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9 (금)

이슈 미술의 세계

[최보윤의 부티크] 힐러리 클린턴, 오프라 윈프리 등과 함께한 ‘랄프 로렌 50주년쇼’엔 어떻게 초대받았나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최보윤의 부티크 뉴스레터 구독하기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77352

이제 알았습니다. 제 뒤에 서 있던 분이 카니예 웨스트라는 것. 미국의 유명 힙합 가수이자 프로듀서 말입니다. 패션 브랜드와 협업해 매진 열풍을 일으킨 주인공이기도 하죠.

이날 힐러리 클린턴과, 오프라 윈프리, 스티븐 스필버그, 로버트 드 니로 등 미국의 대표적인 오피니언 리더들이 대거 참석한 건 알았지만, 또 배우 앤 해서웨이와 제시카 차스테인 등 할리우드 톱스타들이 줄줄이 들어선 건 알았지만 제 등 뒤에 카니예 웨스트, 그 옆에 힙합 아티스트 찬스 더 래퍼, 그 옆옆으로는 배우 톰 히들스턴이 있었다는 걸 지금에야 깨닫다니! 그 자리에 초청됐다는 것으로, 그 시간을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서로 인사하고 축하를 나눴었는데 한번 슬쩍 말이라도 걸어볼 걸 그랬습니다. 지척(咫尺)이라는 단어가 이리 새삼스럽게 와닿다니!

조선일보

지난 2018년 미국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열린 '랄프 로렌 50주년 패션쇼. 쇼가 끝난 뒤 참석자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랄프 로렌을 향해 카니예 웨스트, 톰 히들스턴 등 유명 할리우드 스타 등이 박수를 보내며 휴대폰 영상으로 남기고 있다. /랄프 로렌 유튜브 캡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2018년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열린 랄프로렌 50주년 기념 패션쇼 현장. 오프라 윈프리, 힐러리 클린턴, 스티븐 스필버그 등 오피니언 리더와 셀럽, 기자 등 전세계 500명이 초청됐다. /랄프로렌 유튜브 발췌


조선일보

2018년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열린 랄프 로렌 50주년 기념 패션쇼 현장. 오프라 윈프리, 힐러리 클린턴, 스티븐 스필버그 등 오피니언 리더와 셀럽, 기자 등 전세계 500명이 초청됐다. /최보윤 기자


하기사 그 당시 제 시선은 한 남자에 고정됐으니 다른 쪽을 둘러볼 겨를이 없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분의 시선이 어디에 닿는지, 어떤 행동을 하고 무슨 말씀을 건네는지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순간이었거든요. 미국 패션계, 아니 전 세계 패션사(史)에 남을 장면이니까요. 끊이지 않는 박수와 환호 속에 어느 덧 글썽이는 그의 눈과 마주쳤을 때의 기분이란. 그의 수십 년 세월을 일일이 되짚진 못하더라도, 그 눈빛이 모든 걸 말해주더군요.

◇걸어다니는 아메리칸 드림, 랄프 로렌

이번 ‘뉴스레터’의 주인공은 살아있는 ‘아메리칸 드림’, 디자이너 랄프 로렌(83)입니다. 지난 2018년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열린 ‘랄프 로렌 50주년’ 패션쇼에 참석했던 이야기로 ‘뉴스레터’의 문을 열었습니다. 첫 회를 어떤 주제로 시작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그간 제가 썼던 기사와 인터뷰 원문, 취재 사진과 영상을 둘러보다 디자이너 랄프 로렌을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최근들어 MZ 세대들 사이에서 ‘랄뽕’(’랄프로렌 뽕에 취한다’는 말로, 폴로 랄프로렌 제품에 흠뻑 빠졌다는 의미)이란 신조어까지 탄생하기도 했죠. 1990년대 X세대들의 ‘교복’마냥 인기였던 폴로 랄프로렌이 어느새 ‘나이든 브랜드’ 취급을 받더니, 이젠 MZ세대를 중심으로 ‘랄뽕 맞았다’’랄뽕 취했다’고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대상이 전환된 것입니다. 패션이란 게 돌고 도는 것이라지만, 이 정도로 젊은 층에게 ‘추앙’받을지 얼마나 예상했을까요.

러시아(벨라루스) 출신 가난한 유대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미국을 대표하는 자수성가 ‘신화’가 된 랄프 로렌. 언제나 ‘꿈’을 꾸고 ‘희망’이란 단어를 입에서 놓지 않는 그는 단순히 패션 디자이너라기 보다는 삶에 대한 ‘태도’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랄프 로렌을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되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 이런 문구가 있죠. 소설 속 닉 캐러웨이이자 피츠제럴드 자신이기도 한 화자(話者)는 개츠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개성이라는 게 결국 일련의 성공적인 제스처라고 한다면, 그에겐 정말 대단한 것이 있었다. 1만 마일 밖의 흔들림까지 기록하는 지진계처럼 그는 인생에서 희망을 감지하는 고도로 발달된 촉수를 갖고 있었다. 그러한 민감성은 ‘창조적 기질’이라는 미명하에 흔히 미화되곤 하는 진부한 감성과는 차원이 달랐다. 희망, 그 낭만적 인생관이야말로 그가 가진 탁월한 천부적 재능이었으며, 지금껏 그 누구도 갖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성질의 것이었다.”

개츠비가 아닌 랄프 로렌을 적용해도 딱 들어맞는 문장이랄까요. 희망, 그 낭만적 인생관은 개츠비의 핵심이자 랄프 로렌이 보여준 삶이었습니다. 빈곤했지만 가난을 불평하지 않았고, 어릴 적 영웅삼던 농구 선수가 되기엔 키가 작았지만 외모를 탓하지 않았으며, 1987년 마흔여덟의 나이로 뇌종양 판정을 받고 생사를 장담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나는 내가 믿는 것을 할 수 있었기에 행복했다”고 말하는 이가 바로 랄프 로렌이었으니까요.

조선일보

2018년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열린 랄프로렌 50주년 기념 패션쇼. 맨 왼쪽부터 랄프 로렌의 아내인 리키 로렌, 랄프 로렌, 힐러리 클린턴. /랄프 로렌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랄프 로렌 50주년 기념 쇼 초청장/랄프 로렌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랄프 로렌 50주년 기념 쇼 초청 안내서/랄프 로렌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내가 믿는 것을 할 수 있었기에 행복하다

‘그가 믿는 것’,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쌓아온 부(富)를 기꺼이 내어주기도 했습니다. 유방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친구를 위해 뉴욕 할렘에 유방암 센터를 건립하고, 영국 윌리엄 왕자가 대표로 있는 로열 마스덴 암센터에 유방암 연구를 위한 랄프 로렌 센터를 건립하기도 했습니다. 수천억원에 달하는 돈을 투자하고 기부했습니다. 암투병을 하는 이가 없는 미래를 꿈꾸며, 암환자들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 것이죠.

역사적·미학적·인간적 가치를 보존하는데도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영국과의 독립전쟁 당시 게양했던 성조기를 보존하기 위해 1300만달러(약 169억원)를 쾌척했죠. 화가 앙리 마티스, 클로드 모네를 비롯해 디자이너 위베르 드 지방시 등을 배출한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꼴 데 보자르)의 복원과 현대화를 위해 기금을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믿는 일을 한 것’이어서 일까요. 이러한 자선 활동과 여러 기부에 대해 랄프 로렌은 평소 주위에 잘 알리지 않는 것도 유명합니다. 상대의 ‘적극적인 공개’로 알려지는 편이랄까요. 2010년 프랑스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고, 2014년엔 성조기 복원으로 스미스소니언 재단 창시자인 제임스 스미슨 200주년 메달을 받았으며, 2014년 영국 로열 마스덴 랄프 로렌 센터 오픈을 위해 윌리엄 왕세손 초청으로 윈저성을 방문하는 등 말입니다.

랄프 로렌 50주년 패션쇼에 참석한 세계적인 스타들이 앞다퉈 그에게 존경과 찬사를 보내는 걸 직접 눈으로 보고나니 그가 걸어온 길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듯 했습니다. 동시에 우리나라에선 과연 누가 이러한 경의와 사랑을 한몸에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살아있는 전설’과 인터뷰를 한다는 건, 그의 눈을 보며 생각을 직접 들어볼 수 있다는 건 극소수에만 허락된 일이었습니다. 미국 매체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죠. 게다가 50주년 패션쇼는 각국을 대표하는 오피니언 리더와 셀럽, 기자 등 500명 정도만 초청된 자리입니다. 힐러리 클린턴과 오프라 윈프리 등 서로의 적극적인 지지자이자 오랜 친구가 아니고서야, 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는 건 선택에 선택에 선택을 통과했다는 걸 뜻했습니다.

<지난 2018년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열린 랄프 로렌 50주년 패션쇼에서 축하 인사를 받고 있는 디자이너 랄프 로렌 /촬영=최보윤 기자>

조선일보

지난 2018년 랄프 로렌 50주년 기념 쇼와 인터뷰를 게재한 조선일보 '더 부티크' 섹션. /더부티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4년 만에 받은 인터뷰 허가…랄프 로렌과 두 번의 만남을 이끌다

저도 처음부터 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아마 저 같은 우여곡절을 겪고 브랜드 출장을 간 이는 드물 것 같습니다. 랄프 로렌 인터뷰 관련 이야기를 ‘뉴스레터’ 첫 회 주제로 택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입니다. 덕분에 저는 랄프 로렌을 2014년과 2018년, 그를 두 번이나 직접 만나 인터뷰할 수 있었습니다. 2014년은 영국 로열 마스덴 파트너십을 맺은 뒤 윌리엄 왕세손 초청으로 윈저성을 방문해 ‘로열 마스덴 자선 행사’에 참석한 한 것을 기념해 이뤄졌고, 2018년은 ‘랄프 로렌 50주년’ 기념이었습니다.

2014년 인터뷰가 이뤄지지 않았다면 2018년 만남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 관련 인터뷰를 할 때면 그동안 인터뷰한 사람은 누구인지, 어떤 식으로 기사가 나왔는지 등 각종 이력을 검토해 인터뷰 가능 여부가 결정되는 게 보통입니다. 브랜드 측의 필요가 있더라도, 담당 매체와 기자 등과 어느 정도 신뢰가 쌓이지 않는다면 인터뷰가 성사되는 건 기대하지 않는 게 나을 수 있습니다.

랄프 로렌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의 맨해튼 사무실에서 처음 대면 인터뷰를 하기까지 거의 4년 넘게 걸렸습니다. 지금이야 그때보다 시간이 흐른 만큼 만난 사람도 다양해지고, 어느 정도 경력도 쌓여 흔히 말하는 ‘레퍼런스 체크’ 과정에서 이전보다 수월해진 편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여러가지로 불리한 면이 적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제안서를 뉴욕 본사에 보내고 회사 소개서부터 그간의 이력, 질문지 등 보내고 수정하고, 어느 정도 진행됐는지 알아보다 또 다시 제안서를 올리고…. 대기표 들고 마냥 기다리듯 기웃거리던 시간이 지나고 ‘안되나 보다’하고 마음을 접으려던 때에 갑작스레 본사에서 “인터뷰 진행이 가능하다”는 답변이 왔습니다. 그동안 패션쇼 외에도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많아 도저히 인터뷰할 겨를이 없었다며 양해를 구하는 설명도 따라왔습니다. 암센터 건립 등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랄프 로렌이 각종 문서부터 질문지까지 꼼꼼하게 검토한 뒤 직접 ‘OK’를 했다는데, 그런데 이번에 문제는 저에게 생겼습니다. 그 사이 제가 담당이 바뀐 것이죠. 4개월도 아니고 14개월도 아니고 4년이나 지났으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죠. 일간지에선 인사 시기에 맞춰 부서가 바뀌거나 부서 내에서도 담당이 바뀌곤 합니다. 기존에 진행했던 취재 건이라도 담당이 바뀌면 새로 맡은 이에게 연결시켜 그가 진행하도록 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 사정을 설명하니 프레스 담당 측에선 사람이 바뀌게 되면 처음부터 다시 진행해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랄프 로렌이 직접 고르고 ‘이 사람과 인터뷰하고 싶다’고 의견을 전달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기부 등에 대해 굳이 나서서 알리려 하지 않았듯, 평소에 인터뷰도 자주 하는 이가 아니기에 더욱 꼼꼼히 챙긴다는 것이지요. 기자가 바뀌게 되면 모든 걸 백지로 돌려 레퍼런스 체크부터 예상 질문지까지 새롭게 검수해야 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기회가 돌아올지, 언제 올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요즘도 건재하게 쇼 무대를 펼쳐보이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언제 은퇴할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습니다. 이듬해 CEO 자리에서 내려와 디자이너와 총괄 회장 역할만 맡으며 더욱 창작에 집중했는데, CEO를 그만둘 것 같다는 이야기가 ‘은퇴’라는 헛소문을 키워낸 것도 같습니다. 사실 디자이너가 CEO 역할까지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데 그걸 수 십년 간이나 했으니 그가 특이한 편이었죠.

조선일보

2018년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열린 랄프로렌 50주년 기념 패션쇼에 참석한 카녜 웨스트. /랄프 로렌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2018년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열린 랄프로렌 50주년 기념 패션쇼에 초청된 배우 블레이크 라이블리. /랄프 로렌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지난 2018년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열린 랄프 로렌 50주년 패션쇼에 초청된 배우 제시카 채스테인/랄프 로렌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지난 2018년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열린 랄프 로렌 50주년 패션쇼에 초청된 배우 김혜수/랄프 로렌


◇사막을 가야 오아시스가 보인다

제가 후배 마음 속까지는 들어가 볼 수 없지만, 아마 그 이야기에 서운하기도 하고, 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입장을 바꿔보면 그럴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저를 더욱 당황시키는 일이 발생합니다. 기자를 바꾸는 여부로 한참 실랑이를 벌였는데, 이번에는 출장비 문제였습니다. 멀리서 오는 ‘손님’이니 뉴욕에서 1박은 본사에서 비용처리를 해줄 수 있다는데 대신 뉴욕까지는 알아서 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돌리지 않고 말하면 항공권 지원이 안 된다는 것이었죠.

2015년 ‘청탁금지법’이 제정되면서 지금은 출장 관련 규정이 좀 바뀌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브랜드에서 취재 수요가 생기면 항공권과 숙박은 부담해주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항공료를 자비 부담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새 담당자와 부장에게 말씀드리는 것도 입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그렇다고 어렵게 잡은 기회를 날려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죠.

항공료 자비 부담 이야기만 빼고 부서에 사정을 이야기했고, 상황을 잘 이해해준 후배 덕에 결국 제가 다녀오는 것으로 정리됐습니다. 월급에서 항공료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지만 해결 방법도, 타협할 거리도 따로 없었죠. 인터뷰를 못한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되돌릴 수 없으니 최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말을 빌자면 ‘정신승리’랄까요. ‘미국 유력매체들도 인터뷰 기회 한번 못 잡고 있는데, 기회를 따낸 것만도 충분히 해낸 것이다. 돈 싸들고 가서 만나자고 해도 쉽게 못 만나는 사람이다. 항공료는 인생 수업료라 생각하자’ 등등. 투자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문득 가벼워졌습니다. 당장 이윤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언젠간 이력 한 줄에 남지 않겠느냐, 최소한 누군가에겐 들려줄 장황한 경험담은 되겠다 같은 생각이 들었죠.

우여곡절 끝에 뉴욕 땅을 밟게 됐죠. 랄프 로렌 지정 호텔인 ‘더 피에르, 어 타지 호텔(The Pierre, A Taj Hotel)’에 도착했습니다. 랄프 로렌 본사(650 매디슨 스퀘어)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5성급 호텔이었습니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알파치노가 탱고를 추던 곳이 이 호텔 볼룸이고, 영화 ‘오션스 8′에서 앤 해서웨이가 멧갈라 준비를 하는 곳이 이 호텔 스위트룸입니다. 뉴욕 센트럴 파크 초입에 있어 호텔 고층에선 파크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더군요.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려 하니 제 이름 대신 ‘랄프 로렌 회사’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랄프 로렌’이라는 글자만으로도 마치 ‘무사 통과 통행증’을 받은 듯, 호텔 직원은 ‘랄프 로렌에서 오셨군요’라며 만면에 미소를 띠고 환영을 합니다.

안 그래도 인터뷰를 앞두고 떨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직원들의 환대에 파르르 하던 입술 끝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니, 그런데! 장마 끝나면 태풍이 온다고 했던가요. 예정된 체크인 시간까지는 30분 정도 남았던 터라 로비 구경도 하면서, 인터뷰 질문지도 다시 한번 외워보며 시간을 보내던 참이었습니다.

뉴욕에서 그 유명한 ‘랄프 로렌’의 이름표를 달고 어느새 의기양양해져 방에는 언제쯤 들어갈 수 있나 호출을 기다리고 있는데 직원이 급하게 걸어오는 겁니다. 전산 착오로 제 방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2018년 미국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열린 랄프로렌 50주년 기념 패션쇼/촬영=최보윤 기자>

조선일보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열린 '랄프 로렌 50주년 패션쇼'에 초대된 배우 제시카 차스테인과 앤 해서웨이 /최보윤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열린 '랄프 로렌 50주년 패션쇼'에 초대된 오프라 윈프리(오른쪽) /최보윤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열린 '랄프 로렌 50주년 패션쇼'에 초대된 배우 로버트 드 니로(가운데) /최보윤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열린 '랄프 로렌 50주년 패션쇼'에 초대된 디자이너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가 오프라 윈프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옆은 배우 피어슨 브로스넌 /최보윤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열린 '랄프 로렌 50주년 패션쇼'에 초대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미국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 오프라 윈프리/최보윤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열린 '랄프 로렌 50주년 패션쇼'에 초대된 배우 앤 해서웨이(가운데) /최보윤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희망, 그 낭만적 인생관의 랄프 로렌

랄프 로렌 측에서 예약했다고 일반 객실에서 자체 업그레이드를 시켜주려다가 더블 부킹되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죠. 다른 객실을 빨리 정리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며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합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말하자면 4년이나 걸렸는데 한 시간쯤이야!

하지만 금방 해결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진행이 계속 늦어지기에, 만실이라는 데 방은 마련될 수 있는 건지, 다른 데로 숙박을 옮겨야 하나, 이러다 호텔 로비에서 자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별생각이 오갔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고 동분서주하던 객실 담당자가 또다시 만면에 호텔리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리고, 너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죄송한 마음에 좀 더 업그레이드 된 객실을 마련해 드리려다가 기왕 호텔의 최고를 보여 드리자는 결론에 이르게 됐습니다. 보통 유명 기업가나 셀럽들이 레지던스처럼 많이 이용하는 곳인데 마침 비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신을 위해 준비된 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건네주는 키는 무려 아파트처럼 쓰는 최고급 스위트룸! 그 층을 관리하는 버틀러도 따로 있었습니다. 특급 호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서비스이긴 했는데, 그걸 직접 받아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해봤거든요. 완벽한 턱시도를 입은 중년의 은발 신사가 온화하면서도 절도 있게 인사를 하며 안내하는 모습에 이게 영화의 한 장면인가 싶었습니다.

방은…축구를 해도 되겠더군요. 기억을 더듬자면 큰 방, 작은 방, 거실에 서재, 대형 욕조가 있는 욕실 두 개에, 이 비싼 뉴욕 땅에서 정말 앞구르기를 하며 굴러도 수십 바퀴를 구르고도 남을 정도의 크기라니. 여기서 누워보고 저기서 누워보다 이쪽 TV켜보고 저쪽 음향기기 만져보고, 비눗방울 따라다니는 아이들처럼 자쿠지 이용해 목욕용 거품도 내보고 이방 저방 할 것 없이 방방 뛰어다녀 보다 보니, 저 혼자 이 넓은 곳을 하루도 안 되는 시간에 다 느껴보긴 무리일 듯했습니다. 이런 데 사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생각도 스칩니다.

마침내 만난 디자이너 랄프 로렌. 대면 인터뷰를 성사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고, 뉴욕까지 오는 데 여러 난관을 거치고, 잠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돌아온 건 천국 같은 하루였달까요. 그와의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 4년 뒤, 2018년에 열린 50주년 행사 때엔 이번엔 그로부터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언제나 희망으로 가득찬 ‘낭만적이면서도 순수한 인생관’의 랄프 로렌은 말합니다.

“사람들은 성공에 대해 타이밍과 운을 이야기합니다. 매우 중요해 보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중요한 건 타이밍을 잡는 겁니다. 당신은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행동하고, 당신이 믿는 것을 따라야 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어요. ‘나만의 넥타이를 디자인하고 싶다’며 시대 변화의 타이밍을 읽었지만, 처음부터 디자이너가 될 계획은 없었습니다. 그냥 일하는 게 좋아서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잘 됐지요. 제가 계속 버텼기 때문입니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습니다. 미리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걱정해야 하는 건 지금 자신의 신념에 맞게 일을 하고 있는지, 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지에 관한 겁니다. 할 수 있는 데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 많은 문제를 갖게 될 것입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을 믿었기에 성장하고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열심히 일하고, 그들이 믿는 것을 하는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2부에서 계속

‘최보윤의 부티크’는...

전 세계 럭셔리 트렌드부터 국내 대중문화와 라이프스타일 소식 등을 이해하기 쉽고, 심도 깊게 짚어 드리는 ‘뉴스레터’입니다. 또 여러분에게 감동을 준 이들을 만나는 코너도 꾸립니다.

부티크는 ‘富’(부)를 이야기하는 ‘부티크’이자, 프랑스어로 ‘당신’이란 뜻의 ‘VOUS’(부)를 모시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1920년대 전 세계를 대표하는 예술문화계 인사들과 석학들이 모였던 프랑스의 ‘살롱’이자 우리네 ‘사랑방’을 표방합니다. 직접 발로 뛴 기사들과, 기사에서 못다 전한 이야기를 부티크에서 차 한잔 마시며 대화하듯 풀어낼 계획입니다.

최보윤의 부티크 뉴스레터 구독하기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77352

[최보윤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