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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남극에 갇힌 탐험가들, 극한 환경에서 인간 본성을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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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버린 배' 번역 출간…1890년대 벨기에 원정대 탐험기

연합뉴스

남극 원정 출발 전 벨지카호
[글항아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성도현 기자 = "공포, 피로, 우울, 방향감각 상실, 어두움, 고립감, 얼음이 갑자기 벨지카호를 집어삼킬 수 있다는 위험, 비스듬히 기운 배 바닥, 쥐 출몰, 뚜렷한 원인 없이 배 전체에 퍼진 질병은 대부분의 선원이 정신을 놓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미국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줄리언 생크턴은 최근 번역 출간된 '미쳐버린 배'(글항아리)에서 남극 항해 도중 빙하 사이에 갇혀 움직이지 못하는 벨기에 원정대의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한다. 빙하로부터 탈출하기까지 약 13개월의 생활 중 4개월이 지났을 무렵이다.

저자는 1897년 8월 16일에 출항했다가 1899년 11월 5일 벨기에로 돌아온 원정대의 실화를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조명하고자 시도한다. 항해일지와 선원들의 일기, 책, 미공개 기록 등을 토대로 5년간 벨지카호의 여정을 좇았고, 현지 조사를 위해 남극에 직접 가보기도 했다.

31살의 사령관 아드리앵 드 제를라슈가 이끄는 증기선 벨지카호는 안트베르펜에서 2만 명이 넘는 인파의 환호를 받으며 남극을 향해 출발했다. 훗날 남극점에 최초로 도달하는 노르웨이 극지탐험가 로알 아문센은 일등항해사로, 북극 탐험 경험이 있는 미국인 프레더릭 쿡도 의사로 합류했다. 저자는 이들 3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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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0월6일, 적도 통과를 기념하는 벨지카호 선원들
[글항아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당초 기대와 달리 이들의 원정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급하게 원정대를 꾸리다 보니 벨기에인(13명)과 외국인(10명) 등 23명으로 구성된 벨지카호엔 경험이 부족하거나 자격이 없는 선원들이 많았다. 남극의 관문인 칠레 푼타아레나스에서 술을 마시고 물의를 일으킨 벨기에인 선원 4명은 본격적인 원정 전에 해고됐다.

원정 중에는 폭풍우 속에 선원 1명이 바다에 빠져 죽고, 또 다른 선원 1명은 배가 빙하에 갇힌 상태에서 표류하는 동안 건강이 점점 나빠져 결국 숨진다. 배에서 가장 경험 많고 신뢰할 수 있었던 갑판장은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다. 사령관은 일기에 "우리는 항해사가 아닌, 형을 선고받은 수감자들"이라고 적었다.

추위와 바람, 단조로운 일상 등은 선원들을 지치게 했다. 반복되는 통조림 음식에 질린 일부는 혐오감을 표출했고, 다수는 비타민C 부족으로 괴혈병에 걸리기도 했다. 금방 현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 때문에 정신적으로 위축된 선원들, 자주 환청을 듣는 선원들도 있었다. 쿡은 "우리는 지금 정신병원에 있다"고 썼다.

이런 상황에서 그린란드의 이누이트족과 함께 생활한 경험이 있는 쿡이 펭귄과 물범 생고기를 선원들에게 먹이자 괴혈병 증세가 완화됐다. 또 쿡은 선원들의 쇠약증과 불규칙한 심장 박동 등은 햇빛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해 벌거벗고 불을 쬐도록 하자 선원들은 다소 건강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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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지카호가 빙하에 갇혀 표류한 13개월간의 항해 기록
[글항아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 와중에도 아문센과 쿡은 잘 적응했다. 두 사람은 자유 시간에 대화하거나 얼음을 가로질러 함께 스키를 탔으며, 펭귄 사냥에 나서기도 했다. 아문센은 극지 정복을 위한 예행 연습으로 여기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고, 원정대의 분위기 메이커이기도 했던 쿡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선원들은 수로를 파고 얼음을 톱질하는 방법, 얼음 아래에서 폭약을 터뜨리는 방법 등으로 얼음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했고, 바다와 바람의 도움까지 받으며 무너진 수로의 제방을 통과해 마침내 빙하 사이를 빠져나온다.

벨지카호는 위도 75도 부근에 있는 자남극점에 도달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하진 못했지만, 식물과 동물, 지질학 데이터를 다수 수집해 기상 및 해양학 발전에 기여했다. 이들이 남긴 수집품은 왕립 벨기에 자연과학연구소에 보관돼 있다. 이들은 해도에 새로운 땅을 그려 넣었고, 남극의 겨울에서 살아 돌아왔다.

저자는 남극 원정에서 돌아온 후 선원 17명이 어떤 삶을 사는지도 추적한다. 아문센은 자신의 원정대를 꾸려 자북극점을 향해 떠나는 등 이후 많은 성과를 거두지만 노년엔 편집증적으로 되어갔다고 설명한다. 쿡은 북극이나 데날리산 등을 정복했다고 주장하지만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 사기꾼으로 여겨졌고, 사기 혐의로 수감된다고 전한다.

최지수 옮김. 472쪽. 2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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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pha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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