019년 2월 서울대 캠퍼스 내에 기명 자보를 게시하며 사건을 공론화하고, 서어서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A 전 교수를 서울대 인권센터에 신고했다. B 씨와 더불어 17여 명의 증인이 참고인으로 나서 A 당시 교수의 가해행위 및 서어서문학과 전반에 만연한 학내 성희롱, 차별 문화를 고발했다.
대규모 학내 미투에 대해 인권센터가 내린 처분은 A 당시 교수에 대한 정직 3개월이었다. 학생사회는 곧장 반발했다. 서울대 구성원 2300여 명이 탄원서를 제출했고, 학생 대표자들은 단식 및 동맹 휴업을 진행하며 A 교수 파면을 요구했다. 이어 학생들은 A 교수의 연구실을 학생 자치 공간으로 전환하는 파면 요구 점거농성에 돌입했고, 인권센터의 징계 의결이 지연되는 사이 B 씨는 2019년 6월 A 당시 교수를 강제추행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결국 최초 신고 이후 6개월이 지난 2019년 8월 A 당시 교수의 해임이 결정됐다.
서울대 측의 해임 결정으로 사건의 무대는 수사 및 사법기관으로 넘어갔지만, A 교수 사건은 최초 고소 후 3년이 지난 올해 6월 처음 재판장에 올랐다. 사건의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른 국민참여재판 때문이다. 성추행 혐의로 기소된 A 전 교수는 2020년 4월 변호인을 통해 "어느 범위까지의 신체접촉이 추행이 되는 것인지 한번 판단을 받아보자는 취지"라며 국민참여재판 신청서를 당시 재판부(형사14단독)에 제출했다. 재판부가 해당 신청을 받아들이면서 재판은 합의부로 이관됐고, 때마침 겹친 코로나 사태로 재판은 22년 6월까지 연기됐다.
피해자 측과 서울대 측 학생연대는 20년 당시부터 해당 사건의 국민참여재판 회부에 반대해왔다. 국민참여재판이 성범죄 사건에 있어 '무죄를 선고받기 위한 전략'으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피해자가 이미 몇 번이나 진술한 피해 사실을 처음 보는 배심원들 앞에서 다시 진술해야 한다는 점이 이유였다.
실제로 2020년 한해 성범죄 등에 관한 국민참여재판의 무죄율은 48%에 육박하며 실형률(39.1%)을 훨씬 상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송재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21년 '배심원이 성폭력범죄나 재판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참여할 경우 고정관념이나 사회적 통념에 따라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며 '배심원 성인지감수성 교육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8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동관에서 진행된 서울대인 공동행동 측 1인 시위 ⓒ권력형 성폭력‧인권침해 문제 해결을 위한 서울대인 공동행동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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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심원 평결에 '기획미투'설, '피해자다움' 영향 등 문제 남아
1심 재판이 진행된 지난 8일, <프레시안>과 전화 인터뷰를 진행한 박도형 전 '서울대 A 교수 사건 대응을 위한 특별위원회(공동행동 전신)' 집행위원장은 "(피해자 측의) 우려가 현실이 됐다"고 강조했다. 피해자는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진술을 계속 이야기해야 했고, 피해 상황을 하나하나 재연하기 까지 하면서" 강한 부담에 노출됐으며, 실제적 성폭력의 유무를 가려야 할 재판의 쟁점이 "다른 이야기로 피해자를 공격하는 형태"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7일 진행된 재판 현장에서 피해자는 사건 당시 입은 것과 같은 옷(원피스)을 입고 '가해자가 허벅지 안 쪽 흉터를 동의 없이 만졌다'는 공소 건 피해 상황을 재연했다. 이에 성명을 낸 공동행동 측은 "가해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과 피해 회복이 이뤄져야 할 법정이라는 공간이, 도리어 피해 사실을 낱낱이 상기하고 시험받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남긴 것"이라는 지적을 남겼다.
'사건 전후 피해자의 행동이 피해자답지 않다'는, 전형적인 '피해자다움에 대한 공격'도 재판장에서 유효하게 작용했다. 피고인 측 변호인은 추행 사건 다음날 피해자가 인스타그램에 바닷가 셀카 사진을 증거자료로 제시했으며, 재판부 또한 "사건 직후 보낸 메시지 등을 볼 때 피해자 진술만으로는 합리적 의심 없이 범죄가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피고인 진술 과정에선 "정열적인 성향의 스페인에선 스킨십이 자유롭다"는 발언이 나오는 등 "(사회적 통념 등으로) 실제 성폭력 행사 여부를 흐리는" 진술이 이어지기도 했다.
박 전 집행위원장은 "해당 사건은 (교수와 학생 간의) 권력관계에서 일어난 권력형 성폭력인데, 전부터 가해자 측은 계속해서 (권력형 성폭력이라는 본질을 가리며) 피해자를 흠잡으려 했다. 배후가 있는 '기획미투'설을 제기하기도 했다"며 "사건의 쟁점이 성폭력 자체에 있어야 하는데 자꾸 외부의 이야기들을 끌어들여 피해자를 공격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공동행동 측 또한 이에 대해 "(A 전 교수 측은) 사건 발생 전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이나 공손한 연락 말투를 근거로 '피해자답지 않다'고 비난하며 피해자에 대한 편견을 조장"했으며, 이로 인해 "가해자에게 죄가 없어 주어진 무죄가 아니라, 법정이 피해를 섬세히 포착하여 구제하는데 실패해 주어진 무죄"가 선고됐다고 주장했다. "교수와 학생 간의 위계가 공고한 우리 사회에서" 이번 무죄 판결은 "위계의 맥락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 제기를 결심한 피해자의 결정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판단"이라는 게 공동행동 측 지적이다.
현재 공동행동 측이 연대·대응하고 있는 서울대 내 권력형 성폭력·인권침해 사건은 A 교수 사건 외 "음대 B, C 교수 등 여러 '알파벳 교수' 사건"으로 여러 건이다. 공동행동은 "교수에 의한 권력형 성폭력‧인권침해는 교육‧학문 공동체의 고질적인 문제"라며 "(A 교수 사건은) 이제 겨우 1심이 끝났을 뿐이고, 항소가 진행될 예정이다. 재판 결과를 끝까지 지켜보겠다"고 강조했다.
[한예섭 기자(ghin2800@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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