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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이슈 미술의 세계

이건희가 품었던 407조각의 '산'…생은 곧 채색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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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한국 채색화 특별전 '생의 찬미'

한국미술사에서 홀대받았던 '채색화' 재조명

성파스님 등 근현대작가 60여명 80여점 걸어

동판조각 연결 이종상 '원형상 89117-흙에서'

이건희 기증품 중 12m 최대…33년만에 공개

이데일리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 채색화 특별전 ‘생의 찬미’를 열고 있는 과천관에 내건 일랑 이종상의 ‘원형상 89117-흙에서’(1989). 407개의 동판조각을 연결한 길이 12.3m, 높이 3.7m의 장구한 파노라마는 태초에 산과 물, 세상이 만들어지던 그때의 기억을 더듬는다. 33년 만에 세상에 다시 나온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이건희 소장품 중 한 점. 그중 가장 규모가 크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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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제 막 하늘로 솟구치려 하나. 이 땅에 잠시 머물며 할 일은 다했다고. 긴 몸체를 굽이굽이 감아가며 발아래 엉키고 번진 누런 들과 물을 내려다본다. 그랬다. 용인가 보다 했다. 그 기세가, 세상을 휘어감는 기운이, 달리 보이지 않았던 거다. 하지만 한참을 빗나갔다. 격한 몸짓으로 무장한 그 덩어리는 ‘산’이었던 거다.

그저 평범한 산 풍경이 아니어서다. 장장 길이 12.3m, 높이 3.7m에 달하는 장구한 파노라마는 태초에 세상이 만들어지던 그때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정중앙에서 사방으로 뻗쳐나가며 동서남북이 자리를 잡았고 그 위를 산세가 달리고 있다. 그 비장함에 더 큰 무게를 얹은 건 역시 ‘색’이다. 누런 바탕에 짙푸르고 검붉은 색을 입은 산, 아니 몸뚱이가 버티고 있으니.

국립현대미술관이 경기 과천시 광명로 과천관에 연 대규모 기획전 ‘생의 찬미’는 이 작품을 화룡점정으로 삼았다. 이종상(84) 화백이 1989년에 ‘빚어’ 완성했다는 ‘원형상 89117-흙에서’다. 작품은 407개의 동판조각으로 완성한 동유화(동판에 안료를 얹어 구워낸 그림)다. 제작한 그해 작가의 개인전에 나왔던 이후 33년 만에 다시 빛을 봤다. 지난해 4월 이건희(1942∼2020) 삼성회장의 소장품 1488점 중 한 점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옮겨졌다. 광활한 산세와 마주한 나란 존재는 그저 작은 점인 양 한없이 움츠러들게 만드는, 기증품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기도 하다.

과천관 전시장 한 벽을 가득 채운 ‘원형상’은, 한 조각 한 조각 동판 뒤에 적힌 번호대로 차례로 벽에 걸고 밀착해야 그 처음과 끝이 연결된다. 그 크기가 말해주듯 섣불리 어디 내놓을 수도 없는 그 작품에 대한 감탄은 ‘디스플레이 전문가’의 입에서 먼저 터져 나왔단다. “한치의 틈도 없이 천장부터 바닥까지 마치 맞춤인 양 이렇게 딱 들어맞을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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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을 허리 숙이게 한 성파스님의 ‘수기맹호도’(2012·162×570㎝). ‘대호도’를 재해석해 나무판에 옻칠로 되살렸다. 일제강점기에 ‘대호도’가 그랬듯 어려운 상황을 떨치고 분연히 일어서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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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종정 성파스님부터 30대 작가 김선우까지

‘생의 찬미’ 전을 수식하는 또 다른 타이틀은 ‘한국 채색화 특별전’이다. 채색화라 할 땐 보통 ‘색을 칠하는 그림’이란 풀이가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회화사에선 좀더 특수한 영역으로 구분한다. 담백하게 먹만으로 그리는 수묵화와는 선을 긋고, 채색으로 완성하는 궁중기록화, 민화, 불화, 초상화, 장식화 등을 통칭하는 거다.

그렇다고 전시작이 옛 향기 뿜어대는 고색창연 일색인 건 아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전통 채색화를 시작점으로 60여명 작가의 80여점을 건 전시에는 강요배, 박대성, 박생광, 신상호, 안상수, 오윤, 이종상, 한애규, 황창배 등 근현대미술계 대표작가들이 더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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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한국 채색화 특별전 ‘생의 찬미’ 전경. 왼쪽부터 이우환의 ‘관계항’(1979·64.8×54.5㎝), 오윤의 ‘칼노래’(1985/1995리프린팅·32.2×25.5㎝), 구본창 ‘호건’(2022·보그코리아 5월호) 등이 차례로 걸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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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이 ‘채색화’를 기획전 테마로 잡은 건 사실상 처음이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조선시대가 수묵·문인화를 전면에 내세운 듯하지만 채색화 전통은 끝까지 지켜냈다”면서 “그럼에도 그 중요성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점을 반성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순수예술이 아니라고 애써 외면했던 채색화가 소외당하고 홀대받아온 시절을 떠올린 거다. 그 ‘반성’의 자세로 전시는 미술사에서 채색화가 차지하는 지점을 짚기보다 역할에 집중하는 모양새다. 그 채색화가 우리가 살아낸 한 시대마다 도대체 무엇이었나를 살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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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학의 10폭 병풍 ‘현대모란도’(2006·각 159×49㎝). 오래전부터 장식화의 역할을 한 채색화를 현대적인 화법을 씌워 강하고 거친 선으로 그려냈다. 전통적인 괴석이 있는 ‘궁모란도’를 연상시킨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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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하나가 성파(83)스님의 ‘수기맹호도’(2012)와 ‘금강전도’(2012)다. 성파스님은 올해 제15대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된 대종사. 한국불교사에서 처음으로 ‘예술가 종정’이라 꼽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가로 570㎝, 세로 162㎝ 나무판에 옻칠을 입힌 ‘수기맹호도’는 민화 ‘대호도’를 재해석한 작품으로, 고난에 굴하지 않는 범의 기개를 현대에 일깨운다. 10폭 병풍에 1만 2000봉의 거센 기상을 종이에 한 선, 한 선 옻칠로 그어낸 ‘금강전도’ 역시 시대에 들이댄 날카로운 비수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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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파스님의 ‘금강전도’(2012·200×900㎝). 종이에 옻칠을 올려 10폭 병풍으로 제작했다. 돌이 많고 뼈다귀 같아 개골산으로 불리기도 하는 1만 2000봉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연마를 통해 잡티를 없애고 정수만 남긴 단단하고 날카로운 비수처럼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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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채색화의 대가’란 명칭이 결코 허투루가 아닌 작품도 보인다. 박생광(1904∼1985)의 ‘전봉준’(1985·360×510㎝)이다. 강렬한 색, 굵은 선으로 시대의 표상을 끌어내던 그이의 눈과 붓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멈췄을 때의 작품이다. 장대함으로 따지면 이숙자의 ‘백두성산’(2000)도 빼놓을 수 없다. 눈 덮인 백두산 천지를 가로 10m 길이에 펼쳐낸 작품은 해와 달을 좌우로 두고 세상의 정기를 끌어모으는 중이다. 실제로 지난 100년간 백두산이 겪은 변화를 한 화면에 응축했다는, 그간 접해온 작가의 ‘보리밭 그림’으론 상상할 수 없는 스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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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자의 ‘백두성산’(2000·227.3×909㎝). 대개 부분적인 묘사 외에는 거시적 안목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백두산 전체를 한 폭에 담아냈다. 눈높이를 대기권까지 띄워 구름 위로 나란히 떠오른 해와 달을 거느린 거대한 백두산을 조망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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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을 말할 때 건너뛰면 섭섭할 현대작가도 여럿이다. 그중 최근 미술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30대 작가 김선우(34)의 ‘파라다이스’(2021·227.3×181.8㎝)가 걸려 눈길을 끈다. 작가는 인도양 모리셔스섬에 살다가 1681년 멸종한 도도새를 현대인의 자화상인 양 작업해왔던 터. ‘파라다이스’는 조선 왕권을 상징하는 배경이던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는 그림 ‘일월오봉도’와 장수를 기원하는 대표적 도상 ‘십장생도’를 섞어 도도새의 낙원 같은 일상을 표현했다. 작가 안성민의 ‘날아오르다’(2022)와 ‘라이즈 업’(RISE UP·2022)은 ‘채색화의 역할’을 들여다본 전시취지에 가장 근접한 현대작품이라 할 만하다. 거대하게 키운 부적을 보는 듯하니 말이다. 노르스름한 바탕에 붉은 서체로 ‘날아오르다’와 ‘라이즈 업’이란 글씨를 새기듯 그려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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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파라다이스’(2021·227.3×181.8㎝). 조선 왕권을 상징하는 배경이던 ‘일월오봉도’와 장수를 기원하는 도상 ‘십장생도’를 섞어, 작가의 캐릭터인 ‘도도새’가 사는 낙원을 표현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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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민의 ‘날아오르다 : 라이즈 업(RISE UP)’(2022·250×1000㎝). 동서양의 모티프를 한 화면에 담았다. 누런 창호지에 경면주사를 사용해 글을 쓰는 전통적인 ‘부적’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키워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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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에서 홀대받아온 ‘채색화’의 무한변신

높고 넓은 전시장에서 속 시원한 대작의 향연에 푹 빠져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한국미술사에서 묵직하게 한 획을 그은 대가들의 수작을 촘촘히 들여다볼 수 있는 귀한 자리기도 하다. 다시 말해 굳이 장르로서의 ‘채색화’로 한계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그 의지는 전시타이틀에서 읽었다. ‘생의 찬미’는 ‘사의 찬미’에서 차용한 것. 한국 최초의 여성성악가라 말하는 윤심덕(1897∼1926)이 부른 그 ‘사의 찬미’ 말이다. 우울하고 허무한 세상굴레에 더는 매여 있지 말자는 속뜻을 이렇게 드러냈다고 할까. 생은 장르가 아니라 채색이니까.

서울과 거리가 있는 과천관에서 펼친 전시에도 개막 이후 한 달간 6000여명이 다녀갔단다. 한 작품 한 작품 앞에 관람객이 머무르는 시간이 여느 전시를 뛰어넘는다고 미술관 관계자가 귀띔한다. 전시는 9월 2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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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2021·가변설치). 8채널 영상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조선시대 유교철학의 기본윤리를 집약한 ‘효제문자도’와 당시 고가의 안료였던 청화로 그린 청화백자를 통해 물욕과 도덕 사이에 놓인 인간본성의 모순을 말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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